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축대를 전통적인 심미 공간으로 창조해낸 해인사 백련암

모산재 2010. 3. 5. 22:30

 

묘산 화양리의 낙락장송을 둘아본 다음 가야산 해인사를 향해 달린다. 같은 합천이라지만 전국에서도 가장 큰 군에 속하는 합천땅에서 해인사는 경북 성주와 맞닿아 있는 북쪽 끝이고 내 고향집은 산청과 접하고 있는 남쪽이니, 백리도 더 되는 해인사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대구와 해인사로 길이 갈라지는 분기를 지난다. 이곳의 작은 로터리는 '국민학교' 수학여행 시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어 반갑다. 해인사를 가려면 대구행 버스를 타고 와 이곳에서 버스를 바꿔타야 한다. 어머니도 차창밖을 내다보시며 지난 시절  해인사를 찾던 시절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버스 갈아타고 가는데 너거 큰어매가 다른 데 정신 팔다 버스 못 탔네. 그것고 모르고 가다보니 큰어매가 멀리 버스를 향해 손짓하면 쫓아 오고 있는데, 복치동 아재가 내려서 다음 차로 큰어매 모시고 안  왔더나.

 

 

점심때가 되어서 팔팔고속도로 나들목 앞에 있는 스님짜장면집에서 식사를 한다. 짜장이건 짬뽕이건 고기 종류를 전혀 쓰지 않는 집이라는데 특이해선지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집 안에는 텔레비전에 출연했던 장면을 녹화한 영상이 반복되며 돌아가고 있다. 기대했던 맛과는 거리가 멀고 값만 비싸니(5,000원) 실망스럽다는 반응이다.

 

 

 

 

 

 

홍류동 계곡을 지나 해인사 못 미쳐 동쪽 좁은 산길로 가파르게 오른다. 약수암, 국일암도 지나 백련암에 도착한다. 입구에서부터 걸어가자면 몹기 힘에 부칠 길인데, 막내 아우의 안내로 백련암 아래 작은 주차장까지 편하게 오른다.

 

 

이렇게 아름다운 절집이 있었던가.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백련암의 풍광에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상상할 수 있는 암자의 최대치! 가야산 암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았다니 전망이 꽤 시원스러우리라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저렇게 기암과 낙락장송이 어우러져 병풍을 이룬 아늑한 공간을 미처 상상하지는 못했다. 

 

평소 해인사 본절이 팔만대장경이라는 문화재가 있다는 것 외에는 그리 매력적인 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 오던 터여서 백련암을 처음 본 감동은 더욱 배가된다. 찾을 때마다 본절만 휭하니 둘러보고서 해인사를 아는 체했으니...

 

 

▼ 백련암 동편, 오르는 계단길은 옛길이다.

 

 

 

 

  

▼ 백련암 서편

 

 

 

 

  

 

모두 승용차에서 내려 백련암의 아름다움에 한마디씩 감탄을 하고 발길을 옮긴다. 그러나 어머니는 주차장옆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바위에 걸터 앉으시고는 다녀오라고 한다. 아홉이나 되는 자식을 낳고도 산후 조리를 못해 젊어서도 관절이 좋지 않으셨는데, 지금은 10m 정도 걷고도 쉬어야 할 정도로 불편해 하신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쉬는 모습을 돌아보며 혹은 동편 계단길 따라, 혹은 서편 비탈길 따라 경내로 들어선다. 나는 동편 계단길을 선택한다. 암자로 들어서는 작은 일주문은 푸른 하늘을 이고 섰고, 하늘에는 흰구름이 두둥실 떠간다. 하늘은 영원한 것이고 구름은 덧없는 것일까...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2층 건물은 고풍스런 모습을 지녔다. 정념당(正念堂)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정념(正念)은 바른 마음가짐이니 '사물 그대로의 본성과 상태를 마음에 두어 잊지 않음'을 뜻한다. 팔정도(八正道)중의 하나이다. 

 

정념당의 기둥에는 성철스님이 스물넷에 출가하며 지은 출가송이 새겨진  주련이 있다.

