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폐사지 여행 (2) 청룡사지의 국보 보각국사 정혜원융탑, 탑비와 석등

모산재 2009. 12. 6. 23:21

 

충주에서 여주로 이어지는 남한강 주변엔 수없이 많은 옛 절터들이 널려있다. 중원 미륵사지를 시작으로 목계나루에서 멀지 않은 청룡사지, 그리고 원주 부론의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 여주 고달사지 등이 그것이다.

 

목계나루를 떠난 우리는 19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소태면 오량리로 향하는 길로 들어선다.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서자마자 나타나는 평범한 산골짜기, 여기에 무슨 절이 있을까 싶은데…. 청룡사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청룡사는 고려말 이곳 청계산 중턱에 자리잡은 암자에 보각국사(普覺國師, 1320∼1392)가 은거하자 태조(이성계)가 대사찰로 세우도록 했다고 전하지만 창건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삼국유사를 쓴 보각국사 일연과는 다른 인물이다.)

 

고려 말의 승려인 보각국사는 경기도 사람으로 성은 조씨이며 법명은 혼수(混修)라고 한다. 12살에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이후 불교의 경전을 두루 연구하여 명성을 떨치었는데, 공민왕과 우왕의 국사가 되었지만 왕의 부름을 피하였고 특히 계율을 굳게 지키고 도를 지킴에 조심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한다. 조선이 건국되던 해(1392)에 73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태조는 '보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정혜원융’이라 내리어 탑을 세우도록 하였다.

 

지금은 절터는 축대만 흔적처럼 남긴 채 폐허가 되었는데, 다만 절터의 서쪽 산언덕 능선에 보각국사의 사리탑인 정혜원융탑과 탑비, 그리고 석등 등이 남아 전하고 있을 뿐이다.

 

 

 

 

■ 청룡사 위전비(靑龍寺位田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

 

 

주차장에서 보각국사 유물을 향해 오르는 산골짜기 오솔길, 제일 먼저 청룡사 위전비를 만난다. 귀부에 빗돌(높이가 140cm란다) 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렸는데 지붕돌의 오른쪽이 파손된 것이 눈에 띈다. 귀부의 거북 조각은 투박한 편이고 지붕돌도 단순한 형태이다.

 

 

 

 

 

숙종 18년(1692년)에 청룡사의 창건 및 경영 등에 관련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석으로 사원 경제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보각국사 사리탑을 향해 오르는 길

 

 

 

 

 

 

 

■ 청룡사 석종형 부도(충주시 문화재자료 제54호)와 부도 부재석

 

 

골짜기길을 벗어나 능선으로 올라서자마자 나타나는 두 점의 부도. 위쪽의 부도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로 가운데에 '적운당사리탑(寂雲堂舍利塔)'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그리고 아래쪽으로는 훼손되어 무너진 부도탑 하나가 자리잡고 있는데, 옥개석· 상대석· 하대석 등이 남아 있고 탑신이 사라졌다. 부재들이 모두 6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고 구름무늬등이 장식되어 있다. 옆에는 다시 사리공이 뚫어져 있는 방형의 돌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석종형 부도에서 능선을 따라 몇 십 미터만 오르면 나란히 서 있는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탑비, 석등이 나타난다.

 

 

↓ 보각국사 사리탑과 탑비 앞에 도착한 일행들. 전문 길라잡이 신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불타버린 청룡사가 남기고 있는 국보 1점(정혜원융탑)과 보물 2점(정혜원융탑비, 사자석등))의 귀중한 유물은 모두 보각국사의 묘탑과 관련된 것으로 사리탑(정혜원융탑) 앞에는 배례석을 사이에 둔 사자석등이, 사리탑 뒤에는 탑비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석등을 사리탑, 탑비와 나란히 세우는 것이 조선시대의 사리탑 배치방식이다.

 

 

 

 

 

 

■ 보각국사 정혜원융탑(普覺國師定慧圓融塔, 국보 제197호)

 

 

고려 말의 고승인 보각국사(1320-1392)의 사리를 모셔놓은 묘탑으로, 국사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의 명으로 탑을 짓게 하여 권근이 비문을 짓고 탑명을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다.

