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착장에서 내려서도 실오리처럼 가는 가을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구름 속에 묻혀 더욱 신비감을 자아내는 오봉산자락 골짜기로 접어드는 길은 사뭇 경건함조차 감도는 듯하다.
생명의 바깥에서 풍경을 이루는 호수와 안개, 생명의 안쪽에 스며들어 숨쉬는 수액과 체액, 물의 윤회를 통해 존재의 세계 삼라만상은 생기를 띠고 무애법계(無碍法界), 평등법계의 화엄을 이룬다.
이러한 생명계의 윤회를 거스르는 인간의 탐욕이란 무엇일까. 언뜻 하나마나한 소리로 들리기도 했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성철 스님의 법언이 울림을 주는 것은 산과 물이 동일자로서의 존재를 유지하면서도 타자로서의 경계를 지우며 하나가 되는 경이로운 존재의 세계, 화엄의 세계를 잊고 사는 우리를 각성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안개 구름 속은 피안의 세계일 줄 알았더니 산을 넘어온 아스팔트길이 새로 뚫려 바람길이 되어 달리고 들어선 음식점들에선 세속의 냄새가 골짜기를 거슬러 흐른다. 호젓함이 사라진 길을 따라 호숫가 두 개의 골짜기, 두 개의 다리를 건너야 청평사 오르는 계곡길로 접어들게 된다.
입구에서 얼마 올라가지 않은 계곡에 '상사뱀과 공주'의 전설을 형상화한 동상이 있어 발길을 멈춘다. 너럭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곡 위에 넓은 바위를 얹고 그 위에 올린 조각상, 자연 계곡에 동상이라니 이질적인 존재의 부조화가 어색하기만 한데, 빗속에 계곡을 오르던 사람들이 우산을 내려놓고 너나없이 기념 사진을 찍으며 분주하다.
상사뱀과 공주에 얽혀 있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당태종 대에는 매년 중국 전역에서 모인 민속경연대회가 열렸는데, 어느해 광대놀이 묘기를 보인 19세의 건장한 청년과 평양공주가 사랑에 빠지고 말았고 이를 알게된 태종은 청년을 사형에 처했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元順帝의 공주, 또는 산동성의 성주의 딸이 궁궐을 짓던 도목수가 짝사랑하다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고도 한다.) 억울하게 죽은 청년은 상사뱀으로 환생하여 공주의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난 사찰을 순례하며 부처님께 빌어 보았으나 효험이 없자 공주는 신라로 건너와 사찰을 순례하게 되었고, 어느날 청평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구성폭포를 건너 동굴에서 수도하던 공주가 하루는 "사람들이 놀랄 것이니 잠시 떨어져 있으라."고 상사뱀에게 이르고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절 안으로 들어갔다. 공주가 식량을 구해 나오려고 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기다리던 상사뱀에게 벼락이 내리치며 폭우가 쏟아졌다. 절로 들어가려던 뱀은 회전문을 돌아 다시 절 밖으로 나와 물에 휩쓸려 죽고 말았고, 뱀이 죽은 자리는 아름다운 폭포로 변했다고 한다.
공주는 죽은 뱀의 영혼을 위로하는 49재를 지내고 백일 기도를 올렸다. 이후 공주의 건강은 회복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당 태종은 금덩어리 세 개를 보내와 사찰의 중건에 쓰여 졌다고 한다. 건강이 회복된 후에도 공주는 귀국하지 않고 수양을 계속하며 구성폭포 건너편 위쪽에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하며, 이후 사람들은 공주가 동굴에 머물면서 목욕재계하였던 곳을 각각 '공주굴'과 '공주탕'이라 하였고 삼층석탑은 '공주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단풍철을 지나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말라버린 잎새들이 비에 젖고 있는 숲길을 따라 걷노라니 바위 하나가 나타나는데, '거북바위'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내 눈에는 거북이라기보다는 개구리가 더 가까워보인다.
