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여말선초 귀접이 양식의 빗돌, 억정사 대지국사비(보물 제16호)

모산재 2009. 12. 6. 23:01

 

충주에서 19번도로 따라가다 엄정 방향으로 들어서 가다보면 산자락을 따라 자리잡은 '비석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뒤 과수원 언덕 위에 있는 억정사(億政寺) 대지국사비 덕택에 '비석마을'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곳에서 농로를 따라 길 끝까지 오르면 경종대왕태실비와 백운암 철불좌상이 나온다.

 

언덕 위에 빗돌만 뎅그러니 서 있던 곳에는 단청 깨끗한 비각이 씌워졌다. 주변은 사과나무와 배나무들이 가득 들어선 과수원인데 이곳에 무슨 절이 있었을까 싶다. 그러나 억정사는 대규모 사지로 알려지고 있으며 인근 백운암(1886년 무당의 신분으로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받아 여자 대감이 된 윤씨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로 전해진다.)의 철조여래좌상(보물 제1527호)이 이곳 억정사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이미 폐사된 곳임에도 비석 이름이 어째서 '억정사지'가 아니라 '억정사'라고 되어 있는지.

 

밭고랑엔 제대로 익지 못한 과일들이 나뒹굴고 있다.

 

 

 

 

 

 

 

꼼꼼이 들여다 보니, 비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장식이 없는 직사각형의 돌이고 그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이 올려진 단순한 형태이다. 비각이 만든 컴컴한 그늘에 흐릿하게 보이는 비의 윗부분은 덮개돌이 없고 윗쪽의 양 끝을 사선으로 잘라내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이런 양식을 귀접이 양식이라고 하던가, 대지국사와 같은 시대를 살고 비슷한 시기에 입적한 보각국사의 사리탑비인 청룡사 정혜원융탑비가 그러한 것처럼….

 

 

 

 

 

 

대지국사(大智國師)는 출가하여 원증국사 보우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고려말 공민왕~공양왕 시기에 여러 임금의 왕사를 역임하며 왕실을 받들었던 승려이다. 고려가 망하기 직전 입적하였지만 '대지국사'라는 시호는 조선 태조로부터 받은 것이다.

 

 

 

 

비석의 첫인상은 어떤 점으로 보물로 지정되었을까 싶게 아무 꾸밈이 없는 단순한 모양이다. 화강석으로 보이는 높고 넓은 빗돌 네 면에 해서체로 새겨 놓은 글씨가 가지런하고 단정하다는 느낌이다.

 

 

 

고려의 고승 대지국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국사가 입적한 뒤 4년(1390~1393)에 걸쳐 만들어졌다니까 이 비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친 과도기적 양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예술사적 가치가 있겠는데, 그것이 바로 조형상 별다른 특색이 없는 간략한 형식인 모양이다.

 

 

 

 

 

 

비석의 높이는 290cm이고 폭 125cm 두께 25cm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비문에는 대지국사가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태어나 14세에 출가하고 공양왕 2년(1390)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을 기록하고, 대사의 인품과 학력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비문은 의정대부 박의중이 짓고, 승려인 선진이 글씨를 썼으며, 혜공이 새겼다. 힘차고 굳센 필체로 짜임도 우수하다. 비문 끝에는 국사의 동문들과 속세의 문도 이름 및 충주목사까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광범위한 체제로 비석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 대지국사 찬영(大智國師 粲英, 1328-1390)

대지국사의 속성은 청주 한(韓)씨로 법명(法名)은 찬영(粲英), 호는 목암((木庵) 자는 고저(古樗)이며 고려 충숙왕 15년(1328년)에 출생하였다. 14세에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출가하여, 원증국사 보우(普愚)로부터 5년간 사사하고 법을 받았다. 그 뒤 정혜국사(淨慧國師)에게 있다가 총림에 나아가 가지산 제2좌가 되고, 유점사의 수자게 선열(禪悅)을 얻었다.

1350년(충정왕 2) 구산선(九山選)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하여 대흥사에 머물다가 잠시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도행을 연마하고, 중흥사에 거주했다. 공민왕은 찬영을 '벽안달마'(碧眼達磨)라 칭하고 '양가도승록대사'(兩街都僧錄大師)로 임명했다. 특명에 따라 석남사·월남사·신광사·운문사 등 여러 사찰에 거주하다가, 1372년(공민왕 21) 내원당(內願堂)으로 초빙되어, 정지원명무애국일선사(淨智圓明無碍國一禪師)의 호를 하사받았다.

47세 때 공민왕이 승하하자 속세를 피해 생활하려 하였으나 우왕이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로 삼고 1383년에 왕사로 봉해 충주의 억정사와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게 했다. 50세에 보개산에 들어가고 다음해에 가지사와 태자산 주지를 하였으나 모두 왕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56세에 왕사로서 조계종 존자라 명을 내리고 억정사에 맞아들이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증흥사에 원중국사비를 세웠고 58세에는 왕이 광명사로 맞아 들였다.

신왕이 즉위한 후에도 전 임금 같이 섬겼으며, 같은해 10월 흥성사로 옮긴 뒤에 왕명으로 억정사에 머물게 하였으며, 공양왕 2년(1390년)에 63세로 입적하였다. 왕은 지감국사(智鑑國師)라는 시호와 혜월원명(慧月圓明)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조선 태조도 1393년(태조 2) 대지국사(大智國師)라는 시호와 지감원명(智鑑圓明)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각종 백과사전 종합 정리한 내용임>



※ 충주 백운암 철조여래좌상(보물  제1527호)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주시에 소재한 백운암은 1886년 무당의 신분으로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받아 여자 대감이 된 윤씨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로 전해진다. 이 사찰에서 주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이 철불은 원래 이곳에서 전하던 불상은 아닌데, 인근에 고려시대 대규모 사지인 억정사지(億政寺址)가 있어서 아마도 이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충주는 철의 산지로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 이외에도 대원사(大圓寺)의 충주철불좌상(보물 제 98호)과 단호사(丹湖寺)의 철불좌상(보물 제 512호)이 전하고 있어서, 이 세 구의 철불은 충주 지방의 3대 철불로 알려져 있다.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본존상 이래로 유행한 편단우견(偏袒右肩)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여래 좌상으로, 규모는 높이 87㎝정도의 크지 않은 상이다. 얼굴은 몸 전체에 비해 작은 편이나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고 근엄한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이고 어깨가 넓으며 가슴이 융기되었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의 폭이 넓어서 당당한 자세를 보인다. 몸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양감있게 조각되었고 대의 자락에서 부분적으로 번파식 옷주름을 볼 수 있어서 이 불상이 통일신라 8세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감이 8세기 불상만큼 풍부한 것은 아니며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도 전형적인 형식이 아니어서 8세기보다는 시대가 내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정도로 추정된다.

이 철조여래좌상은 비교적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충주 지역 철불 중에서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상으로 추정된다. 또한 상호도 원만하며 전체적으로 크게 손상된 부분이 없고 조각 양식도 좋은 편으로, 통일신라시대 이래 철불 연구에 매우 중요한 상이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