 

彌天大業紅爐雪(미천대업홍로설)   하늘에 미치는 대업들도 붉은 화로불에 눈송이요
跨海雄基赫日露(과해웅기혁일로)   바다를 덮는 큰 기틀도 빛나는 햇살에 이슬이세
誰人甘死片時夢(수인감사편시몽)   그 누가 잠깐 꿈에 달게 죽어가리
超然獨步萬古眞(초연독보만고진)   만고의 진리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정념당에서 물러나와 서편 전각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정말 아름답다. 높은 축대와 아담한 담장 사이로 이어지는 이 길을 걷는 기분! 세상 모든 것을 실용과 효율로만 생각하는 인간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 하물며 일급수나 다름없는 맑은 물이 흐르는 남한강을 '살린다'며 포크레인 들이대고 멀쩡한 생명들의 삶터를 파괴하는 개발 귀신들이야...

 

인공축대 위에 부처님 만나러 가는 자연 오솔길, 삭막한 축대를 담쟁이덩굴이 타오르고 대나무 푸른 숲이 살짝 살짝 가려주니 운치도 그만이다. 

 

 

 

 

 

 

길을 따라 서쪽에 다다르며 관음전 뒷편에 전각 적광전(寂光殿)이 나타난다. '적광'이라니 ... 처음 보는 절집 이름이라 의아해 하다가 문득 '아하' 하고 떠오르는 것이 '

대적광전'이다. 본절이라면 '대적광전'이었겠지만 부속암자에 들였으니 그냥 '적광전' 아니겠는가. 알고보니 적광전은 이 암자의 큰법당이다.

 

'적광(寂光)'이란 모든 번뇌가 소멸된 맑고 고요한 경지에서 빛나는 진리를 뜻하니,  언제나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불국토를 적광토(常寂光土)'라고 한다. 대적광전에는 청정한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시는데, 비로전 또는 화엄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이곳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시고 있다고 하니,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궁금해진다. 원래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보신불인 아미타불과 화신불인 석가모니불, 즉 삼신불을 봉안함하여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하는데, 비로자나불의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거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석가모니를 주존으로 모시는 적광전이라니... 

 

※ 연화장세계

이상적인 불국토를 가리킨다. 범망경에 따르면, 1,000개의 꽃잎을 가진 거대한 연꽃이 있어 그 하나하나의 꽃잎이 각기 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비로자나여래는 그 연꽃 위에 앉아 스스로 몸을 변화시켜서 1,000명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되어 각각의 꽃잎에 몸을 나타내고, 다시 그 1,000의 석가는 100억의 보살이 되어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화엄경과 범망경은 연화장세계를 설명하는 대표적 경전이다.

 

 

전각의 기둥에는 성철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黃河西流崑崙頂    황하수 서로 흘러 곤륜산 꼭대기에 닿았으니
日月無光大地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遽然一笑回首立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靑山依舊白雲中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잠겼네.

 

 

 

 

 

 

 

가파른 산언덕 위에 자리잡은 작은 전각 천태전이 보인다. 부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도를 깨달은 성자인 독성(獨聖),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신 곳이다. 그래서 작은 전각인 천태전은 보통 독성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독성은 연각(緣覺)이라고도 하는데 지위는 보살의 아래, 성문(聲聞)의 위이다. 남인도의 천태산에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한 이후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나한이다. 대체로 석장을 들고 있는 노구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백련암은 창건 연대가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절이라고 하는데, 서산대사의 문하였던 소암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역대 고승들이 머물렀던 곳인데, 우리 시대 큰스님이셨던 성철스님이 주석하시다가 1993년에 입적하신 곳이기도 하다. 큰스님만 머무는 곳은 아니어서 일제시대에는 김동리, 서정주 같은 문인들이 이곳에 머물며 불교사상에 심취하며 문학적 자양을 얻기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암자의 중심을 이룬 고심원으로 들어서는 서편 마당에는 염화당과 좌선실이 기역자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마당 끝 동쪽을 바라보는 건물이 염화당이고 남쪽을 바라보는 안쪽 건물이 좌선실인데, 좌선실은 성철스님이 주로 머물렀던 곳이다.

 

 

성철스님상을 따로 봉안하고 있는 고심원(古心院)은 큰법당처럼 백련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정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근래에 건립된 이층건물인데, 적갈색 단청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심원은 원래 성철스님이 소장하던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다는데, 당호도 성철스님이 생전에 지은 것이라 한다. 기둥 주련에는 1993년 스님이 입적하면서 남긴 열반송이 금색으로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넘친다.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   산 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수레바퀴 태양이 붉은 빛 토하며 푸른 산에 걸렸구나.