거북바위를 지나 얼마간 더 오르면 계곡의 아래 위 나란히 자리잡은 두 개의 폭포가 나타난다. 아래쪽의 작은 폭포는 물이 두 갈래로 흐르는 쌍폭이다. 무릉계곡의 쌍폭에 규모로 비할 바 아니게 작지만 통너럭바위를 타고 흐르는 두 개의 물줄기는 계곡에 어울리게 아담하고 아름답다. 1820년 봄 청평사를 찾았다는 다산은 이 폭포를 청평산의 옛 이름을 따서 '경운대폭포'라 불렀다고 한다.
쌍폭 바로 위에는 이 작은 골짜기에 이런 폭포가 다 있을까 싶게 장관을 이룬 구성폭포(九聲瀑浦)가 힘찬 물줄기를 드리우고 있다.
폭포의 물소리가 아홉 가지로 들린다고 하여 구성폭포라 한다는 설이 있지만, 원래는 아래 위 두 개의 폭포 사이에 아홉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구송폭포(九松瀑浦)'라 불리어오던 것이 와전되어 구성폭포로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청평사를 중심으로 '고려 정원'을 만든 이자헌이 손수 심은 소나무가 녹음을 이루며 잘 자라고 있다는 기록을 정약용이 남기고 있는데, 지금 살아 있다면 900살을 넘었을 그 소나무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오봉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폭포수가 되어 흐르는 높이 9m의 구성폭포의 경관은 빼어나다. 깊은 산의 어느 폭포가 안 그럴까마는 조선 숙종 때 전국을 유람하며 <산중일기>를 남기고 있는 성리학자 정시한(1625-1707)은 "무척이나 맑은 기운이 스며나오는 기이한 경관"이라고 하였다.
폭포수를 건너면 중국 당나라 공주와 상사뱀과의 전설이 깃든 '공주굴'이 나온다는데 확인해 보는 걸 생략하고 만다. 비 내리는 날씨에 이동이 어렵기도 하고 이야기의 상상력에 실망을 불러오는 일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어쨌거나 호수와 계곡과 바위가 어우러진 청평사 계곡은 작지만 아름답다. 여기에 오봉산의 웅장한 봉우리까지 합세하면 웅장함과 섬세함이 조화를 이뤄 더할 나위 없는 풍광이 아닐 수 없다.
저 금강산의 기암괴석과 태백산의 웅장한 봉우리와 큰 골짜기는 비록 경관이 놀랍고 장엄하지만 그 천석은 옥과 그림같이 사랑스럽고 놀랄만한 것이 가히 청평사와는 한 나라에서 아름다움을 다툴 수 없다. <보우 '허응당집'>
조선 중기 명종을 대신해 섭정하던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탄압받던 불교를 중흥시킨 보우(普雨) 가 잠시 이곳 청평사에 와서 머무르면서 이곳을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신비스러움을 지닌 그윽한 지역"이라며 극찬한 말이다.
구성폭포를 지나 다시 오솔길을 오르노라면 청평사가 멀지 않은 곳에 거울처럼 맑은 물이 담긴 연못, '영지(影池)'가 나타난다.
청평사에 은거하던 이자현(李資玄)은 자연 경관을 최대한으로 살려 물길을 끌어들이고 정원 안에 영지(影池)를 만들었다.
영지는 연못에 오봉산의 모습이 비치도록 조성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절마다 입구에는 연못이 있고 영지(影池)라는 이름이 있는 곳도 불영사, 불국사, 해인사 등 여러 절들이 있지만, 청평사의 영지는 한국 전통 연못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조경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후기 서종화(徐宗華, 1700~1748)는 <청평산기(淸平山記)>에서 "바람이 맑게 파도 치듯 불어 봉우리를 주름잡으며 초목이 모두 동요하는 그 광경이 황홀하여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을 정도"라 하였고, "봉우리와 바위가 깎아지른 듯 서 있고 산의 암자가 못에 또렷이 비추이는 것이 마치 그림 같다"고 하여 그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그런데 근년에 영지를 중심으로 청평사 들목의 구성폭포에서 오봉산 정상 바로 아래 식암에 이르기까지 2km에 이르는 1만여 평에 이르는 청평사 전체 경역에 조성된 '고려 정원'이 한국전통조경학회의 학술 조사로 실증되어 발굴되었다. 이자현의 도교적 은일사상과 불교의 선사상이 깃든 '고려 정원'은 자연의 형상에 최소한의 인공만을 보탠 우리 전통 정원의 원형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고려정원을 '일본 교토에 있는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으로 그 의의를 평가하지만, 메마른 모래와 자갈로 인위적으로 표현되는 질적으로 아주 다른 일본의 고산수식 정원에 굳이 비교해야 할 이유가 있을는지….
