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폐사지 여행 (1) 북쪽을 바라보는 유일한 석굴사원, 중원 미륵사지

모산재 2009. 12. 6. 22:52

 

 

굴업도를 찾아보자고 약속한 토요일, 새벽같이 나서 전철을 타는데 파도가 높아 배가 뜨지 않는다는 연락이 온다. 한동안 따스한 날이 이어지더니 갑자기 거센 바람과 함께 시베리아 한파가 몰아친다.

 

이미 나선 걸음,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도 아까워 전화를 주고 받은 끝에 일단 충주 미륵사지와 하늘재로 가 보자. 그렇게 해서 결국은 1박 2일 폐사지 여행이 되었다.

 

 

 

서울에서 출발해 두어 시간 남짓 달려 수안보에서 얼마 멀지 않은 미륵사지 입구 주차장에 도착한다.

 

차를 세우고 바로 옆 식당에서 동동주 몇 잔과 함께 점심을 먹은 후 폐사지를 향해 걷는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길이 한적해서 편안하고, 갑자기 밀려온 찬 바람이 월악산 솔숲에서 실어온 산소가 청량해서 상쾌하고, 약속도 없이 이런 번개 여행을 함께 하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더욱 따스하다.

 

 

 

월악산국립공원 하늘재에서 흘러내린 산자락이 포근히 둘러선 골짜기에 자리잡은 고려시대 절터 미륵사지. 5층석탑이 보이고, 그 너머 멀리 석굴암이 무너진 듯한 석축 사원 안 푸른 하늘을 떠받치듯 솟은 낯익은 미륵석불입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월악산을 끼고 고구려와 신라의 격전장이었을 하늘재 아래 남북으로 길게 벋은 분지에서 멀리 월악산을 바라보며 우뚝 선 미륵불상의 모습은 편안하면서도 신비롭다. 북쪽을 바라보는 유일한 절, 무너지긴 했지만 이 땅에선 극히 드문 석굴사원이라는 특이한 구조 등으로도 미륵사터는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해 보인다.

 

 

눈을 내려 바라보니 커다란 돌거북이 보이고 오층석탑 주변에 8각석등과 4각석등도 눈에 띈다.

 

 

 

 

■ 충주미륵리사지귀부(시도유형문화재 제269호)

 

이 돌거북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라고 하는데 이곳에 있던 자연석인 바위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북등은 마치 맞배지붕처럼 굴곡없는 평면으로 표현되었고 거북등에는 귀갑문 등의 장식이 전혀 없어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대담한 모습이다

 

 

 

 

머리는 수평으로 내밀었는데 굵은 목에 입을 다물고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그냥 수수하다. (거북의 콧구멍에는 누군가가 동전을 장난스레 끼워 놓았다.) 발은 오른쪽 앞발만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을 뿐 나머지 발은 없거나 흔적만 있을 뿐이다. 다만 거북등 왼쪽 어깨에는 2마리의 새끼거북이 기어오르는 듯한 모습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거북 등에는 비신을 세운 흔적인 듯 홈이 깊게 패여 있는데 실제로 비신이 있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현재 비신이 남아 있지 않으나 위치로 보아 사적비를 세웠던 받침으로 추정된다.

 

 

 

 

 

 

■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석불입상, 8각석등과 같은 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여지는 높이 6m의 화강암 탑이다. 기단부 아래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는데 드러난 부분은 지대석과 기단부가 커다란 자연석 하나를 다듬은 모습이다. 석탑에 흔히 표현되는 우주와 탱주가 희미하거나 나타나 있지 않고 있다.

 

 

 

 

지붕돌이 모두 1장의 돌로 되어 있는데 1층 지붕돌이 2장으로 된 것이 눈길을 끈다. 지붕돌 경사가 급하고 처마는 수평이며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거의 없다. 지붕 밑면의 층급 받침은 5단인데 추녀가 짧아서 6단인 것처럼 보인다. 탑의 꼭대기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이 커서 6층 지붕돌로 보일 정도이다. 5단의 지붕돌 밑면받침과 직선의 처마는 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른 것인데, 지붕돌의 급경사와 형식적인 기둥새김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 뒤에서 본 모습

 

 

 

 

 

 

■ 미륵리 사각석등

 

 

미륵사지 한켠에 비켜 서 있는 또 하나의 석등은 1977년도 미륵리 사지 발굴 작업 때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찾아내어 옮겨와 세운 것이다.