 

 

인터넷 각종 게시판에는 스님의 이 열반송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기독교인들의 글들이 수없이 올려져 있다. 하나님을 조폭 두목쯤으로 알고 기복 신앙에 빠져 예수 팔아먹기를 좋아하는 기독교인들은 성철스님이 "천추의 한을 안고 지옥으로 갔다." 느니 "임종 직전에서야 하느님을 보고는 자신의 삶을 회개하셨다."느니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으니, 참으로 가관이다. 

 

여기에 운명 전 스님이 남겼다는 "석가는 원래 큰 도적이요 /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 西天(서천)에 속이고 東土(동토)에 기만하였네 / 도적이여, 도적이여! //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녀를 속이고 /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라 는 시를 인용하며 "석가모니가 지옥에 있다고 증언한 성철" 어쩌구 하는 것에 이르면 종교의 진리가 역설에 있음을 조금도 이해 못하는 맹신도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불쌍할 뿐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는' 도적"의 의미가 다가올 것인데도 말이다.

 

 

전두환 시절, 스님이 종정으로 취임할 때 "내 말, 내 말에 속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데, 이는 당신의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나 그 언어가 가진 한계로 참뜻이 전달되지 못하니, 그 언어에 속지 말라는 의미를 말하고자 함이다. 평소 '불기자심(不欺自心)', 곧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 것을 강조했던 스님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리라. 진리는 스스로 깨닫는 것임을, '불립문자(불립문자)'를 강조하셨던 스님의 가르침은 열반송 주련 서편에 "如何是敎外別傳 三更月到鐵門關"이라는 또 다른 주련의 구절로 이어져 있다. 일부 기독교 광신도들은 언어 표현에 붙들려 참뜻을 알지 못하니, 이는 "달을 가리키니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격'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생전 성철스님은 "내 집은 단청하지 않는다."고 했다더니 과연 백련암 전각들에는 단청이 거의 보이지 않는 편이다. 다만 고심원은 전각 외부에 장엄한 느낌을 자아내는 단색인 적갈색 단청을 하였고, 이와 대조적으로 성철스님상을 모신 전각 내부는 화려한 단청을 굳이 배제하지 않았다.

 

 

 

전각 안에는 육환장을 짚고 있는 성철스님상을 모셨는데, 육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스님상을 모신 법당이 퍽 낯설게 느껴진다. 해인사에 희랑대사의 육신 목조상(보물 999호)이 모셔져 있다고도 하지만, 우리 나라 절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로 부처님과 다름없는 존숭을 받는 스님의 법력을 느끼게 한다. 태국 치앙마이의 왓 치앙만에서 본 육신대의 스님상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닫집은 화려한 다포 형식의 3층 팔작지붕으로 청정한 연꽃과 용, 극락세계를 날아다는 듯한 봉황들을 표현해 놓았다.

 

 

 

 

 

 

고심원 아래 원통전 앞마당에는 부처님의 얼굴을 닮았다는 자연석 바위가 서 있다. '불면석(佛面石)'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예전에는 법당과 마주보고 있었다고 한다.

 

 

 

 

 

 

고심원 앞을 지나 서쪽으로 돌아서면 높은 축대 위에 작은 전각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자당(影子堂)이라는 이 건물은 원래 조사 진영(祖師眞影)을 봉안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토굴로 사용하고 있다 한다.

 

 

 

 

 

▼ 암자의 뒷편 동쪽 언덕에서 바라본 백련암 전경

왼쪽 앞 원통전 지붕, 가운데 멀리 적광전, 오른쪽 멀리 천태전, 오른쪽 앞쪽 염화당과 좌선실, 오른쪽 끝 고심원 마당

 

 

 

 

 

▼ 고심원

 

 

 

  

▼ 적광전

 

 

 

 

▼ 일주문 뒤로 보이는 기암과 노송이 어우러진 풍경

 

 

 

 

 

 

 

다시 돌아서 나오는 길, 백련암이 주는 감동은 결코 빼어난 자연풍광 덕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높은 축대 위 세 겹으로 둘러진 담장의 아름다움...