어쨌거나 최근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청평사의 명승 지정을 추진하여 고려정원인 영지(影池), 계곡, 옛길이 복원될 것이라고 하는데, '상사뱀과 공주' 조형물처럼 자연을 거스르는 복원이 되지 않을까 지레 걱정스런 마음이 앞선다.
청평사 바로 앞, 두 갈래로 흘러내리다가 다시 합쳐지는 골짜기의 물을 바라보며 다리를 건넌다.
사람 사는 세상도 저처럼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청평사 경내로 올라선다.
▣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 1061~1125), 그는 누구인가?
이자현은 고려의 문벌귀족 경원 이씨로 할아버지 이자연은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였고, 3명의 고모는 왕비, 왕은 고모부, 삼촌 소현 스님은 왕사였다. 아버지 이의 또한 재상에까지 오를 정도로 높은 관직에 있었다. 왕위를 노리고 난을 일으킨 이자겸은 그의 사촌이다. 이자현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스물셋에 급제하여 관직의 길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대락서승(大樂署丞)'이라는 고위 관직에 오른 그는 사촌 이자겸과 함께 인주 이씨 가문의 영광을 이어갈 인재로 촉망받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기로, 권력 투쟁과 불교계의 분열을 지켜보던 이자현은 집을 나선다. 전국을 유람하던 그는 아버지가 춘천 경운산에 지어 놓은 보현원이라는 암자에 머무르게 된다. 그는 경운산을 청평산이라 바꾸고 보현원을 문수원이라 고친 다음 베옷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교학을 연구하고 참선에 몰두했다. 왕들의 부름도 있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고 다만 수많은 벗들이나 스님들과 교류하거나 글을 쓰며 경전 강의에 힘쓸 뿐이었다.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중인 문수원 중수비에는 고려 예종과 인종이 차를 하사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셨다. 묘용이 종횡무진하여 그 즐거움에 걸림이 없었다.(饌香飯 渴飮名茶 妙用縱橫 其樂無碍)"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예종이 여러 번 조서(詔書)를 보내 불렀으나, 그는 진정표(陳情表)에서 '호량(濠粱)의 물고기' 고사를 들어 사양했다. 장자와 혜자가 물가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장자가 "물고기가 조용히 노는 것이 즐겁구나." 하고 말하자 혜자가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면서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고 말했던 것. 이에 장자는 "자네는 내가 아니면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리라고 어찌 아는가?"라고 했는데, 이 고사를 인용해 이자현이 올린<제이표(第二表)>득의(得宜)'는 그의 은일사상을 표현한 빼어난 글이다.
鳥樂在於深林 魚樂在於深水 새의 즐거움은 깊은 숲 속에 있고 물고기의 즐거움은 깊은 물에 있습니다.
不可以魚之愛水 徙鳥於深淵 물고기가 물을 사랑한다고 해서 새까지 깊은 못으로 옮겨서는 안 되며
不可以鳥之愛林 徙魚於深藪 새가 숲을 사랑한다고 하여 물고기마저 깊은 숲으로 옮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以鳥養鳥 任之於林藪之娛 새로써 새를 길러 숲속의 즐거움에 내맡겨 두고
觀魚知魚 縱之於江湖之樂 물고기를 보고 물고기를 알아 강호의 즐거움을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두어
使一物不失其所 群情各得其宜 한 물건이라도 제자리를 잃지 않게 하고, 모든 뜻이 각기 마땅함을 얻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왕은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고, 특별히 남도(南都, 현재의 서울)로 행차하여 그를 불러서 만나보고, 수신(修身)과 양성(養性)의 요점을 물었다. 그는 "옛사람은 성품을 기르는데는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다(養性莫善於寡欲)."고 대답한다.
어느 해 따스한 기운이 전해지는 봄날, 같은 해 과거 급제를 한 곽여가 관동안찰사로 부임되어 왔다가 그를 찾아 와 주고받은 시는 유명하다.
