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팔순 노모, 메밀묵을 만드시다

모산재 2010. 2. 26. 23:51

 

 

설 명절을 사흘 앞두고 늙으신 어머니 혼자 계시는 고향집으로 갑니다. 아버지 차례상에 올릴 제수 장도 봐야 하고, 사랑방 난방을 위해 땔감도 해야 하고, 산소 주변 찔레와 칡덩굴 얽힌 덤불도 쳐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며칠 전부터 내리던 비와 눈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자고 일어난 아침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러 삼십 리 길을 갑니다. 늙으신 몸에 오래 전부터 좋지 않은 무릎관절로 걸음이 불편한 노모는 장을 미리 두 번이나 봐서 어물은 마련해 두었답니다. 막내동생은 과실을, 그 윗동생은 떡을 해오기로 했으니 오늘은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등 육류만 사면 된답니다.

 

육류 외에도 사야 할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젊은 내가 들고 다니기에도 버거운데 당신 혼자서 어떻게 그 무거운 제수들을 챙길 수 있었을까, 참으로 미리 오길 잘 한 것 같습니다.

 

 

 

↓ 폐교된 지 16년 된 동네 초등학교도 마을도 온통 눈에 덮였다. 한때 수백 명이 다니던 학교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장을 보고 돌아오자 서둘러 점심을 먹고 어머니는 메밀묵 만드는 일을 시작합니다. 몇 년 간 하지 않았던 메밀묵 만드는 일을 왜 하려는지... 묵은 메밀이 서 되나 있는데 더 묵혀 둘 수도 없고 자식 손주들 먹을거리 하나라도 안기고 싶어 힘에 부친 일을 결심한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물가에 이미 빻아 놓은 메밀이 커다란 '다라이' 속에 잠겨 있습니다. 엊그제 시오 리 떨어진 면소재지 방앗간에 가서 빻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참에 그 동안 무심히 보고 넘겼던, 메밀묵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물에 담가 둔 빻은 메밀을 한 웅큼씩 쥐고서 물기가 없을 때까지 꾹꾹 짜야 합니다. 흘러나온 전분액은 면포로 걸러져 동이에 담깁니다. 이렇게 꾹꾹 짜는 일이 보통 힘에 부친 일이 아닙니다. 눈발이 빗기치는 차가운 날씨에 손을 적시며 해야 하니 손도 좀 시린 일이 아니지요.

 

 

그렇게 고된 작업 끝에 아래와 같이 버려도 되는 메밀 껍질들만 남았습니다. 예전 같으면 집에서 기르는 돼지들에게 모처럼 진수성찬이 되는 '찌끄레기'이지만 이제는 거름으로나 써야 되겠네요.

 

 

 

 

 

 

 

집 동쪽에 걸어둔 가마솥에 걸러둔 메밀 전분액을 붓고 끓이기 시작합니다. 준비해 둔 마른 깻단으로 불을 때는 일은 내 몫이고 전분액이 눌어붙지 않도록 나무주걱을 젓는 일은 어머니 몫입니다.

 

불은 고르게 타야 하고 젓는 일은 잠시도 멈추면 안 됩니다. 어떻게 만드는지 진작에 알았다면 몇 배나 힘든, 주걱으로 젓는 일을 내가 했을 것입니다.

 

 

 

 

 

 

 

 

습하고 뜨거운 김은 훅훅 올라오고, 불을 때면서 점차로 점성은 높아지고, 밑에서부터 눌어 붙게 되기 때문에 나무주걱을 바닥에 꼭 닿게 수직으로 세우고 긁듯이 고루고루 휘휘 저어야 하는 일은 보통 고된 일이 아닙니다.

 

 

가마솥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어서 두 되 정도가 적당하다는데 서 되를 하였으니 솥이 잘름잘름할 정도로 양이 많아서 젓는 일이 더욱 벅찹니다.

 

 

 

 

 

 

빙글빙글 돌리듯 젓는 것이 기본입니다.

 

 

 

 

 

 

 

표면 전체에서 올라오는 용암이 끓어오르듯 거품이 생기면 거의 완성되어감을 뜻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성이 강해지는데 주걱을 들어서 주르르 흐르는 전분의 점성 정도를 확인합니다. 아직도 주르르 흐르니 좀더 끓이며 저어야 합니다.

 

 

 

 

 

 

 

 

주걱을 꽂아서 수직으로 서면 알맞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불을 때고서 이렇게 되기까지는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이제 '다라이'에 퍼서 부으면 됩니다. 열을 식히며 응고되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응고된 묵을 두부모처럼 예쁘게 잘라 차가운 물에 담가 놓으면 더욱 촉촉하고 탱글탱글한 묵모가 됩니다.

 

 

 

 

 

 

 

까치설날이라고도 하는 섣달 그믐날 밤, 20여 명이나 되는 가족들이 모여 놀다 어머니표 묵 한 그릇씩을 맛있게 비웠고 설날에 찾은 일가친척에게도 떡국 대신 묵그릇을 올린 상이 나갔습니다. 

 

예전 어머니가 만드는 묵은 적어도 우리 일가친척들이 명절을 기다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정도였습니다. 명절날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멸치로 국물맛을 내고 김치를 송송 썰어 넣어서 차린 묵그릇부터 찾았으니까요.

 

 

내년이면 팔순이 되는 어머니, 이제 또 다시 어머니가 만드는 묵을 먹게 될 날이 있을까요.

 

 

 


* 다라이 : 일본말이다. 우리말로는 '함지' 또는 '큰 대야'로 풀이하지만 어감이 좀 다르다. 함지는 네모꼴로 된 나무 그릇이고, 대야는 몸을 씻는 데 사용하는 그릇이다. '둥근함지'라는 합성어로 쓰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