 

골똘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사찰을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가장 자연에 가까운 공간으로 이해하고 창조하려한 태도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다. 백련암은 무엇보다도 산허리 경사면을 활용한 지혜가 더욱 돋보이는 암자이다.

 

 

급비탈을 이룬 곳에 터를 잡아 전각을 세우려니 축대의 모양이 쉽지 않다. 하나의 축대를 만들자면 높이가 너무 높아 절 뒤편의 아담한 배경과 부조화를 이룬다. 결국은 축대를 계단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겠는데, 이렇게 해서 늘어서는 축대의 모습은 살풍경하다. 게다가 전각이 들어서는 맨 위의 축대를 받쳐주는 앞의 보조 축대로 확보되는 땅은 좁아서 전각을 짓기에는 부족한 공간이 된다.

 

오늘날 많은 절에서는 이런 밋밋한 공간을 화단으로 쓰고 있는데, 백련암는 이를 오히려 전통적인 심미감을 주는 공간으로 창조해 놓았다.

  

 

 

 

 

 

축대 위에는 돌담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얹은 담장(이를 화방벽이라고 한다.)이 축대 위의 공간을 전통의 미감으로 가득한 은밀하고도 신비로운 공간으로 바꾼다. 비탈에 쌓아올린 축대인지라 앞쪽의 축대와 뒤쪽의 축대 사이 공간은 좁으니, 맨 앞쪽의 공간은 일부는 텃밭으로 쓰고 일부는 대나무를 심어 자연의 운치를  더한다. 그 위쪽 축대의 좁은 공간은 고샅길로 삼았으니 높은 축대와 낮은 담장을 끼고 대나무 숲길을 걷는 보살들은 절로 선세계로 들어선 감흥에 젖게 되는 것이다.

 

 

 

 

 

 

백련암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내려올 때까지 어머니는 보살이 되어 우두커니 바위 위에 앉아 계신다. 엊저녁 자식들 노는 것 지켜보느라 잠까지 설쳤으니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실 것이다.

 

 

다시 차를 타고 우리는 해인사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절집이자 조망이 좋다는 원당암으로 이동한다.

 

 

 

 

※ 해인사 경내 사찰 암자 안내 지도(다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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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1912~1993)에 대하여

 

1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다. 25세 때인 1936년 3월 해인사에서 승려 하동산(河東山)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하동산은 한국 불교의 계단(戒壇)을 통일시킨 승려로서, 그의 제자들이 소위 범어문중을 형성했는데 성철도 여기에 속했다.

 

1947년 경상북도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답게 살자"고 청담·자운·월산·혜암·성수·법전 등과 결사를 하는 등 현대의 선풍(禪風)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55년 비구와 대처의 분규가 일어났을 때 해인사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어 그해 동안거(冬安居)에서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問)을 했으며,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1981년에는 한국 선불교의 주요특징으로 지적되었던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한〈선문정로 禪門正路〉를 펴내 불교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83년 문공부 등록 종단 대표, 1986년 아시아 종교평화회의 고문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불교의 법맥(法脈)〉(1976)·〈본지풍광 本地風光〉(1982)·〈돈오입도요문강설 頓悟入道要門講說〉(1986) 등이 있다.

 

속세와 관계를 끊고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하는 승려로 알려졌으며 파계사(把溪寺)에서 행한 장좌불와(長坐不臥) 8년은 유명하다. 종단(宗團)의 분규가 아물지 않은 가운데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여전히 합천 해인사 백련암(白蓮庵)에서 구도를 계속하였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2

 

내가 성철스님을 처음 뵌 것은 지금으로부터 사십칠 년 전, 송광사에서 한철을 나며 여름을 지낼 때였다. 스님이 나타나자 뒤에서 수군수군했다.  “만물박사여서 세상 천지 모르는 것이 없다지? 글이 우리나라 제일이래.” “철수좌, 철수좌”하며 스님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마도 스님의 박학다식함은 물론 십 년 장좌불와의 수행을 부러움 반, 외경심 반으로 바라보았던 것같다. 그 때 스님의 나이 서른다섯으로 칼날 같은 정진으로 일관하던 시절이었다. 스님이 생식 중이란 얘길 듣고 노장 영월스님이 단호히 말했다. “생식중인 사람은 대중과 조화를 이룰 수 없어 방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벌떡 일어나 절을 한번 하곤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스님의 모습은 당당했고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어 보였다.

