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진성여왕의 사랑이 아로새겨진 해인사의 가장 오래된 암자, 원당암

모산재 2010. 3. 6. 20:30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암자인 원당암은 조망이 좋기로도 유명한 암자이다.

 

원당암 언덕에 오르면 가야산 정상의 봉우리와 그 기슭 여기저기에 갓들고 있는 본절과 암자들이 그림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또한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의 사랑이 아로새겨진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말이 암자이지 웬만한 대사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규모를 자랑한다.

 

 

 

본절인 해인사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원당암은 해인사와 마주보는 비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봉황이 깃든다는 비봉산이니 암자 본디 이름은 '봉서사(鳳棲寺)'였다고 한다.

 

원당암은 애초 해인사 창건을 위한 기초 작업장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신라 40대왕 애장왕은 공주의 난치병이 낫자 부처의 가호로 여기고 802년에는 순흥대사가 발원한 해인사 창건을 몸소 나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왕은 서라벌을 떠나 가야산에 임시로 작은 집을 지어 절 공사를 독려하고 정사를 보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원당암이라는 것이다.

 

원당암이 된 것은 신라 말기 51대 진성여왕 때부터이다. 진성여왕은 각별한 관계에 있던 각간 위홍이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해인사를 원당으로 삼았다고 한다. 향가집 '삼대목'의 편찬자로 잘 알려진 위홍은 진성여왕의 숙부로 진성여왕과는 20세 이상의 차이가 있었지만 사실상의 남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둘 사이를 패륜이나 불륜으로 다룬 글들이 많지만, 도덕적 재단과 관음증적 흥미거리의 양 극단에서 바라본 것들이다. 어쨌든 두 사람은 '부적절한 관계'를 넘어서 깊은 인연을 맺었던 사이였음은 사실인 듯하다 .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원당암에 전해지고 있는 주요 유물들은 진성 여왕이 위홍을 위하여 조성한 것이고, 그 시기를 진성여왕 재위기간인 888년에서부터 897년에 이르는 10여 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해인사 앞길을 지나 홍제교를 건너면 홍제암과 원당암으로 가는 두 갈래 길이 나타난다. 오른쪽 길로 오르면 홍제암, 왼쪽 계곡길로 내려서면 원당암이다.

 

 

 

 

▼ 원당암으로 들어서는 길, 다시 작은 계곡을 건넌다.

 

 

 

 

 

 

역사에 묻혀 있던 원당암이 오늘날 다시 주목을 받고 활기를 띠게 된 것은 혜암스님이 머문 이후부터라고 한다. 혜암스님은 해인총림 방장을 지내고 1999년 4월에 조계종 제10대 종정으로 추대되신 분이다. 현재 원당암은 스님들과 똑같이 일반인들도 여름과 겨울에 한철씩 안거(安居)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국내 제일의 재가불자 참선도량으로 변모되었다.

 

 

 

원당암 입구.

 

암자로 보기에는 규모가 크고 대개의 건물들이 새로 지은 것들이어서 암자의 특유의 예스럽고 고즈넉한 분위기는 별로 없다. 가운데 보이는 언덕을 중심으로 날개를 펴듯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오르면 큰법당인 보광전과 혜암스님이 거처했다는 미소굴이 차례로 나타난다.

 

 

 

 

 

 

 

원당암의 주된 법당인 보광전에는 주목할 만한 유적이 둘 있다.

 

보물 제 51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점판석 다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정교하게 안상(眼象)을 넣은 축대석이 그것이다. 이들 석조물에는 모두 각간 위홍을 위한 원당으로 정성을 다하여 조성한 진성 여왕의 섬세한 배려가 엿보이는데, 특히 전각의 축대에까지 안상과 연화문을 새겨 넣은 데서 각별함을 느끼게 된다.

 

보광전 전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축대석의 안상과 연화문은 다른 곳에서는 유례가 없는 특이한 작품이다. 높이는 약 40cm로 나지막하지만 정성이 스민 품격있는 작품이다. 상부에는 아름다운 몰딩과 연꽃모양을 지닌 머릿돌을 넓은 판석으로 배치했고, 그 아래 면석은 폭 약 51cm, 높이 약 27cm의 아름다운 안상을 조각하였다. 

