우리 산하와 문화재

실상사, 지리산자락에 앉아 천왕봉 바라보는 편안한 절집

모산재 2010. 5. 11. 22:16

 

2010년 4월 24일 토요일, 오후

 

 

지리산을 중도에 포기하고 백무동으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실상사로 향한다. 마천을 들렀다 다시 되돌아서 인월 방향으로 만수천을 끼고 얼마간 달리다 보면 강 건너 너른 들판에 자리잡고 있는 실상사를 발견할 수 있다.

 

 

실상사 앞에서 내리니 이미 점심 시간도 훌쩍 지났다. 가게에서 우유를 사서 배낭에 준비해온 빵을 꺼내 점심을 먹는다. 옆집 식당 여주인이 튀김을 만들고 있다가 나중에 오라며 막걸리와 쑥튀김을 맛보라고 준다. 맛이 괜찮아 실상사를 둘러본 뒤 먹으리라 생각했는데,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빵으로 허기를 달랜 뒤에 실상사로 향한다. 실상사를 가기 위해서는 남강의 상류인 만수천을 건너야 한다. 지리산 골골물들이 다 모여들어 제법 넓은 강을 이룬 만수천은 실상사를 호위하듯이 거센 물결을 이루며 힘차게 흘러내린다.

 

 

 

만수천을 건너는 다리가 해탈교이다.

 

 

 

 

▼  해탈교. 강 건너 오른쪽으로 실상사 전각의 모습들이 보인다. 돌장승은 강의 양쪽 언덕에 모두 세 기가 서 있다.

 

 

 

 

해탈교 양쪽 언덕에는 유명한 실상사 돌장승 세 기가 우두커니 지켜서서 세속의 온갖 잡귀로부터 실상사를 보호하고 있다. 원래 돌장승이 넷 있었지만 1933년 홍수 때에 하나가 떠내려가 버려 지금은 셋만 남았다. 벙거지 쓰고 퉁방울 눈을 한 해학적인 표정의 이들 돌장승들을 만나는 것은 실상사를 찾는 즐거움의 하나다.

 

☞ 실상사의 돌장승 이야기 → http://blog.daum.net/kheenn/15853295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분지에 있는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천년 고찰이다.

 

해탈교를 건너며 동쪽을 바라보면 흰구름 아래 우뚝 솟아 있는 천왕봉을 볼 수 있다. 천왕봉에서 칠선계곡을 흘러내린 물들이 이렇게 만수천을 이루어 진주 남강으로 달린다.

 

 

 

 

실상사가 처음 자리잡을 때만 해도 이곳은 심산유곡이었지만 사찰을 찾아드는 사람들로 마을이 이루어지고 논밭이 만들어지면서 오늘날처럼 넓은 들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실상사는 선종 9산 최초의 가람이라고 한다.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증각은 선종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수철화상과 편운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세조 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하고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고도 하는 설이 동시에 전한다. 화재로 인해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았고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백장암에서 기거했다고 한다.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 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하여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 전쟁 중에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절 입구 한쪽엔 '죽어서 흐르는 강도 강인가? 4대강 살리기로 4대강 다 죽는다!'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막대한 국가 재정을 쏟아부으며 멀쩡히 살아 있는 강들을 '살린다'면서 '죽이고 있는' 이 정권의 넋나간 국토 파괴 놀음, 이를 속수무책 지켜보며 홧병을 앓고 있는 국민들이 그 얼마일까.