 

국사전 노전에서 며칠 머물던 스님께 상추를 씻어다 드렸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새로운데, 이제 스님은 안 안계시고 그 당시 열여덟이었던 내가 스님의 살아오신 길을 더듬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

 

스님은 1912년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상언, 모친은 강상봉이셨고, 스님의 속명은 영주(英柱)였다. 스님이 태어나신 임자년은 전세계적으로 큰 인물이 나는 해였고, 탄생지 또한 지리산과 덕유산의 정기를 받아 백의정승 셋이 나오리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던 곳이다. 그러고 보면 스님의 탄생은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전에 스님의 머리를 여러 번 깎아드렸는데 스님은 예의 그 걸쭉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머리통이 이상하게 생겼제? 청담스님은 머리가 미끈하게 생겨 마음이 좋은데, 나는 머리가 이리 울툭불툭해 성질이 괴팍한가봐.”

 

선종의 제2조인 혜가스님이 달마스님을 찾아가기 전, 머리가 뻐개질 듯 아픈지 사흘만에 머리 가운데가 위로 솟고 사방이 다시 솟아나 도골을 이루었듯, 성철스님의 머리 모양 또한 그렇게 오봉이 수출했다. 안광은 또한 어떠했던가.

 

부리부리 큰 눈에 찌를 듯이 내 쏘는눈빛. 그 눈의 섬광이 남다른 만큼 기지 또한 뛰어났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플래시’였다. 세상에선 무슨 보통학교와 사범학교를 나왔느니 하지만 생전에 스님께 그런 얘기를 들을 적은 없고, 어린 시절에 대한 이런 말씀은 하셨다. 세 살 때, 어른들이 읽으려고 갖다 놓은 책을 넘겨보니 다 알겠더란다. 다섯 살 때에는 어른들을 따라 백일장에 갔다가 장원을 해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보따리에 서유기, 삼국지연의 등 중국의 4대기서를 싸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산모퉁이 양지바른 곳에 앉자 해지는 것도 모른 채 삼국지연의를 읽은 적도 있다. 물론 순 한문으로 된 원전이었다. 누구에게도 배운 바 없이 시와 문장을 지어냈고, 열 살이 되기 전 사서삼경 등 모든 경서를 독파해 더 가르칠 선생이 없을 정도였다. 청소년기에는 그간 읽은 책으론 갈증을 느껴 서울 총독부 도서관으로 갔다 읽을만 하니 보고 싶은 책이 떨어져 다시 일본으로 가 중앙도서관과 동경대학 도서관에서 몇 달씩 책에 파묻혀 있기도 했다.

 

스님만큼 널리 많은 책을 읽은 분은 드물 듯한데, 청담스님이 훗날 이를 알고 속가의 김병연 씨를 소개했다. 천석군으로 수백 마지기의 땅을 팔아 불교서적만을 사들였던 김병연 씨는 죽기 전 자신이 사 모은 책들을 읽고 이해할 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가 성철스님을 만나 보곤 아낌없이 책을 주었던 것이다. 평소 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책이 그것이다.

 

그뒤 봉암사로 그 책들을 옮겨 모두 섭렵하셨는데, 그 책들을 보고 계신 것을 본 적이 있다. 책을 잡고 넘기는 것이 마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았는데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 분의 천재성을 알 수 있겠다. 스님의 공부는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닌 독학으로 이루어졌는데 언젠가 스님 곁에 가니 상좌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다. “이게 그런 말 아니가? 공부 좀 한다고 하더니...” 타임지에 밑줄을 그어 놓고 해석을 해 보라고 했더니 상좌가 우물댔던 모양이다.

 

스스로 익혀 티벳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독일어, 일어 등을 마스터한 것을 보면 타고난 총명과 기억력은 물론 헤아리기 어려운 의지력의 결과로 생각된다. 진리에 대한 구도심에서 모든 신학문을 섭렵하여 국내외의 도서관을 전전하였으나, 모두 진영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을 자각하고 일본에서 돌아와 ‘장자’의 소요유편을 읽으며 지내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노승이 지나가다 영가대사의 <증도가> 한 권을 주었다. 이것을 받아 읽은 스님은 심안이 밝아짐을 느꼈다.“시원한 것이 여기 있구나.”

