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양귀자 '숨은꽃'의 무대, 김제 모악산 귀신사(歸信寺)

모산재 2009. 2. 25. 19:24

 

'귀신사'라는 절이 있다. '귀신사'라니! 무슨 절 이름이 그리 으시시한가.

 

 

 

금산사에서 712번 지방도를 타고 전주로 향하다보면 귀신사 안내판이 보인다. 모악산 서쪽 자락을 돌아 김제 땅 금산면 청도원 마을 앞에 이르면 '국신사(國信寺)' 입구임을 가리키는 팻말이 서 있다. 거기에서 바로 귀신사가 건너다 보인다.

 

절 앞 주차장 마당 석축에는 민가가 기대어 있다. 절마당 끝으로 돌담이 아담하게 둘러져 있고 돌계단 양쪽에는 아름드리 노거수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어 절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말해 주는 듯하다. 맞배지붕을 한 법당, 대적광전이 돌계단 위에 보인다.

 

 

 

민가처럼 평화롭게 앉은 절을 어째서 귀신사라 하였을까...

 

 

귀신사는 우선 이름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숨은 꽃>이란 소설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친 신이 돌아오는 자리'라고 한 것을 보면 양귀자는 귀신사를 '歸神寺'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알고보니 귀신사는 무서운 '鬼神寺'도 양귀자의 '歸神寺'도 아닌 '歸信寺'였다. '믿음에 귀의하는 절'이라는 뜻이렷다. 참으로 절집이 풍기는 편안한 이미지와 잘 맞는 이름이다.

 

▲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귀신사

 

 

 

 

귀신사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6년(678)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국신사(國信寺)라 불렀는데, 고려 때 구순사(拘脣寺)로 바뀌었다가 조선 말(1873)에 고쳐 지으면서 귀신사(歸信寺)란 현판을 달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아직도 청도 마을 회관 앞 안내판에는 '국신사'라 적혀 있다.

 

지금은 조계종 절이지만, 원래는 삼국을 통일한 후 민심을 모으기 위해 각 지방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 10찰의 하나로 전주 일원을 관장하던 사찰이었다. 한때 금산사가 이 절의 말사였을 정도로 사세가 컸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퇴락하여 대적광전과 명부전, 요사채, 그리고 대적광전 뒤편 높은 축대 위에 삼층 석탑과 석수 정도가 있을 뿐이다.

 

 

 

주차장에서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 5칸의 아담한 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이 나타난다. 화려한 단층이 없고 나뭇결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전각이 수수해서 참으로 편안하다.

 

무슨 일일까, 특이하게도 법당 앞에는 탑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너른 마당만 있어 절집이 아니라 민가의 마당에 들어선 느낌이다.

 

 

▲ 법신불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보물 제826호)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이다. 비로자나는 'Vairocana'를 음역(音譯)한 말로 '모든 곳에 광명(光明)이 두루 비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대적(大寂)'이란 '커다란 정적'이니 정적'비로자나부처님이 발하는 깊은 고요'를 뜻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인데도 기둥 사이에도 포가 있는 다포 양식이다. 5칸 절집인데도 껑충하게 높은데 가운데 세 칸은 넓은데 양쪽 끝 두 칸은 툇간인듯 좁게 지은 것이 매우 특이하다. 문은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다.

 

17세기 경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이 건물은 보물 제8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의 내부에 모신 삼존불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이다.(이는 문화재청의 설명이고, 귀신사 홈피에는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980년에 금물을 입힌 이 불상은 보물 제1516호로 지정되어 있다.

 

 

▲ 지권인(智拳印)의 수인을 한 비로자나불(보물 제1516호) 등 삼존불

 

 

5칸 절집인데도 껑충하게 높은 건물이 특이하다 싶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큰 불상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대적광전은 2층 건물이었는데 후대에 현재의 단층 건물로 고쳐 지었다고 전해진다. 단층건물을 지으면서 거대한 불상을 모시기 위해 기둥을 높이 올려 짓고 그러다보니 중앙 어칸은 넓게 양쪽 칸은 퇴칸처럼 지은 것으로 보인다.

 

모두 흙으로 빚어 만든 조선시대 불상이라고 하는데 법당에 비해 워낙 거대한 불상이라 위압감을 준다. 하지만 인자하고 부드러운 얼굴과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듯 허리가 긴 불신(佛身)이 매우 우아하다. 비로자나불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첫째마디 쪽으로 뻗은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17세기에 대형의 소조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법주사 소조삼불좌상(1626년), 완주 송광사 소조삼불좌상(1641년) 등이 그런 예이다.

 

 

▲ 대적광전 내부 탱화

 

 

대적광전 뒤쪽에는 명부전이 있다.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 대적광전 뒤쪽에 자리잡은 명부전

 

 

명부전 내에는 육환장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다.

 

그리고 열 명의 시왕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연꽃을 들거나 문서를 들고 있는 동자상들이 시립해 서 있으며, 입구에는 금강역사 한 쌍이 세워져 있다. 지장보살상의 뒤에는 지장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 명부전 내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 등 삼존과 시왕이 모셔져 있다.