 

팔각석탑과는 달리 4각의 윗받침돌(상대석) 위에 화사석에 해당하는 4우주를 얹었는데, 이러한 양식의 4각석등('개국사 돌등')을 작년 개성 고려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다.

 

 

 

 

고려시대 석등으로 개경 일대 사찰에서 주로 보이는 석등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양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평가된다. 하지만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점이 뜻밖이다.

 

 

개성 고려박물관의 개국사 돌등

 

 

 

 

 

해가 기우는 늦은 시간인데 독경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미륵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 절을 하거나 서서 합장하고 있다.

 

 

보통의 절과는 다른 특이한 구조, 석조 불상을 모시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는 거대한 돌 건축물은 석굴암을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뜨거운 기온을 피하기 위해 널리 만들어진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이 과연 석굴암 외에도 이 땅에 존재한 것일까? 일찍이 석굴사원 여부로 미륵사는 논란의 한가운데 있어 왔는데,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석굴사원으로 해석되고 있다.(개인적으로 의문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실제로 1963년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을 복원할 때도 미륵당의 전실 평면을 참고하였다고 한다.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사 결과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 연대를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추정하는데 고려 초기로 보는 설이 우세한 듯하다. 석불입상이 고려시대 초기 이 부근에서 많이 조성된 일련의 거불들과 양식적인 특징을 같이하는 점도 그런 판단의 근거인 모양이다. 그리고 고려 후기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 창건설과는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 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에 입산도중(또는 왕권 회복을 꾀하고자 강원도 한계산성으로 가는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보물 제406호)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더보기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코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되었다. 일행은 그곳 계곡 깊은 곳에 야영을 하고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날 밤 왕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음보살은 왕자에게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세우고 그 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니 포덕함을 잊지말라." 잠에서 깨어난 마의 태자는 꿈이 신기하기에 누이동생인 덕주공주를 불러 꿈의 얘기를 전하고 그 내용을 물었더니 놀랍게도 같은 시각에 공주 역시 그와 같은 현몽을 받았다.

두 남매는 맑은 계곡물에 손과 입을 씻고 서천을 향해 합장배례한 뒤 다음날 서쪽을 향해 고개를 넘으니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이 놓여 있었다.그 곳에서 일행은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파란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이 보이는 장소를 택해 석불입상을 세우고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리고는 8년이라는 세월을 이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공주는 만족하였으나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고 한계산성을 향해 떠났고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진 공주는 절에 몸 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을 그리워하며 태자의 건승을 빌었다 한다.

 

 

 

 

 

 

■ 미륵리 석불입상(보물 제96호)

 

 

높이 9.8m의 거대한 미륵입상으로 모두 5개의 돌을 차례로 올려 불상을 만들고 맨 위에 얇은 돌로 만든 갓을 올렸다. 얼굴이 새겨진 부분만 티없이 깨끗한데 몸통 부분은 화재의 흔적인 듯 검은 색이 많이 배어 있다.

 

'원융'이라는 말이 어울릴 둥근 얼굴에 그린 듯한 둥근 눈썹, 생각에 잠긴 듯 넓은 눈두덩으로 내리감은 눈, 넓적한 코, 아담하면서도 슬픔이 살짝 배어나오는 듯 다문 두터운 입술, 얼굴 길이만큼의 커다란 귀 등이 어쩐지 전설 속의 마의태자를 떠올리게 한다. 얼굴의 정교한 표현에 비해 손과 팔의 표현은 간략하거나 생략되어 있고 기타 옷주름 등의 새김도 소홀함을 느낄 수 있다.

 

대담하고 커다란 불상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고려 초기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조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 미륵사지와 미륵불에 대한 세 가지 의문

 

 

<첫째 의문> 미륵사는 과연 석굴사원이었을까?

 

석굴암이 그렇듯이 대개 석굴 안에는 석조여래좌상을 모신다. 그런데 이곳에는 높이가 9.8m의 석불입상을 세우고 앞쪽을 제외한 3면에 높이 6m의 석축을 쌓아 놓았는데, 특이한 것은 이 석축은 불에 심하게 타서 돌이 탄 흔적이 역력하다. 온전히 석굴사원이었으면 석축에 조각된 불상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는 화재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목재가 탄 흔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혹시 석축의 위쪽이나 지붕은 목조로 건축된 것은 아니었을까…?

