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덕유산 자락 거창의 최고 명승, 수승대와 구연서원

모산재 2009. 2. 24. 22:16

 

거창이 자랑할 만한 명승지는 어디일까. 아마도 수승대와 구연서원이 최고로 꼽힐 것 같다.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龜淵洞),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 한가운데 거북바위가 가 멋지게 솟아 있고, 거북바위를 중심으로 소나무 숲속 멋진 정자와 구연서원이 마주보는 수승대는 가히 최고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덕유산국립공원이라고 하면 무주를 떠올리지만 이곳도 엄연히 국립공원 안에 드는 지역이다.

 

수승대 입구 너른 주차장과 식당가를 지나면 뜻밖에도 '수승대축제극장'이라는 극장 건물이 나타난다.

 

 

 

 

 

거창읍내에서 꽤 떨어진 이곳 골짜기에 세워진 이 극장은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리는 곳이다. 국민관광지로 지정되고 각종 놀이시설이 들어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 골짜기에서 매년 7월31일 전야제를 열고 8월15일까지 공연을 한다고 한다. 낮에는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밤에는 연극을 감상할 수 있으니,  한여름 문화 바캉스로 이만한 곳이 없을 듯하다.

 

 

계곡 입구 마을 앞은 거의 유원지나 다름없어 다소 번잡스럽게 느껴지지만, 마을을 지나면 계곡 양쪽은 물론 계곡 속에도 울창한 소나무 숲이 전개되고 있어 승지로 들어서는 감흥을 절로 느끼게 된다.

 

 

 

 

 

계곡 가운데 길게 늘어선 둔덕에 들어선 멋진 솔숲 풍경에 정신을 팔며 걷는데, 문득 오른쪽으로 산 아래로 커다란 바위와 어울린  이층누각이 앞을 가로막고 선다. 바로 구연서원(龜淵書院)의 문루인 관수루(觀水樓)란 누각이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이층 팔작지붕 누각은 영조(1740)때 세워진 것이라 한다.

 

 

 

 

 

관수루(觀水樓)라니, '물을 바라보는 누각'이렷다. 재미있는 것은 누각이 양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 사이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 기둥들은 다듬지 않은 나무를 썼다. 문루의 이층으로 오르면 왼쪽 바위 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건물과 자연의 조화가 아름답다.

 

관수루란 이름처럼 계곡의 물이 바라보이니, 글 읽던 유생들이 이 문루에 오르기를 즐겼을 듯하다. 병산서원 만세루에서 백사장과 강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씻듯 관수루에선 산과 물의 맑은 기운에서 깨달음 얻었으리라.

 

'관수(觀水)'는 맹자 '진심장'에서 "물을 볼 때에는 반드시 그 물결을 관찰해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고 한 말에서 따온 말이다. 관수루에는 '관수루' 시가 걸려 있는데, '관수유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권의 5대손 신수이가 쓴 것이다.

 

龜淵源接泗洙汀     구연서원의 연원은 수사(洙泗)의 물가에 닿아
活潑淸流繞廟庭     활발한 맑은 시내 서원의 뜰을 돌아 흐르네.
混混續來知有本     끝없이 흘러오니 근본이 있음을 알겠고,
悠悠過去自無停     유유히 흘러가니 스스로 멈춤이 없네. 
盈科豈憚經千曲     웅덩이를 채운 뒤 흐르니 천 굽이를 꺼리랴,
勇進終能達四溟     용감히 나아가 끝내 큰 바다에 이르리라. 
觀水名樓誠有意     관수루라는 이름 참으로 의미가 심장하니,
有形觀處覺無形     형체 있음을 보는 곳에서 형체 없음을 깨닫네.   

 

※ '수사(洙泗)'는 공자의 고향 곡부에 흐르는 사수(泗水)와 그 지류인 수수(洙水)를 가리킨다. 공자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유학(儒學)을 수사학(洙泗學)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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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 진심장 '觀水有術 必觀其瀾(관수유슐 필관기람) 부분

 

孟子曰 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 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 難爲言
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맹자 가로되, 공자께서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작다 하고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다고 하셨다.

바다를 본적이 있는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하고, 성인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은 말에 대하여 말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물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물결을 보아야 한다. 일월의 밝은 빛은 작은 틈새도 남김없이 비추는 법이며,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이다.
군자의 뜻은 도에 있는데, 형체(법식)를 이루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다.

   

 

 

서원 마당에는 커다란 비석들이 나란히 서 있다.