 

 

 

탑신이 사라지고 옥개석만 남은 점판암의 다층석탑, 화강석 기둥 위에 화사석이 사라져버린 석등, 그리고 전각의 바닥을 받치고 있는 축대, 이 모두가 각간 위홍을 위한 진성여왕의 마음이 배어 있는 듯하다. 축대석을 자세히 담지 못해 아쉽다.

 

 

 

 

 

 

보광전 앞의 석탑은 현재의 위치가 원 위치로 추측된다.

 

 

 

이 석탑은 탑신부의 전 부재가 점판암으로 이루어진 청석탑인데, 청석탑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된 양식이지만 이 석탑은 진성여왕대의 것으로 본다. 탑신부는 사라져 버리고 없고 옥개석만 남았다. 옥개석으로 쌓아올린 현재의 탑 높이는 240cm이다.

 

 

 

석탑의 구조는 지대석을 포함하여 3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대리석 탑신부를 마련하였고, 탑신의 네 모서리에는 독립된 석주를 배치하여 상부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초층 탑신부는 공간을 형성하여 내부에 사리 장엄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다층석탑 옆에는 석등이 조성되어 있는데, 하대석과 상대석의 옥개석은 점판암, 다른 부재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화사석은 사라지고 없다. 석등을 점판암으로 만든 것도 유례없는 일이라 한다.

 

 

 

어쨌거나 보광전의 석조 유물들은 진성여왕과 각각 위홍의 각별한 인연으로부터 창조된 걸작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몇 년 전 해인사 법보전의 비로자나 불상이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과 쌍동이 불상임이 밝혀졌는데, 이 두 불상이 진성여왕과 위홍을 새긴 것이라 하여 떠들썩한 일이 있다. 여기에 대해 논란이 없지 않지만 , 천 년을 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지 싶다.

 

 

보광전 뒤 언덕을 오르면 미소굴(微笑窟)이라는 건물이 나타난다. 주황색 황토벽이 강렬한 기와집은 절집이라기보다는 여염집처럼 느껴진다. 이곳은 혜암스님이 머무시던 곳이다. 집 한켠엔 나무 기둥을 세우고 스님이 강조했던 가르침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구절을 새겨 놓았다.

 

 

 

 

 

 

혜암스님은 개혁 종단에 앞장 서 조계종 분규를 종식시키고 1999년에는 종정에 추대되었던 분이다. 1947년 봉암사에서 성철(性澈)·청담(靑潭)·향곡(香谷) 등과 함께 결사안거(結社安居)를 시작해 이 때부터 50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실천하셨던 분이다.

 

 

스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다섯 가지의 가르침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공부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수지맞는 일 중의 하나가 공부하다 죽는 일인데 목숨 내놓고 전진하다 보면 견성이 가까워 오고 죽음은 멀어집니다."

 

 

공부하다 죽어라.
밥을 많이 먹지 말라.
남을 도와라.
감투를 맡지 말라.
일의일발(一依一鉢)로 살아라.

 

 

 

 

 

2001년 12월 31일 오전, 혜암스님은 사바와의 인연을 마치며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겼다고 한다.

 

 

我身本非有(아심본비유)   내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心亦無所住(심역무소주)   마음 또한 머물 바 없도다.
鐵牛含月走(철우함월주)   무쇠소는 달을 물고 달아나고
石獅大哮吼(석사대효후)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도다.

 

 

"팔만대장경을 둘둘 말아서 하나로 줄여 놓으면 마음 心자 하나" 라고 하던 스님의 법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수행이라는 것도 결국 마음을 깨치는 것, 자신의 본심을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생을 살며 자신의 본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 힘든 것이다.

 

 

 

 

원당암의 중심에는 해인사 본절을 마주 보는 언덕이 솟아 있다.

 

 

▼  맞은편에 보이는 해인사 전경

 

 

 

 

 

 

잔디를 예쁘게 입혀 놓은 언덕은 좌우에 배치된 원당암 전각을 날개로 봉황새의 몸통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 언덕 위에는 가야산 제일의 전망대라고 하는 '운봉교(雲鳳橋)'가 설치되어 있다. 그냥 전망대이지만 굳이 '다리 교(橋)'자를 붙여 놓았다.