 

불행히도 사리구는 일제시대 때 도둑맞았고 부도도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편평한 대지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1단의 축대를 쌓고 중앙에 팔각원당형의 부도를 세웠다.

 

바로 곁의 탑비에 따르면 이 부도는 1994년(태조 3년)에 세워졌는데, 양식상 종 모양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양주 회암사의 부도 등과 더불어 8각의 평면을 이루는 형식으로 건립된 몇 안 되는 부도로, 조선 전기 석조 미술의 표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국보로서의 가치를 말해 주는듯 팔각의 몸돌을 배흘림으로 부풀게 표현하고, 각 면에는 신장상과 반룡이 휘감긴 부조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다. 탑신의 기둥과 지붕의 곡선, 추녀와 사래의 표현, 지붕 귀퉁이의 용머리 조각 등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조성되었는데, 자른듯 아무 장식이 없는 바닥돌 위에 아래·가운데·윗받침돌을 차례로 얹어 3단의 기단(基壇)을 마련하고 그 위로 몸돌과 지붕돌을 올려 탑을 완성하였다.

 

기단은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8각으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겨 마주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가운데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마다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으며, 그 사이마다 새겨진 기둥에는 위로 날아오르는 이무기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에서 높이 들려있는데 마치 목조건축의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살아난 듯하다.

 

 

↓ 지붕돌 아래 8면에는 신장상을 모서리에는 이무기를 새겼다.

 

 

 

 

 

 

↓ 기단의 가운데받침돌에는 사자상과 구름에 휩싸인 용의 모습을 교대로 새겼다. 폐사의 원인이 된 화재 흔적인 듯 그을음이 까맣게 남아 있다.

 

 

 

 

 

 

 

■ 정혜원융탑전 사자석등(定慧圓融塔前獅子石燈, 보물 제656호)

 

 

이 석등은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어 주기 위해 그의 사리탑 앞에 세워진 것으로, 3단의 받침 가운데 아래받침돌이 앞을 향해 엎드려 있는 사자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 때문에 사자석등이라 부른다.

 

석등의 사자 모양 하대석은 희귀한 예로서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지 쌍사자석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자석등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사자의 등에 얹어진 가운데받침은 기둥모양으로 4각의 낮은 돌을 두었다.

 

화사석은 4각으로, 네 모서리를 둥근기둥처럼 조각하였고, 앞뒤로 2개의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을 돌출되게 조각해 놓았으며,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네 모서리선이 두터워 고려시대의 지붕돌 양식을 잘 보여준다.

 

 

 

 

 

 

하대석(아래받침돌)이 한 마리 사자로 된 점이 특이하다.

 

통일신라 이래로 쌍사자가 서서 화사석을 받치던 형식이 고려시대의 고달사지쌍사자석등에서는 엎드린 쌍사자가 화사석을 받치는 모습으로,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에서는 웅크린 채 어정쩡하게 고개를 쳐든 모습으로, 그리고 이 외사자 석등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

 

 

 

 

 

 

 

보각국사정혜원융탑과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조형미가 부도와는 수법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바 조선 중기의 것으로 정혜원 융탑이 조성된 후에 세운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보물  제658호)

 

 

고려 공민왕과 공양왕 및 조선 태조의 국사로 있던 보각국사를 기리기 위한 비로 고려 우왕 9년에 국사가 되어 73세에 입적한 사실과 보각국사의 덕과 지혜를 기린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비석은 비 윗부분의 장식물인 덮개돌이 없는 대신에 비신 양 끝 부분의 모서리를 깍은 귀접이 양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대지국사비와 비슷한 양식으로 고려 말기 비석의 간소한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 태조 3년(1394) 문인선사 희달(希達)이 왕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이 비문을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는데, 비문은 비바람에 풍화되어 많이 손상되었다.

 

 

 

 

 

정혜원융탑을 돌아본 다음 우리는 숲을 헤치고 청룡사 터를 향한다. 신갈나무로 보이는 참나무들이 가득찬 숲, 내딛는 발은 두껍게 쌓인 낙엽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산골짜기 위로부터 더듬어내려가 찾은 절터, 들어서는 곳에 까마귀밥여름나무로 보이는 붉은 열매들이 한낮의 환한 햇살을 받아 탐스럽게 빛난다.