 

읽기를 몇 차례, 금세 외워 버렸다. 바로 증득하고자 양식을 짊어지고 덕산 대원사로 갔다. 탑전에 머물며 사십여 일을 한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 사람이 가고 오는 것도 모른 채 밤낮으로 앉자 있자 대원사의 사판승들이 이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십이 일 만에 마음이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았제. 그래중 될 마음 가졌어.”

 

스물네 살에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해인사로 떠나면서 출가시를 읊었다.

 

彌天大業은 紅爐雪이요
跨海雄基도 赫日露다
誰人이 甘死片時夢가
超然獨步 萬古眞이로다

하늘에 미치는 대업들도 붉은 화로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에 걸치는 큰 기틀도 반짝이는 낮이슬일뿐
그 누가 잠깐 꿈꾸다 달게 죽으리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걸어가노라.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1935년 3월, 최범술 스님을 따라 해인사로 갔는데, 최범술 스님은 스님을 자신의 은사 스님이 임환경 스님의 상좌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면서 책도 좀 더 보고 일본에 유학할 것을 권했다. 이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우리 집도 살만해 책은 사 볼 만하기도 하고, 그 동안 책은 볼 만큼 보았으니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출가한 것은 책의 내용을 바로 실현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곤 백련암으로 올라가니 하동산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다. 귀인처럼 잘 생긴 풍모의 동산스님과 뜻이 통해 상좌가 되어 해인사에서 수계, 득도했다. 이로부터 십여 년 동안 동화사, 금상산 마하연사 등 제방 선원에 안거하면서 생식, 오후 불식, 그리고 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장좌불와를 감행했다. 더불어 지혜가 섬삭(閃爍)하고 선기(禪機)가 활발발(活潑發)하여 임제의 선풍을 잇는 걸출한 선승이기에 손색이 없었다.

 

스물아홉에 동화사 금당선원의 하안거중에는 바로 코 앞에 있는 대웅전엘 가보지 않을 만큼 고행 정진하던 중 확연히 칠통을 타파하시고 오도송을 읊었다.

 

黃河西流崑崙頂이여
日月이 無光大地沈이로다
遽然一笑回苜立하니
靑山은 依舊白雲中이라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청산은 예로되 흰구름 속에 섰네.

 

이때부터 제방 선원에서는 기봉이첨예, 다문박식으로 스님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 즈음 동산스님의 법문을 듣곤 잘못 된 곳을 지적하여 동산스님을 난처하게 하여 눈흘김을 받기도 했는데, 동산스님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했다는 것이다. “아, 그 놈이 글쎄 사사건건 나를 물로 늘어져.” “후회하고 있는 눈치던데요. 스님이 그만 이해하시지요.”

 

물론 곁에 있던 사람이 동산스님의 마음을 돌리려고 한 말이었다. “어른 말 끝에 물고 늘어져 그렇지. 그 놈이 나보다 나아. 버릇은 없지만 말은 옳거든.” 허허 웃으면서 동산스님은 마음을 풀곤 했는데, 늘 그만한 인물이 없다 하여 성철스님을 무척 아끼곤 했다는 것이다. 훗날 사변 중에 동산스님이 병원에 입원하고 계셔서 찾아뵈었더니,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며 스님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출가자는 누구에게도 절하지 말라

 

1947년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에서 가졌던 ‘봉암사결사’는 한국불교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초 작업이었다. ‘부처님 법답게 살자’라는 가치를 걸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설정하여 소리없이 개혁 작업을 시작했다. 이에 동참한 청담, 우봉, 보문, 향곡, 일도, 자운, 월산, 혜암, 성수, 도우, 법전스님 등이 대덕들은 동량이 되었고, 스님은 그 견인차였다.

 

해방은 되었으나 조선조 오백 년 동안 탄압 받고 거기다가 일제강점 삼십육 년 동안 왜색불교로 왜곡되어 버려 불교의 제 모습을 찾는 일이 시급하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이 때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를 기본으로 삼고 자신은 물론 대중스님에게 하루에 나무 석 짐씩을 하게 하기도 했다.