 

 

 

 

 

해탈교를 건너 들길을 따라 편안한 걸음으로 걷다보니 천왕문이 나타난다.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가 일주문을 대신 한 것일까. 실상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대개의 절집이 그러하듯 실상사의 천왕문도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양쪽에 네 천왕을 안치하고 가운데로 통로가 있다. 갑옷을 입고 마귀를 밟고 선 채 눈을 부릅뜬 형상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실상사는 대중과 호흡을 함께 하려는 스님들의 뜻이 천왕문에서부터 느껴진다. 사천왕 앞에는 친절하게 이름표를 붙여 놓았다. 지국천왕(동), 증장천왕(남), 광목천왕(서), 다문천왕(북)...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온몸에 동방을 나타내는 오행색(五行色)인 청색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은 칼등을 잡고 있다.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허리에 대고 있거나 손바닥 위에 보석을 올려놓은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붉은빛을 띤 몸에 화난 듯한 눈을 가지고 있다.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몸이 흰빛이며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입을 벌리고 있다.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검은빛을 띠며 비파를 잡고 줄을 튕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왼쪽 뜰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는데, '풍게나무'라는 이름표가 달려 있다. 팽나무와 같은 속의 나무이다.

 

 

 

 

 

벌판에 서 있는 절집이라 실상사 가람의 마당은 평활하여 편안함이 절로 느껴진다. 운문사도 절터가 평활하기야 하지만 운문사와는 달리 절집이 작고 소박해서 마치 여염집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에 젖는다.

 

 

 

단청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정면 세 칸의 조촐한 불당 앞, 너른 마당의 한 가운데에는 석등이 서 있고 양쪽에는 닮은꼴의 두 삼층석탑이 대칭을 이루고 서 있다.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단청이 없어 소박한 모습이다.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인데, 보광전 오른쪽 넓은 터에는 주춧돌이 많이 남아 있어 원래 굉장한 규모였음을 짐작케 한다.

 

 

 

 

 

보광전은 '널리 광명을 놓아 십방을 두루 비친다는 뜻이 담긴 불전'이라는데, 비로자나불을 모신 경우(숭림사)도 있고 석가모니를 모신 경우(대전사)도 있고 아미타불(용화사)을 모신 경우고 있고 관음보살을 모신 경우(청암사)도 있으니 주존불의 성격과는 관계 없는 전각 명칭인 듯하다.

 

보광전에 모셔진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허리선이 드러나지 않은 당당한 좌불상이다. 양 옆으로는 관음, 세지 두 보살 입상이 협시하고 있는데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법당 안은 여염집 방안처럼 수수하게 하얀 벽지를 발랐다. 기둥도 특별히 장식을 하거나 칠하지 않고 벽지를 두른 모습 그대로이니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실상사 삼층석탑(보물 37호)은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쌍탑이다.

 

 

서탑

 

 

 

 

 

동탑

 

 

 

 

 

실상사를 창건할 때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8.4m이다. 2중 기단 위에 3층탑을 올린 모습으로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드문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조형미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다.

 

쌍탑 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寶珠)가 모두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다.

 

 

 

쌍탑과 보광전 사이에 서 있는 실상사 석등(보물 35호)은 규모가 크면서도 조각이 섬세하여 절로 눈길을 끈다.

 

 

 

 

규모가 커서 불을 밝히기 위한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쌍탑과 비슷한 시기인 9세기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는데도 천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넘기고도 풍화의 흔적이 별로 없는 온전한 모습이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귀꽃)을 얹었다. 낙수면에는 8장의 연꽃잎으로 전면을 덮은 것이다. 정상에는 복발형의 노반이 놓이고 그 위에 고복형(鼓腹形)의 간(竿)과 8각의 보개와 보주가 장식되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통일신라 후기 작품으로 본다. 이 석등은 보림사 석등(국보 제44호)과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호)의 장단점을 뽑아 절충한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 보광전에서 천왕문 방향으로 본 절마당 모습

 

 

 

 

 

 

실상사는 일본과 관련된 구전이 유난히 많은 절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실상사가 창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절이 불타 사라졌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너머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이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가람배치도 강과 나란히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상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이 있었는데 현재 깨진 상태로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고, 조선 숙종 20년(1694)에 주조한 범종은 보광전에 있다. 높이 123㎝, 입 지름 83㎝의 이 보광전 범종에도 다음과 같이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 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호카이도와 큐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소문 때문에 일제 말기에는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종 치는 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지도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러한 사실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 법당 출입문 옆 기둥에 달아 놓은 이 작은 선반의 용도는? 예불시 문을 열기 위해 다기(茶器)나 마지(밥)를 잠시 올려놓는 곳이라고...