 

 

 

 

 

이웃한 폐사지들이 모두 발굴되고 있는데, 청룡사터는 온갖 잡초와 잡목이 우거진 묵정밭이 된 채로 버려진 모습이다. 웬만큼 예민하게 눈여겨 보지 않으면 이곳이 절터인지를 알아채기도 어렵지 싶다.

 

 

 

 

 

↓ 절터를 돌아보고 있는 일행들 모습

 

 

 

 

 

무턱대고 내려가다가 돌아서서 살펴보고서야 절터 흔적, 석축을 발견한다.

 

그러고 보니 절터 뒤에 울을 두르듯 느티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특히 건물 터 뒤에 양쪽으로 선  두 그루는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지 싶게 여러 아름드리 고목이다. 아마도 청룡사의 역사를 지켜 본 나무일 것이다.

 

 

 

 

 

 

이 넓은 절터가 어째서 폐허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대각국사정혜원융탑에서 본 화재 흔적과 상관 있는 듯, 여기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말기 판서를 지낸 민대룡(閔大龍)이란 사람이 소실의 무덤을 쓰기 위해 절의 스님을 사주하여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당시 청룡사 윗 자리에다 민씨들이 명당을 정해서 이장을 했는데 명당 근처에 절이 있으면 좋지 않다는 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사서 불을 지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청룡사 지붕 위에 살고 있던 큰 뱀이 내려와 불을 지른 사람의 앞을 가로 막으니 한 사람은 뛰어 나오다 놀라 넘어져 피를 토해 즉석에서 죽고 또 한 사람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서 불에 타 죽었다. 뿐만 아니라 절 위에 쓴 민씨 산소에 벌초하러 오는 사람까지도 오기만 하면 생명을 잃고 가므로 산소도 산 아래로 이장했다고 한다.

불이 난 후 뱀은 절 옆에 있는 못 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승려들은 뱀에게 고마운 뜻으로 밥을 먹을 적마다 꼭 뱀이 있는 못 속에다 음식을 넣어 주므로 사람만 오면 나와서 꼭 받아 먹었다 한다.

어느날 이 청룡 골짜기는 구름으로 덮히더니 그 구름이 차차 금가면 '두무소' 쪽으로 옮겨 갔는데 그 못 속에서 살던 뱀이 이무기가 되어 사람 눈을 피해 목계강으로 옮겨 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뱀이 옮겨 간 후 절의 명목만 겨우 유지하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뱀에 얽힌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설에 불과할 것이지만 방화로 인해 폐사가 되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고 하겠는가. 실제로 절터 뒤쪽 능선에 커다란 묵뫼가 발견되어 방화로 인한 폐사 전설이 사실임이 밝혀졌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절터 아래에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저 나무는 여름이 되면 어떤 잎을 달게 될까, 한참 궁금해 하다가 차에 오른다.

 

 

 

 

 

 

다시 차는 남한강 쪽으로 나가 19번 국도를 타고 원주를 향해 달린다. 거돈사와 법천사 절터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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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각국사 혼수(普覺國師 混修)

 

 