 

 

조선 초기까지는 지장전과 시왕전이 독립된 전각으로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교의 신인 시왕을 불교에서 받아들이게 되고 고려 말 <시왕경>이 유포되면서 시왕 신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망인을 심판하는 시왕과 자비로써 인도하는 지장보살이 결합된 명부전은 조선의 억불정책 속에서도 유교의 효사상으로 민중들에 굳게 자리잡게 되었다.

 

 

 

영산전(靈山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형식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 목조 기와집이다. 내외의 전각에는 아직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다.

 

 

▲ 단청이 없는 영산전. 석가의 영축산 설법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를 모신 전각이다.

 

내부에는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좌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는 합장을 하거나 두 손을 모은 보살상이 협시하고 있다. 그 양 옆으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입상이 서있으며, 각각 8명씩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맨 가장자리에는 시자가 각각 1명씩 서 있으며, 들어가는 입구에는 인왕상이 각각 서 있다. 불화는 후불탱으로서 영산회상탱이 모셔져 있다.

 

 

▲ 영산전 내부

 

 

 

명부전을 지나면 다시 높은 언덕이 나타나고, 법당 절마당에 보이지 않던 탑이 머리를 보인다.

 

 

▲ 절 뒤안 삼층탑으로 오르는 언덕 돌계단길

 

 

 

고르지 않은 돌계단을 따라 언덕을 올라서면 얕은 산자락을 배경으로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그 넓은 마당 끝에는 삼층석탑이 솟아 있고, 그 곁에는 남근석을 등에 얹고 있는 사자상이 있다.

 

 

귀신사 3층석탑

 

 

▲ 귀신사 석탑

 

 

높이 4.5m의 탑은 얇고 넓은 지붕돌의 곡선미와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어 조성된 수법 등으로 보아 백제 석탑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측된다.

 

 

바닥돌 위에 여러 장의 돌을 짜 맞추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선명하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가 거의 평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그리고 주위에는 삼층석탑을 향해 고개를 든 채 엎드리고 있는 사자상이 있다.

 

 

▲ 귀신사 사자상과 남근석

 

 

'귀신사 석수'라고 부르는 이 사자상은 특이하게도 남근석을 등에 지고 있다. 남근석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랫부분은 대나무에서와 같은 옅은 마디를 두었다.

 

 

절에서 왜 이러한 민망한 조각상을 두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풍수지리상으로 '구순혈(狗盾穴)'이라는 좋지 않은 터여서 이를 누르기 위해 세웠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구순혈은 암캐의 음부를 닮은 지세를 일컫는다.

 

 

 

▲ 귀신사 사자상과 남근석

 

 

 

 

※ 귀신사와 양귀자의 <숨은 꽃>

귀신사는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1992)의 배경을 이루는 곳이다.

옛 소련과 동유럽의 정세가 한국의 소설가로 하여금 글쓰기의 미로에 빠지게 했다. 글이 써지질 않자 머리를 식힐 겸 여행에 오른 길이었다. 작가가 여행길에 오른 것은 전교조 원년의 투쟁을 그린 단편 `슬픔도 힘이 된다' 이후 3년만에 쓰는 단편이 시작부터 미로에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 진술이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세상의 변화에 있었다.

세계사적 변화에서 촉발된 글쓰기의 미로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여행길에서 작가는 김종구와 황녀라는 야성적인 인물들을 만난다. 세상의 어떤 제도나 권위에도 얽매이지 않고 생명의 본성에 충실한 김종구는 작가의 세계관을 근저에서부터 뒤흔든다. "사는 일이 가장 먼저란 말이오. 사는 일에 비하면 나머지는 다 하찮고 하찮은 것이라 이 말입니다."라거나 "머릿속에 생각이 많으면 행동이 굼뜨고, 그러기 시작하면 인생은 망하는 겁니다."라는 김종구의 말에 작가는 크게 깨닫는다.

나는 이제까지 나와 연루된 모든 것들, 한마디로 뭉뚱그려 높은 도덕과 긴 역사의 문화라고 하는 것들이 이들 앞에서 얼마나 하찮게 무너지는가를 절감했다. 내가 영향받고 그에 의해 단련되던 것들이 사실은 아주 작은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 나는 평생 이 작은 세계 밖으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은 절망이었다.

문화니 이념이니에 앞서 구체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진실이야말로 작가를 글쓰기의 미로에서 건져내고 숨어 버린 꽃들의 꽃말을 찾게 하는 열쇠가 된다. '숨은 꽃' 이후 양귀자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천년의 사랑>이라는 대중적 소설들로 방향을 틀게 된다.

 

 

 

 

 

 

※ 귀신사 더 보기

처음에는 국신사로, 그 뒤 구순사(狗脣寺) 불리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춘봉(春峯)이 고쳐 지은 뒤로는 귀신사로 불려오다가 다시 1992년부터는 국신사라 불리다가 다시 귀신사로 불린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다. 676년에 의상(義湘)이 창건하고 국신사(國信寺)라 하였으며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기도 한다. 신라 말 도윤(道允)이 중창한 뒤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원명(圓明)국사가 중창하였으며, 임진왜란의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 10) 춘봉(春峯)이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명부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고, 주요문화재로 귀신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62)·귀신사부도(지방유형문화재 63)·귀신사석수(지방유형문화재 64) 등이 있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