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너른 호수 건너 닿는 피안의 세상, 오봉산 청평사

모산재 2009. 12. 2. 22:51

 

소양호 맑고 너른 호수를 건너 도달하는 피안의 세상, 세속의 먼지를 숨쉬기에 지친 중생은 꿈꾸며 구름안개 자욱이 덮힌 골짜기를 오른다. 울창한 숲과 골짜기를 건너 물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흐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고요함 속에서 청정하고 거룩한 불심에 잠기며 티끌조차 세탁된 맑은 영혼을 얻어 다시 저자거리로 돌아가더라도 반본환원할 것을 기대한다.

 

청평사는 은유와 상징의 공간인지 모른다. 어쩌면 '청평사'라는 이름이 아니었으면 그토록 사람들이 찾았을까 싶다. 세속에 먼지에 찌들고 불안한 일상에 시달리는 중생들에겐 '맑고 평정함'을 뜻하는 '청평(淸平)'이란 언어 자체가이미 실존하는 세계인 것을…. 

 

 

 

 

 

 

 

 

 

청평사 뒤에 779m의 높이로 솟은 오봉산(五峰山)은 비로봉, 보현봉, 문수봉, 관음봉, 나한봉의 다섯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광명의 부처 비로자나불과 보현, 문수, 관음 세 보살과 나한이 지키고 선 불국토에 자리잡은 청평사! 그럼에도 이곳을 찾는 산객은 불교의 경계를 넘어 도교적 감흥에 젖는다. 오봉산이란 이름부터 그러하거니와 29세의 젊은 나이에 벼슬을 내던지고 37년간 이 곳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낸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청평'이란 이름의 유래는 지극히 통속적인 의미를 담은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경운산으로 불리었던 청평산은 도적과 호랑이가 득실거렸는데, 청평거사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이 곳에서 은거하면서부터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도적과 호랑이를 깨끗하게(淸) 평정했다(平)는 뜻에서 경운산을 청평산(淸平山) 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평사'라는 절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조선 중기 탄압받던 불교를 중흥시키고 이 곳에 머물던 보우(普雨)스님이 절을 중건하면서 청평거사의 호를 따 절의 이름을 고치면서부터이다.

 

 

 

 

 

 

청평사 법당으로 들어서는 문의 이름은 회전문(보물 제164호). 그런데 회전하는 문이 아닌데도 어째서 회전문인가...? 이는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를 담은 명칭이라 한다. 

 

 

사찰에는 보통 상징적으로 3개의 문이 있는데 절 입구의 일주문과 중심부에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 그리고 뒷면에 해탈문이 있다. 이 회전문은 사찰의 중문으로 사천왕문에 해당된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한 칸은 넓게 잡아 통로로 사용토록 하고 좌우는 칸을 좁혀 전면과 바깥 측면에 벽을 친 후 마루를 깔았는데 이곳에 천왕상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보이는 것처럼 회전문만 남아 있었으나 복원하면서 양쪽에 건물이 들어섰다. 

 

 

넓은 마당 아래에 아름드리 은행나무에 달린 은행 열매가 화사한 늦가을 빛을 발한다.

 

 

 

 

 

회전문을 지나서 나타나는 누대 경운루(慶雲樓).

 

오봉산의 옛이름인 청평산, 그보다 더 옛이름이 경운산(慶雲山)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복원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머리가 닿을 듯한 경운루를 지나면 나타나는 대웅전.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계 겹처마 맞배 지붕의 건물이다. 다포계에는 팔작지붕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맞배지붕을 올린 점이 색다르다.

 

 

 

 

 

 

대웅전 불단에는 근래에 봉안한 석가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가운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현 보살좌상이 각각 협시하고 있다. 여래상과 보살상의 상호와 크기가 서로 비슷한 것이 눈에 띄는데, 단정하면서도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삼존불 위의 보궁형(寶宮形)의 닫집 중앙에는 구름 사이를 날아다니는 가릉빙가(迦陵頻伽)가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데 주목하지 못했다. (가릉빙가 : 범어로 Kalavinka, '묘한 소리' 또는 '좋은 소리'라 번역되며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한 미묘한 소리를 내는 새이다.)

 

 

 

 

 

 

나한전

 

 

 

 

 

복원되기 전 이곳 대웅전 앞에는 옛 청평루와 선당(禪堂) 승당(僧堂)의 흔적으로 보이는 주춧돌 등 여러 종류의 석재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깨끗이 치워졌다. 

 

 

 

대웅전 계단의 양쪽 귓돌에는 정교하게 새겨진 연꽃 무늬와 태극 무늬가 함께 있어 눈길을 끈다.

 

 

 

 

대웅전 옆벽에 그려진 비천상

 

 

 

 

 

극락보전에서 내려다본 대웅전

 

 

 

 

 

 

국보로 지정된 극락전이 있었으나 6 ·25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극락보전은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닫집은 옛 극락전의 모습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보개형(寶蓋形)으로 설치하였으며, 상부의 평판 속에는 황룡 한 마리를 나타내었다. 후불탱을 비롯하여 지장탱과 신중탱이 있는데, 모두 최근에 조성한 것이다.

 

 

 

 

 

극락전 오른쪽에 있는 맞배지붕의 작은 건물이 삼성각으로 안에는 1979년에 그린 칠성탱·산신탱·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정면 왼쪽 벽에는 산신이 거느리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감로병이 얹힌 연꽃을 들고 있는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여래상은 오른손은 들고 왼손은 내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다. 좌우 협시 보살상은 서로 모습이나 크기가 거의 같은데, 왼쪽의 대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는 달리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은 채 아미타여래좌상과 마찬가지로 시무외여원인을 짓고 있다.

 

 

극락보전의 꽃창살

 

 

 

 

관음전 앞 언덕, 800년 되었다는 강원도(道)나무인 주목

 

 

 

 

 

애초에 오봉산을 오르려는 계획이었지만 아쉽게도 비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그리하여 청평거사가 머물렀다는 식암과 적멸보궁도, 환희령이라는 언덕 위에 있다는 3층석탑도 구경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