 

봉황이 알을 품는 형세의 명당이라는 원당암. 비상하는 봉황의 모습으로 가야산의 웅묘한 정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야산 최고의 전망대로 운봉교는 가야산 정상, 해인사 큰법당과 장경각 전경을 응시한다. 멀리 백련암 뒷산도 보인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겨울 설경, 구름안개와 곁들여진 일출의 장관은 아주 일품이라고 한다.

 

 

 

▼  왼편으로 보이는 가야산 정상

 

 

 

 

 

▼ 오른쪽 멀리 보이는 백련암 뒤편 노송과 바위, 암자는 지족암(?)

 

 

 

 

▼ 뒤편 언덕에서 내려다본 원당암

 

 

 

 

 

▼ 암자 내에 발길이 닿는 길에는 맷돌을 징검다리처럼 놓아 운치를 살리고 있다.

 

 

 

 

 

 

※ 원당암 전각 배치도

 

① 보광전 ② 선방 ③ 영당 ④ 무설 ⑤ 종무소 ⑥ 염화실 ⑦ 미소굴 ⑧ 심검당 ⑨ 후원 ⑩ 다층석탑 ⑪ 인파스님 사리탑 ⑫ 해우소 ⑬ 창고

 

 

 

더보기
※ 혜암(1920~2001)

 

본관은 김해(金海), 속명은 남영(南榮), 법명은 성관(性觀)이다. 혜암은 법호이다. 1920년 3월 22일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나 14세까지 서원에서 한학을 익힌 뒤, 194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서양의 종교와 동양철학을 공부하던 중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읽고 출가를 결심하고 귀국하였다.

1946년 합천 해인사에 출가해 효봉(曉峰)·한암(漢巖)·동산(東山)·경봉(鏡峰) 등 당대의 선승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이후 평생을 하루에 한 번만 먹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性澈)·청담(靑潭)·향곡(香谷) 등과 함께 결사안거(結社安居)를 시작해 이 때부터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실천하였고, 이후 오대산 상원사, 부산 범어사, 설악산 오세암 등지에서 안거하면서 수행에 힘썼다. 1967년 해인총림 유나(維那), 1970년 해인사 주지를 거쳐 1979년부터 12년간 해인총림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이후 해인총림 수좌(1981)·부방장(1985), 조계종 원로의원(1987), 원로회의 부의장(1991)을 지내고 1993년 성철의 뒤를 이어 해인총림 제6대 방장(方丈)이 되었다. 이어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거쳐 1999년부터 조계종 제10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2001년 12월 31일 열반할 때까지 종정으로 있었다. 효봉·경봉·한암·동산·성철·청담의 뒤를 이어 대한불교조계종의 선맥(禪脈)을 이어 온 대표적인 선승으로 꼽힌다. 1994년 개혁회의를 출범시켜 개혁종단을 탄생시켰고, 1998년에는 종단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2001년 12월 31일 "내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我身本非有) / 마음 또한 머무르는 곳 없도다(心亦無所住). / 무쇠소는 달을 머금고 달아나고(鐵牛含月走) / 돌사자는 소리 높여 부르짖는다(石獅大哮吼)."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두산백과사전>

 

 

 

※ 진성여왕과 위홍

 
1
 
숙부와의 사랑, 패륜이었는가? 후세 사가들에 의해 신라 멸망의 중요한 요인으로까지 꼽혔던 진성여왕과 숙부 위홍의 불륜(또는 패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상당히 소략(素略)하다. 『二年 春二月 少梁里石自行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 常入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 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及魏弘卒 追諡爲惠成大王 此後 潛引少年美丈夫兩三人.』 '진성왕이 전부터 각간 위홍과 좋아지내더니, 이때에 이르러서는 항상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 그에게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수집 편찬케 하였는데, 그 책을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이 죽으니 시호를 추증하여 혜성대왕(惠成大王)이라 하였다.' 그 후, 임금이 은밀히 미소년을 宮에 끌어들이니 (음탕 문란하게 되었다).