 

이 시절의 일화가 많다.‘범망계 보살계’가 있던 어느 날, 범사인 자운스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설하고 있었다.“출가한 사람은 국왕, 부모에게 절하지 않는 법이며 귀신을 공경하지 않는 법이다. 출가한 사람은 일체 사람의 공경을 받아야 할 존재이니라. 만일 이러한 법을 어기는 자는 경구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때 문을 열어 젖히며 성철스님이 들어왔다. “법사 스님, 지금 읽으신 부분을 한번만 더 읽어 주시길 원합니다.” 대중들의 눈길이 성철스님에게 모아지는 가운데 영문을 모른 자운스님은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대중들은 들으셨습니까? 출가자는 부모, 처자권속은 물론 재물을 다 버렸습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버리고 외로운 그 맛으로 중노릇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 속인에게 절을 해야 합니까? 불법을 읽고 배우기만 하면 무엇합니까? 오늘 당장 실천합시다. 이의있소?” 당장 스님들은 탁자 앞에 나란히 앉고 그 앞에 죽 늘어선 신도들은 절을 세 번했다.

 

한국불교에서 신도가 스님에게 절을 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신도가 절에 오면 좇아나가 누님, 어머님하며 지내던 시절, 교단정화의 기초가 다져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일제 때 입던 붉은 비단가사를 불태우고 광목가사를 입기 시작한 것도 성철스님이 벌인 개혁 가운데에 하나였다. ‘정화의 성공이 가사를 입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가사의 개혁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스님의 봉암사 시절은 청담, 자운, 향곡스님 들과 깊은 교우관계가 맺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자운스님이 ‘법망경’법사가 되기 전이었다. “법망경 토 좀 달아줘.”자운스님이 나이로도 한 살 아래요. 조카 상좌뻘 되는 성철스님에게 ‘법망경’을 툭 던지며 한 말이었다. “뭣이 어째. 토를 달아줘? 엎드려 삼배를 하고 부탁해도 달아 줄까 말까 한데. 이게 어디서 배워먹은 행동이야.”

 

스님이 고분고분했을 리 없다. 그 큰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부아가 치밀어오른 자운스님은 말없이 책을 들고 나와 그야말로 공부를 ‘되게’했다. 스님의 뛰어난 기지가 자운스님을 법망경 법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사’에 밝았던 자운스님은 성철스님을 일러 ‘법을 알고 다문박식한 천재형인 이런 인물 죽고 나면 다시 없다’하시곤 늘 뒤에서 스님을 쓸어 덮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했다. 스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했던 청담스님과 함께 스님을 진정으로 아끼고 도와 주었던 도반이었던 것이다.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정을 여덟 번이나 뜯어 고칠 만큼 깔끔하고 치밀한 향곡스님은 스님과 가장 각별한 도반이었다.

 

울산의 어느 부실한 선방에 있던 향곡스님을 스님이 찾아 나섰다. 선뜻 향곡스님이 따라 나서지 않자 멱살을 잡았다.“향곡이 니, 저 건너 보살절의 예쁜처자 때문에 여기 살라카나?”오직 화두 한 생각을 몰라 애를 쓰고 있던 향곡스님과 한바탕 주먹다짐을 벌어진 뒤에야 함께 봉암사로 왔는데, 그뒤 향곡스님은 그 곳에서 견성했다고 한다. 그렇게 다져진 인연 때문이지, 뒷날 향곡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평소 스님들의 열반 소식에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던 스님도 ‘네가 나보다 먼저 갔구나’하며 큰 한숨을 여러 번 쉬었다고 한다.

 

 

밥값 내라, 이 도둑놈들아

 

육이오 동란으로 봉암사결사를 마무리 하지 못하고 경남 안정 천제굴 등지에서 안거를 끝낸 스님은 19556년 교단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마다하고 팔공산 파계사에 은거했다.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위에 철책을 두르고 십 년 동안 독거하며 묵언정진했던 성전암 시절을 스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토굴에 들어앉자 책보고 참선하고 시도 짓고 그랬제.”

 

그 뒤 해인사로 돌아와 백련암에 주석하면서, 1967년 총림방장에 추대되었고 백일법문을 열어 인간천상의 무량중생을 화도하기 시작했다. 출가, 제방편력, 오도, 대중결사, 독거수행 등의 전형적인 수행납자의 길을 걸어오신 스님은 마침내 해인총림에 신통묘용한 교화의 방편을 펴게 된 것이다.