 

 

 

 

▼ 보광전 뒤뜰의 잣나무와 느릅나무

 

 

 

 

▼ 보광전 모퉁이에서 바라본 앞마당 풍경

 

 

 

 

 

보광전 동쪽에는 약사전이 있다.

 

 

 

 

약사전은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으로 1883년 함양, 산청 유생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약사전 중앙의 꽃문창살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주목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전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철조약사여래좌상(보물 41호)과 조선 후기에 그린 약사불화가 있다.

 

 

 

 

철조약사불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까지 들판에 있었는데 약사전을 세운 후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약사불은 보통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는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런 점으로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상이라고도 하고, 아미타불의 수인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석탑 2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약사불로 본다.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탔다고 한다.

 

 

 

 

건장한 신체와 물결식의 옷주름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양식이 남아 있지만, 소 둔하고 무거운 표정의 불상은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행하는 철불의 초기 작품으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할 때 나온 철제 손과 같은 모양이다. 대좌는 흙으로 만들었으나 허물어진 곳이 많아 자세한 모습은 알 수 없다.

 

 

 

보광전 앞마당 동쪽으로는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시왕(十王)을 모신 전각이다. 절에 따라서는 이름을 시왕전, 또는 지장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길선당(吉禪堂)의 옛터에 건립된 것으로 장육전(丈六殿) 동쪽에 있던 것을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에는 본존인 지장보살상 등 3존상, 시왕상 10구, 판관상 6구, 인왕상 2구가 있다. 지장보살상 뒤에는 1987년에 조성한 지장시왕도가 있다.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시왕상은 오른쪽으로는 제1 진광대왕, 제3 송제대왕, 제5 염라대왕, 제7 태산대왕, 제9 도시대왕이 있고, 왼쪽으로는 제2 초강대왕, 제4 와관대왕, 제6 변성대왕, 제8 평등대왕, 제10 전륜대왕이 배치되었다.

 

 

 

 

 

▼ 명부전 내부의 시왕 등 조상 배치도

 

 

 

 

 

보광전의 서편에는 인간의 수명 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모시는 칠성각이라는 작은 전각이 있다.

 

 

 

 

칠성은 원래 도교에서 나온 것이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우(祈雨)· 장수· 재물을 비는 무속신앙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후 칠성신에 대한 제사는 조정과 민간에서 이어다가 불교에 수용되어 사찰 안에 칠성각을 짓고 칠성신을 모시게 된 것으로, 이는 우리 나라의 절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칠성각에는 칠여래(七如來)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탱화로 그려 봉안하고 있다.

 

 

 

 

 

 

전각들을 대강 둘러본 후 전각 뒤 풀과 나무들이 자리한 너른 공간으로 눈길을 돌린다. 마음이 절로 널널해진다.

 

멀리 돌담으로 바깥 세상과 경계를 이루었지만 대나무 숲 저쪽으로 세속과 자연스럽게 길이 이어진다. 지리산 자락과 들판이 이어지는 곳에서 실상사는 세속과 바람처럼 맑은 소통을 이루는 듯하다.>

 

 

 

실상사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대표를 하였던 도법스님이 계셨던 절이기도 하고, 사부대중 누구나에게나 열려 있는 몸과 마음의 수행처와 안식처로, ‘사부대중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실천하고 있는 절이라 더욱 기분 좋게 느껴진다.

 

중고등 과정의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 학교', 귀농교육의 산실 '실상사 귀농학교', 재가불자들의 친환경 협동농장인 '실상사 농장', 지역 공동체를 꿈꾸는 '사단법인 한생명' 등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공동체 운동을 실천하는 모습도 아름답다.

 

 

 

 

뜰의 빈터에 불꽃처럼 환하게 핀 양지꽃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남서쪽 담장 밖 귀퉁이에 있는 극락전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 실상사 부속암자와 문화재

실상사에 딸린 암자로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이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도내에서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국보와 보물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