진성여왕의 불륜 상대인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이라는 시호를 내린다는 것이니, 부도덕적인 행위를 저지른 위홍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인정해 주는 셈이 되는 것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외에 <삼국사기>에는 제49대 헌강왕조의 '(헌강왕이) 즉위하자 이찬(伊) 위홍을 임명하여 상대등으로 삼고'란 구절이 전부다. 이 기록만으로는 둘이 정말 삼촌과 조카 사이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지만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刹柱本記)에 위홍이 진성여왕의 아버지인 경문왕의 친제(親弟)라고 나오기 때문에 진성과 둘의 사이가 불륜이라는 비판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신라 사회에서 진성여왕과 삼촌 위홍의 관계는 정말 비판받을 일이었을까. 결혼하지 않은 여왕에겐 공인된 남편이 있었다. 한편,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관점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삼국유사> 왕력 진성여왕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第五十一, 眞聖女王 金氏.名晏憲.卽定康王之同母妹也.王之匹(魏弘)大角干.追封惠成大王.』 '(51세 진성여왕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만헌(曼憲)이니 정강왕의 동복누이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 추봉(追封)한 혜성대왕이다.' [이름은 만(晏)이고, 헌강왕과 정강왕의 동복누이가 맞을 듯] 일연이 보기에 위홍은 진성여왕의 남편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왕력은 또 선덕여왕의 남편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라고 적고 있다. 남성 성골이 없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여왕들은 정식으로 국혼을 치르지는 않았어도 공인 받은 남편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신라 골품제 사회의 한 특징이지 '음란'이나 '간통'이라는 말로 비하할 것은 아니다. 왕실의 근친혼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신라 왕실은 권력의 누수를 방지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골품제를 통해 광범위하게 근친혼을 인정하였다. 심지어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아버지가 다른 동복 소생의 남매가 혼인한 기록도 있다. 예를 들어 법흥왕의 동생과 법흥왕의 딸이 혼인하여 태어난 이가 진흥왕이었고, 무열왕 김춘추 또한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과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진지왕이 진평왕의 삼촌이므로 용춘은 천명의 5촌 당숙인 셈이다. 또한, 무열왕은 김유신의 두 누이인 문희, 보희와 혼인했으며, 문희의 딸인 지소는 삼촌인 김유신에게 시집을 갔고, 김유신의 딸 신광은 다시 사촌인 문희의 아들인 문무왕에게 시집간다.

이처럼 근친혼은 당시의 신라사회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이덕일, 신동아 2000년 7월호>
 

 

 

2
 

오래 전에 진성여왕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글 말미에서, "경문왕의 딸이며, 헌강왕과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며, 그에 못지 않게 숙부 위홍 각간을 사랑한 여인이기도 했던 진성여왕 운운"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뭇 단정적인 어조로 내렸던 그 판단이 좀 섣불렀던 것 같다.

그 동안 진성여왕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다보니 진성여왕을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가 새롭게 하나의 수수께끼로 떠오르고 있었지만 그 수수께끼를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부족이었던 것이, '결정적'이라고 할 만한 자료를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귀한 자료가 하나 나오기는 했었다.

2년 전 해인사에서 진성여왕과 관련이 있는, 아니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짤막한 문건을 하나 공개했는데 다름 아니라, 해인사 장경각 안 법보전에 있는 목조 비로자나불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불상에 금칠을 다시하고 복장(腹藏)유물을 봉안하는 개금불사를 준비하던 중에, 불상의 복장물 납입 공간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誓願大角干主燈身賜弥右座妃主燈身O(서원대각간주등신사미우좌비주등신O)
    中和三年癸卯此像夏節柒金着成(중화3년계묘차상하절칠금착성)

 

해인사 측에서는 이 두 문장을 두고, 첫줄을 "서원하옵나니 대각간님께서 자신을 밝히시어 은혜로 가득 채우시고, 오른쪽 자리의 왕비님의 등불 몸도…"로 읽고, 둘쨋줄은 "중화3년 계묘에 이 상(像)을 하절에 옻칠과 금칠을 착수하여 이루었다"로 읽고 있다.