淸平山水冠東濱 청평의 산수가 해동에도 으뜸인데
邂逅相逢見故人 오랜 뒤 옛친구를 다시 만났네.
三十年前同擢第 30년 전에 같이 급제한 우리인데
一千里外各棲身 천 리 밖에 각기 떨어져 살았네.
浮雲入洞曾無累 뜬 구름 골에 드니 더러움이란 없고
明月當溪不染塵 밝은 달이 시내를 비치니 티끌에 물들지 않네.
擊目忘言良久處 말을 잊고 눈을 마주치며 오래도록 앉았노라니
淡然相照舊精神 옛 정신 담연히 서로 비치는구려. <곽여, 증청평이거사(贈淸平李居士)>
이자현은 다음과 같은 화답시를 지었다.
暖逼溪山暗換春 따뜻한 기운이 시내와 산에 다가와 가만히 봄으로 바뀌는데
忽紆仙杖訪幽人 홀연히 선장 짚고 그윽히 숨어사는 사람 찾아왔도다.
夷齊遁世惟全性 백이와 숙제가 세상에서 숨은 것은 오직 성품을 보전하고자 함이요,
稷契勤邦不爲身 직(稷)과 설(契)이 나라 일에 부지런함은 제 몸을 위해서가 아니었네.
奉詔此時鏘玉佩 왕명을 받들고 온 이때에 옥패물(玉佩物)이 쟁그랑거리는구나.
掛冠何日拂衣塵 벼슬을 그만두고 어느 날 옷의 티끌을 떨쳐 버리려는가.
何當此地同棲隱 어찌 이 곳에 함께 숨어 살며
養得從來不死神 종래에 지니고 있는 불사(不死)의 정신을 길러 얻지 않는가?
"말을 잊고 눈을 마주치며 오래도록 앉았노라니 옛 정신 담연히 비치는구나."라는 안찰사의 말에 "어찌 이곳에 함께 숨어살며 종래에 지니고 있는 불사(不死)의 정신을 길러 얻지 않는가?"라고 받는 청평거사의 화답에는 우정을 넘어서 삶의 길이 엇갈린 두 사람의 정신 세계가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스님이 아닌 스님, 머리를 깎지 않은 선승으로 37년간 이곳에서 숨어살던 청평거사는 1125년 4월 65세의 나이로 입적한다. 왕은 진락공(眞樂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에도 이자현(李資玄, 1061-1125)과 관련한 글이 실려 있다. 이인로는 이자현의 조부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의 동생 이자상(李子祥)의 현손(玄孫)이다. 이자현에게는 같은 집안의 손자 뻘(8촌)이 되지만 시대 차가 있어 생전에 서로 보지는 못했다.
아래는 '파한집'에 있는 이자현 관련 글의 내용의 번역문이다.
진락공(眞樂公) 이자현(李資玄)은 재상의 집에서 태어나 비록 한때 관직에 나아 갔었으나, 항상 수려한 자연 속에 은거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젊어서 학사(學士)들이 모인 곳에서 어울리다가 술사(術士) 은원충(殷元忠)을 만나 가만히 산과 계곡이 뛰어나 숨어 살만한 곳을 물으니, 은공(殷公)이 말하기를 "양자강(楊子江) 위로 청산 한 굽이가 있으니 참으로 세상을 피해 살만한 곳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항상 마음에 간직하여 두었다. 나이 27세 되던해에 벼슬이 대악서령(大樂暑令)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아내를 잃게되자(叩盆之患), 옷을 떨치고 멀리 떠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문수원(文殊院)을 짓고 살았다. 더우기 선설(禪說)을 좋아하여 학자가 오면 함께 깊숙한 방에 들어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말이 없다가도 때때로 고덕(古德)의 종지(宗旨)를 들고 자세히 논하니 이로 말미암아 마음법(心法)이 해동(海東)에 유포(流布)되었고, 혜조(惠照)와 대감(大鑑, 1070-1159) 두 국사(國師)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놀았다. 골짜기 깊숙한 곳에 식암(息庵)을 지었는데. 둥글기가 고니알 같아서 단지 두 무릎을 겨우 받칠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 속에 말없이 앉아 여러 날을 나오지 않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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