 

스님이 해인총림방장으로 계시면서 해인사의 수행가풍이 확립되었다. 해인사의 용맹정진중 스님의 몽둥이 세례를 기억하는 납자가 많으리라. 일 년에 두 번 하안거와 동안거중에 실시하는 용맹정진은 칠일 주야를 눕지 않고 자지 않는 목숨을 건 정진이다. 그런데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졸고 있거나, 다른 방에 잠깐 피해 드러누워 있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스님의 방망이가 날아왔던 것이다. “일라라, 이 돼지새끼들아” 혹은 “밥값 내놔라. 이 도적놈들아” 이런 육두문자와 섞여. ‘잠 많이 자지 말라. 말 많이 하지 말라. 간식하지 말라. 책 보지 말라.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 스님은 참선수행자가 지켜야 할 수칙으로 이 다섯가지를 강조하면서 후학들에게 죽비를 내리쳤던 것이다.

 

스님을 친견하려면 절을 삼천배씩 해야 한다는 저 유명한 일화도 해인총림에 주석하시면서 가풍으로 확립된 수행이다. 여름에는 소낙비에 맞은 것처럼 땀을 흘리고, 겨울철에는 온통 땀으로 젖는 삼천배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우는 겸손과 불법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날로 해이해져 가는 선원의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백장청규에 바탕을 둔 새로운 수행의 가풍으로 총림청규를 만들어 제방 납자를 제접했고, 한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선문정로禪門正路를 저술하여 갖가지 이설이 난무하는 선종의 난맥상을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수행법을 제시하여 최상승의 선법을 펴보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67년 하안거 기간 동안 날마다 두세시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행한 법문인 백일법문은 너무도 유명하다. 백일법문은 불교의 핵심을 중도사상中道思想에 두고 원시불교에서 시작하여 중관, 유식사상, 중국의 제종파의 불교사상과 우리나라의 선종사상까지 관통하여 정리한 기념비적 법문이다. 이로써 1600년의 장구한 역사만 끌어안은 채 스러져 가는 한국불교를 새롭고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1976년에는 「한국불교의 법맥」을 출간해 법통을 바로 세웠고, 두 차례나 종정에 추대되는 등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에 겸전했음에도 종단행정이나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평소‘만 가지를 도에 두고,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띄고 가슴에는 태양을 안고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전연前緣을 믿고 사는 것이 수도인의 자세’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스님은 자신과 뜻이 통하는 이와는 몇 날 며칠을 밤을 샐 만큼 얘기를 잘했다. 언젠가는 아침 공양을 들고 양치질을 하러 나왔다가 청담스님을 만났다. 칫솔을 든 채로 서서 점심 마지종을 칠때까지 한국불교개혁에서부터 수행, 대장경 번역, 포교 등 불교의 전반적인 얘길했다. 점심 공양을 하고 나와 저녁가지 얘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렇듯 얘기하기를 즐겨했으나 칠십이 넘으면서부터 사람 만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건강 문제도 있었지만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만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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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랑대사 진영 목조상(보물 999호 => 국보 333호 변경, 2020년)

해인사 조사였던 고려시대 희랑대사의 진영상(眞影像)으로 경상남도 합천의 해인사에 모셔져 있다.

고려 건국 당시 해인사 승려들은 견훤을 지지하는 남악파(南岳派)와 왕건을 지지하는 북악파(北岳派)로 나뉘어 있었는데 희랑은 북악파의 종주(宗主)였다. 이 상은 화엄종 북악파의 진면목을 적절하게 묘사하여 화엄종의 진리를 무언(無言)의 형상을 통해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는 우리나라 초상의 최고 걸작이다.

몇 토막의 나무에 조각하여 이은 이 상은 체구에 비해 머리가 다소 큰 편이다. 얼굴은 길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파였으며, 자비로운 눈매, 우뚝 선 콧날, 잔잔한 입가의 미소는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여윈 몸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과 녹색 점이 있는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그 밑에 금색이 드러나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 모습에는 금빛이 찬연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생략할 곳은 과감히 생략하고 강조할 곳은 대담하게 강조하여 노스님의 범상하지 않은 위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나무를 쪼고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목조에서 풍기는 인간적인 따뜻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초인 930년경 이전으로 추정되며, 진영 조각의 진수이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