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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와 문화재

계축옥사의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합천 화양리 소나무

by 모산재 2010. 3. 4.

 

봄방학이 끝나는 주말 대보름날, 어머니 생신을 열이틀 앞당겨서 온 가족들이 모였다. 귀한 만남에 뜻을 모아 해인사를 돌아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해인사를 못 본 사람도 있고 백련암과 원당암 등 암자를 제대로 구경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해인사로 가는 도중 막내아우의 제안으로 묘산 어느 마을에 있다는 멋진 소나무를 둘러보기로 한다. 정이품송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대단한 소나무가 있다는 거다.

 

 

대병, 용주, 합천, 묘산을 거쳐 화양리로 찾아가는 길은 꽤 멀다. 해발 500m의 산간 오지 화양리 나곡마을을 오르는 좁은 길은 산청 정취암이나 운길산 수종사 오르는 길을 연상시킬 만큼 급하게 비탈진 산허리를 타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네 대의 승용차가 하늘을 향해 헐떡거리며 올라선 막다른 길 끝에 작은 마을 나곡마을이 나타난다. 그리고 길 아래로 계단을 이룬 논 가운데 그야말로 당당한 풍채의 낙락장송이 우뚝 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차에서 내리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탄성을 터뜨린다.

  

나이는 400살 정도라 추정된다고 하며(문화재청은 500살 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무 둘레는 6m에 이를 정도로 우람하다. 나무 줄기는 꿈틀거리며 여럿으로 갈래지고 다시 아래로 처지듯 날렵하게 벌어졌다. 동생의 말대로 수형은 정이품송이 그리 부럽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미관을 자랑한다. 마을 사람들이 당산목으로 오랫동안 보호해 오던 것이, 1982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단순히 오지에 남은 멋진 소나무라고만 생각한 이 나무에 뜻밖에도 조선 중기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흔적이 남아 있어 관심을 끈다. 이 마을에 살아온 연안김씨의 후손들에 따르면, 김제남이 딸인 인목대비의 소생이자 자신의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되었을 때 그의 6촌 동생 되는 사람이 이 마을로 도망쳐 와 이 소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5년째인 1613년,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들이 제거되고 강화도로 위리안치된 어린 영창대군이 죽음을 당하게 되는 이른바 '계축옥사'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삼족을 멸하는 섬뜩한 칼바람을 피해 천리길을 달려 이 오지를 찾아들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김제남(1562~1613)은 조선 중기 각종 사화 속에서 권력을 좌우했던 연안김씨 가문의 문신으로 선조의 장인이 된 인물이다. 그는 조광조 등 사림파의 개혁정치를 좌절시킨 기묘사화를 주도하며 정권을 장악하고 영의정을 지낸 김전의 증손자이며, 중종의 장인으로 권력을 농단하고 정적이나 뜻에 맞지 않는 자를 축출하는 옥사를 여러 차례 일으키며 공포정치를 펼치다 사사된 김안로의 종손이기도 하다.

 

1601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의 딸이 선조의 계비(인목왕후)가 됨으로써 선조의 장인, 연흥 부원군이 된다. 인목왕후는 선조의 14명 아들 중 유일한 적출인 영창대군을 낳는다. 선조는 늦은 나이에 낳은 영창대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이미 세자이던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는데 급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다.

 

광해군 5년, 영창 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구실로 이이첨 등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는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이에 연루된 김제남은 서소문 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고 죽고 그의 아들 셋도 화를 입는다. 다만 부인과 어린 아들 천석만이 제주도로 유배되는 것으로 화를 면한다. 1614년 이른 봄, 강화도에 유배되었던 김제남의 외손자 영창대군은 아홉 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데,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을 몰아낸 계축옥사, 그리고 이후의 어린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각종 백과사전 등에서 기록되어 있는 정설로 보면 광해군과 그를 지지한 정치세력이 대단히 부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에 성공하여 조선 후기를 주름잡은 서인 세력들의 정치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형 임해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비했으며, 배다른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가마솥에 삶아 죽게 만들었다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는 이야기는 광해군과 그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대북파의 패악무도함을 각인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역사적 승자들의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 궁녀가 썼다고도 하고 인목대비가 썼다고도 추정하기도 하는 '계축일기'를 바탕으로 어린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한 민중들의 연민을 자극하는 각종 설화와 작품들이 확대재생산되며 사실처럼 굳어진 면이 있을 것이다.

 

 

임해군은 병사하였다는 것이 정설이고, 인목대비가 폐비되었다는 근거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병사했다> <굶어죽었다> <증살되었다> <양잿물을 먹여 죽었다> 등 네 가지 설이 전해오지만, 진실은 뒤의 둘보다는 앞의 둘에 가깝다는 주장이 많다. 한마디로 영창대군 살해설은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세력들이 집권하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나무 줄기는 마치 용틀임하는 흑룡을 보는 듯한데 나무 껍질이 거북 등처럼 갈라져 있다. 그래서 이 소나무를 '구룡목(龜龍木)'이라고도 부른단다.

 

 

 

 

 

 

 

▼ 나무 줄기 사이에는 작은 떨기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다.

 

 

 

 

▼ 덩굴식물의 덩굴처럼 감는 형태로 꿈틀대는 가지들 

 

 

 

 

 

 

▼ 소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카메라 세례를 받은 조카

 

 

 

 

 

 

화양리 소나무를 찾아 오르는 갈림길에는 '묵와고가(黙窩古家)'가 있는데 들러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