묵서명의 두 번째 줄 첫머리에 쓰여진 '중화3년 계묘'라는 귀절이 불상의 조성연대를 말해주고 있는데, 헌강왕 9년인 883년이다. 이렇게 연대가 밝혀지면서, 이 불상은 지금까지 발견된 우리나라 목불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같은 해인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지고 있던 비로자나불이, 먼저 발견된 법보전 비로자나불과 크기와 형태가 같고 복장유물도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두 불상은 같은 시기에 조성된 쌍둥이 불상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렇게 되자 해인사 측은 두 비로자나불을 각각, 묵서명에 나오는 대각간과 비(妃)의 원불(願佛)로 보고, 나아가서 대각간을 위홍으로, 비(妃)를 진성여왕으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추정에 대해 일부에서는 묵서명에 나오는 헌강왕 9년에는 위홍이 살아 있었고, 진성여왕도 왕이 아닌 북궁 장공주(北宮 長公主)로 불리우던 시절이어서, 두 불상이 각각 위홍과 진성여왕의 원불이라는 주장에 무리가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인사 측에서는 두 불상이 대각간 위홍과 진성여왕의 원불이라고 기정사실화면서 2005년 9월부터 100일 동안 '두 분 비로자나부처님 친견대법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6년 여름에는, 칠월 칠석날에 '비로자나데이' 축제를 열면서 축제의 부제를 '천년의 사랑'이라고 붙여 두 사람의 사랑을 기리는 행사를 대규모로 벌이기까지 했다.

이제 와서 솔직해지자면, 나는 먼젓 글에 썼던 것처럼 진성여왕이 "숙부 위홍 각간을 사랑한 여인"이었던지에 대해 자신이 없다. 아니 근래에 들어와서는 도리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있었던가를 의심하기 시작한 편이다. 내가 이렇게 옛 주장을 번복하려는 데에는 나름대로 뒤늦은 깨달음이 있기도 하다. 그 깨달음을 말하기 전에 진성여왕에 관한 기본 텍스트로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부터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진성여왕의 이름은 만헌(曼憲)인데 곧 정강왕의 동모매(同母妹)이다. 왕의 배필(配匹)은 위홍 대각간이니 추봉하여 혜성대왕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진성여왕과 위홍이 부부였다는 얘기다. 해인사 측에서 두 불상을 위홍과 진성여왕의 원불이라고 단정하여 '비로자나 데이'라는 행사를 벌인 데에는 바로 이 대목이 근거가 되었던 것같다.

그러나 정사(正史)로 꼽히는 『삼국사기』의 기사는 『삼국유사』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진성여왕 즉위년조 기사를 보면 "휘(諱)는 만(曼)이요, 헌강왕의 여제(女弟)이다."라 했고 그 2년조 기사에서 "왕이 전부터 위홍과 좋아지내더니[與魏弘通], 이 때에 이르러는 항상 입내(入內)하여 용사(用事)케 하고 …… 위홍이 죽으니 그를 추시(追諡)하여 혜성대왕이라 하였다. 왕은 이후로 비밀히 2, 3명의 소년 미장부를 불러들여 음란(淫亂)하며 이에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 논조 자체가 판이하다. 전자(前者)가 "왕의 배필…" 운운하여 위홍을 진성여왕의 배필로 지칭하고 있는 데에 비해, 후자는 "위홍과 통(通)했다"고 하여 불륜관계로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위홍이 죽은 후에는 2, 3명의 소년 미장부를 불러들여 음란한 행위를 했다"는 직설적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는『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두 기록 중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두 기록 중의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진성여왕 관련 기사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진성여왕과 위홍은, 『삼국유사』에서는 '부부(夫婦)' 사이고, 『삼국사기』에서는 '사통(私通)' 관계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문헌은 하나의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음이 드러나는데, 그 '하나의 사실'이란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같이했던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막말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섹스를 즐겼던 것일까? 나는 그건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국왕이나, 대각간이라는 지위 자체가 부담스러워서라도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왜?"라는 물음이 뒤따른다. 숙질(叔姪) 사이면서 군신(君臣) 관계에 있었던 두 사람이 적지않은 부담을 떠안으면서까지, 왜 남녀의 관계로 다시 얽히게 되었을까? 이쯤에서 우리는, 진성여왕과 위홍 두 사람의 관계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왕위 계승과 관련되는 정치적인 상황을 세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같다.