 

 

 

 

 

<둘째 의문> 불상의 머리 부분은 왜 깨끗할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화재로 석축 벽면에 조각된 불상이 심하게 손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석불입상도 검게 그을린 흔적이 두루 나타나는데 유독 미륵입상의 머리 부분만 화재 흔적이 없이 깨끗하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화재로 손상된 머리 부분을 파불하고 새로 조성한 것은 아닐까?

 

 

 

<셋째 의문> 불상이 과연 미륵불일까?

 

 

미륵불 입상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자.

 

그런데, 의심할 바 없이 미륵불로 믿어지고 있는 이 불상이 가슴에서 펴고 있는 오른손이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함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모습이어서, 미륵불이 아니라 약사 여래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미륵 신앙은 토착신앙, 민중 신앙의 요소가 강하여 바위에 거칠게 새기어 조성하는 소박한 수준이 일반적인데, 고려초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중앙 권력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지방 호족세력에 의해) 조성된 이와 같은 거대한 석불이 과연 미륵불일 수 있을까?

 

미륵불이라는 이름은 나중 민중에 의해 불려지게 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역사의 패배자, 마의 태자에 대한 민중의 연민이 미륵불에 대한 전설로 꾸며지게 된 것은 아닐까…

 

 

 

 

 

 

 

 

 

 

미륵사지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 쌀쌀한 날씨에 노랗게 핀 개나리 꽃을 만나 잠시 마음이 따스해진다.

 

 

 

 

 

 

 

■ 온달장군의 전설이 서린 공기돌바위

 

 

그리고 개울 건너편, 공기돌바위를 잠시 돌아본다. 자연적인 바위에 약간의 인공이 가미된 바위로 거북바위라 불리우는 바위 위에 올려져 있는 직경 1m 가량의 공기돌을 닮은 둥근 바위로 온달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다.

 

 

 

 

 

동쪽의 하늘재는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이었으며 고구려 평원왕 때 온달장군은 스스로 군사를 청하여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상류 지역인 이곳과 죽령부근의 단양 땅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 지역에 주둔하며 성을 쌓을 때 이 바위를 공기돌로 사용하여 놀았다는 전설로 신라군에 대한 온달의 힘자랑 이야기이다.

 

 

 

 

 

 

그리고 미륵사지 입구에 있는 밭 가운데에 삼한시대 토축한 길이 6.2m 폭5.4m의 무덤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은 이를 온달장군의 묘로 부르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 미륵대원(彌勒大院) 터

 

 

미륵사지를 나와 오른쪽 길로 접어들며 하늘재로 향한다. 그런데 갈 오른편에는 대규모 집터들이 보인다. 미륵대원(彌勒大院)으로 고증된 곳이다. 미륵사와 함께 원의 구실을 함께 한 고려 초기의 원터인 것이다.

 

 

 

 

미륵사가 창건된 뒤에 역원제도가 정비되면서 이곳은 지리적 요지로 역의 기능을 담당하는 미륵대원이 서게 된다. <삼국유사>에 "미륵대원은 계립령 동쪽 고개이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계립령은 지금의 하늘재로 이와 일치하고 있는 곳이다

 

조사 결과 건물터는 '回'자형의 구조로 건물 가운데는 말을 묶어둔 마방 시설을 두고 주변의 건물은 나그네 등 사람이 머무는 숙소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원터는 고려초기에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조선시대에 새제(조령)에 관방시설이 완비되면서 점차 그 기능을 잃어가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하늘재 오르는 길

 

 

5분쯤 지나 하늘재로 오르는 숲길로 들어선다.

 

 

 

 

 

솔숲으로 이어지는 길은 상쾌하다.

 

 

 

 

 

 

그리고 하늘재 고갯마루, 하늘재 산장에서 서늘한 막거리 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오솔길 따라 올라 왔는데, 고개 너머쪽은 2차선 아스팔트가 시원스레 뻗어 있다. 온달장군이 우리와 함께 막걸리잔을 나눴다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냥 말없이 공기돌만 만지작거렸을까.>

 

 

 

 

 

충주의 어느 거리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그리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에는 눈송이가 희끗희끗 날렸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