속성은 조씨(趙氏).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庵). 아버지는 숙령(叔岺)이다. 12세에 대선사 계송(繼松)에게 출가했으며, 내외의 전적을 널리 익혀 이름을 떨쳤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선시(禪試)에서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다. 금강산에서 2년 동안 마음 밝히는 공부를 하다가 노모를 위해 돌아와 경산(京山)에서 5~6년간 우거했으며,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대자법화경 大字法華經〉을 써서 명복을 빌었다. 그뒤 선원사(禪源寺)의 식영암(息影庵)에게 〈능엄경 楞嚴經〉을 배우고, 충주 청룡사(靑龍寺) 서북쪽의 연회암(宴晦庵)에서 지냈다. 공민왕이 회암사(檜巖寺)에 있게 했으나 가지 않고, 오대산 신성암(神聖庵)에 머물렀다. 그때 나옹(懶翁)이 고운암(孤雲庵)에 머무르고 있었으므로 찾아가 공부하고 뒤에 가사(袈裟)·불자(拂子)를 받았다. 1369년(공민왕 18) 백성군(白城郡)의 김황(金璜)이 원찰(願刹)로 세운 서운사(瑞雲寺)에서 참선 법회를 열었다. 1370년 공부선장(功夫選場)을 열어 나옹으로 하여금 시취하게 할 때 홀로 대답해 합격했으나, 공민왕이 요직에 두려 하자 도피해 위봉산(圍鳳山)에 숨었다. 1374년 다시 소명을 받고 내불당(內佛堂)에서 왕에게 법요(法要)를 가르쳤다. 우왕 즉위 후에는 송광사(松廣寺)·광암사(光巖寺) 등에 머물렀다. 1383년(우왕 9) 국사에 책봉되었으며 정편지웅존자(正遍智雄尊者)라는 호를 받았다. 1389년(공양왕 1) 치악산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국사로 봉해져 개천사(開天寺)로 옮겼다. 1392년(태조 1) 청룡사로 옮겨 그곳에서 입적했다. 저술로는 〈환암어록 幻庵語錄〉이 있다. 시호는 보각(普覺)이며, 탑호는 정혜원융(定慧圓融)이다. 비와 탑이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에 있다. <브티태니카백과>

 

 

본관은 풍양(豊壤). 속명은 조혼수(趙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 탑호는 정혜원륭(定慧圓融). 풍양조씨 전직공파 조지란(趙之蘭)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조숙령(趙叔鴒), 어머니는 청주경씨이다.
< br />보각국사는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 아버지 조숙령의 임지인 용주(현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청주경씨의 권유로 13세부터 대선사 계송(繼松) 밑에서 공부하여 1341년(충혜왕 복위2) 22세의 나이로 승과 선종선에 급제했다. 1348년(충목왕 4) 금강산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한 후 선원사의 식영감 화상에게서 능엄경을 배웠다.
< br />재상 조쌍중(趙雙重)이 지은 휴휴암에 초빙되어 3년간 능엄의 법요를 강연한 후 충주 청룡사 서쪽에 연회암을 짓고 머물렀다. 공민왕이 회암사 주지가 되어 주기를 요청했으나 사양하고 오대산 신성암에 머물면서 나옹(懶翁) 화상과 불도(佛道)를 논했다. 1361년(공민 10) 공민왕의 요청으로 궁궐에서 법회를 열었으나 도중에 도망친 후 명산과 사찰을 주유했다.
< br />1370년(공민 19) 공부선장(工夫選場)에서 단독으로 선발되었으나 궁궐에 머물게 하는 줄 알고 도망쳐 봉황산에 숨었다. 그 후 왕명에 의해 불호사 등을 거쳐 1374년 궁궐 내불당에서 불법을 설하였다. 우왕 초에 송광사, 서운사에 머물다가 충주 연회암으로 돌아왔다. 다시 우왕의 요청으로 광암사에 3년을 머물다가 도망하여 여러 사찰을 거친 후 연회암으로 돌아와 1378년부터 수년간 불경의 간행에 힘을 기울였다.
< br />1383년(우왕 9) 국사에 책봉되고 개천사 주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왜구가 충주에 침범하자 광암사로 옮겼다. 1388년(창왕 즉위년) 개천사로 돌아왔고, 1392년(공양 4) 7월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축하의 표문을 올리고 충주 청룡사로 옮긴 후 1392년(공양왕 4) 9월 18일 입적하였다. 왕의 부름에 쉽게 응하지 않은 것은 속세의 명리에 초연한 참된 구도자의 길을 걸었음을 말해 준다.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등 당대의 유학자들과도 교유했다.
< br />전해지는 저서 4편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1378년에 저술된 『선림보훈(禪林寶訓)』 2권 2책은 보물 제700호, 1378년에 저술된 『금강반야경소론찬요조현록』〈권 상·하〉 2책은 보물 제720호, 1379년에 저술된 『호법론(護法論)』은 보물 제702호, 1381년 저술된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은 보물 제6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디지털충주문화대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