진성여왕은 작은 오빠인 정강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정강왕은 그 형인 헌강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고, 헌강왕은 또 그 아버지 경문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한 마디로, 경문왕 이래로 그 맏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딸이 차례로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이는, 신라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3대(代)에 걸친 '형제 상속'이었으며, 진성여왕은 그런 '형제 상속'이라는 변칙적인 왕위계승의 마지막 주자라는 위치에 처해 있었다.

'하대(下代) 신라'에서는 왕위 계승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38대 원성왕 이후부터 살펴보자면 태자의 계위(繼位)를 통한 정상적 왕위계승이 네 번 있었고, 나머지 네 번은 찬탈에 의해 이어졌다. 특히 42대 흥덕왕 이후에 43대 희강왕, 44대 민애왕, 45대 신무왕이 연이어 찬탈(簒奪)을 통해 왕위에 오른다. 이런 변칙적인 과정 끝에 46대 문성왕이 자신의 숙부인 헌안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어서 47대 헌안왕이 유조(遺詔)로 사위인 경문왕에게 48대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말하자면 평화적인 정권 이양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결과 왕권이 경문왕 집안으로 넘어와 4대에 걸쳐 왕위가 계승되고 있었는데 정강왕 이후, 경문왕가는 진골(眞骨) 남자의 대(代)가 끊기어 경문왕의 딸인 만(曼)이 진성여왕으로 왕위를 잇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진성여왕을 뒤이을 후사(後嗣)가 없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경문왕이 죽은 후 국정은 경문왕의 동생인 위홍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위홍은 친형인 경문왕이 죽은 후, 자신의 장조카인 헌강왕이 10여 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상대등이 되어 헌강왕을 보좌하면서 주도적으로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그러한 사정은 헌강왕이 10여년 재위 끝에 죽고, 그 동생이 정강왕으로 즉위하였을 때에도 여전했다. 위홍은 경문왕 재세(在世) 때부터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경문왕 말년에 이찬 근종의 모반을 진압했을 뿐 아니라, 헌강왕 5년에 모반하려던 일길찬 신홍을 복주(伏誅)한다든가, 정강왕 2년에는 한주(漢州)의 이찬 김요가 일으킨 반란을 토주(討誅)하는 등 오랫동안 조카들의 왕권을 지켜주고 있었다. 이처럼 위홍이 섭정 역할을 하면서 경문왕가의 왕위가 유지되어 왔는데 진성여왕 즉위 후에는 후사(後嗣)의 부재로 왕권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갈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홍은 자신의 가문에서 계속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대책 마련에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뾰죽한 대책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진골 남자가 있어야 하는데 경문왕가에서 위홍 말고는 다른 진골 남자가 없었다. 나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이러한 위기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책(苦肉策)으로, 위홍 자신이 독신이었던 진성여왕과 결합하는 방안을 내놓았으리라고 한번 생각해 본다. 다시 말해, 위홍이 자신과 진성여왕과의 사이에서 소생을 보아 왕통(王統)을 이으려는 도박을 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숙질 간의 결합이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윤리적으로 부당함을 넘어 엽기적으로까지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같다. 그 이유는, 진흥왕이 자신의 고모와 결혼했다든가, 흥덕왕이 자신의 질녀(姪女)와 결혼했다든가 하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 왕실에서는 근친혼을 금기(禁忌)로 여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몇몇 학자들이 당시 진성여왕은 20대 초반, 위홍은 40대 중반으로 그 나이를 추정하고 있음에 비추어, 두 사람 다 충분히 생산(生産)을 기대할 수 있는 연령이었다는 점도 그런 결합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진성여왕 2년에 위홍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러한 시도는 무위(無爲)로 끝났다. 위홍이 죽자 진성여왕은 위홍을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시(追諡)했는데 이는 위홍의 노고(勞苦)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성여왕은 바로 황음(荒淫)에 빠지게 되어, "왕은 이후로 비밀히 2, 3명의 소년 미장부를 불러들여 음란(淫亂)하며 이에 그들에게 요직을 주고 국정을 맡기기까지 하였다."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이는, 경문왕가의 후사를 이으려는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 버린 데에다, 듬직한 패트론으로 믿고 의지해 오던 위홍마저 죽은 데에 대해, 진성여왕이 자포자기했던 정황을 극명히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었을지?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