 

'산고수장'이라는 큰 글씨를 새긴 비석은 구연서원의 전신인 구연재를 세운 요수 신권을 기리는 공적비이고, 그 곁으로 성팽년과 신수이의 공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구연서원에 배향된 분들의 공적비들인데, 여느 서원에서 잘 보이지 않는 규모나 근래에 돈을 들여 세운 듯한 모습 등이 좀 거슬린다. 서원 강당의 크기에 비해서도 지나치게 커 부담스럽다.

 

 

구연서원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중종 때에 요수 신권이 이 계곡에 은거하면서 거북 모양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1540년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구연재를 세웠는데 숙종(1694년) 때에 구연서원으로 명명되었다. 신권, 성팽년, 신수이 세 분이 배향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철폐되었으며, 관수루와 강당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런데,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 이 세 분의 행적이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미미하다. 다만 이 분들의 후손들이 의논하여 구연서원에 배향하였다는 것과, 인조 때 사우 건립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물에 대해서는 제대로 다룬 것은 찾기 어렵고, 아래와 같은 정도의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신권(1501~1573)은 구암(龜岩) 이정(李楨), 갈천(葛川) 임훈(林薰)과 여러 날 학문을 강마하다가 더러는 시를 주고 받기도 하였다.

성팽년(1540~1594)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아버지가 죽자 학업을 그만두고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다, 그 효행으로 천거받아 아동을 가르치는 종9품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석곡문집>이 전하고 있다.

신수이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스승 이재(李縡)를 사사하면서 평생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후손이 수집하여 낸 <황고집(黃皐集)>이란 문집이 전한다.

 

 

구연서원 담장 밖에는 정려 둘이 서 있다. 신씨 가문의 효자각, 효열각이다.

 

 

 

 

 

정려를 지나면 뜻밖에도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널직한 야외무대가 나타난다. 거창연극제가 고요한 골짜기 안쪽에까지 파고든 모양인데, 그리 흔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거북 모양의 거대한 거북바위, 수승대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계곡 건너편으로 요수 신권의 호를 딴 정자, 요수정(樂水亭)이 보인다.

 

 

 

 

 

수승대(搜勝臺)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신수이와 친교가 깊었던 조영석이 바위에 칠언시의 형식으로 새겨 놓았다.

 

羅濟傳名愁送臺       신라 백제에서 전한 이름은 수송대요
樂水改名龜巖臺       요수 선생이 개명한 이름은 암구대며
退溪賜名搜勝帶       퇴계 선생이 내린 이름은 수승대요
遺風誦名樂水臺       유풍으로 노래하는 이름은 요수대이라.

 

수승대는 거북의 형상을 닮아서 흔히 거북바위라 불러왔다. 그래서 신권은 이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이 골짜기를 구연동(龜淵洞)이라 불렀으며, 후진 양성을 위한 서당을 구연재(龜淵齋)라 명명하였다.

 

지금은 수승대로 불리고 있는데, 이 이름으로 불리기까지는 수송대(愁送臺)로 불리었다 한다. 조선 말기의 대문장기 이건창의 <수승대기>에 의하면, 신라와 백제 시대에 양국의 사신을 이곳에서 전송했는데 근심을 이기지 못해 수송대(愁送臺)로 불렀다고도 하고 이 바위의 빼어난 경치가 근심을 보내게(잊게)하여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수승대란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머물던 중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수승대(搜勝臺)로 고칠 것을 권하는 시를 지어 갈천 임훈(1500~1584)에게 보내 주면서 불려지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갈천 임훈 자신은 퇴계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하는 뜻을 담은 시를 남기고 있다. 

 

'수송(愁送)의 뜻을 풀이하여 여러분에게 보인다'는 뜻의 '해수송의의시제군(解愁送意 以示諸君)'이란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花滿江皐酒滿樽     꽃은 강 언덕에 가득하고 술은 동이에 가득한데
遊人連袂謾紛紛    소매 잇대어 노니는 사람들로 어지럽구나.
春將暮處君將去    ;봄은 지려하는데 그대는 떠나려 하니,
不獨愁春愁送君     봄을 근심함이 아니라 그대 보내는 것이 시름일세

 

 

그리고 그는 "이때 퇴계 선생이 대의 이름을 수승(搜勝)이라 고치려 하였기에 이 시를 지어 해명한다.(時退溪先生, 改臺名搜勝, 故作此以解之)"라고 덧붙이고 있다. 

 

 

 

 

 

거북바위 둘레에는 곳곳에 마치 칼로 잘라낸 듯한 면석이 만들어져 유람을 온 옛풍류가들의 시와 이름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새겨진 무수한 인명에는 특히 신(愼)씨와 임(林)씨가 많은데, 마치 이 곳 수승대를 둘러싸고 요수 신권의 거창 신씨 후손과 갈천 임훈의 은진 임씨 후손들이 벌였던 가문 기싸움을 보는 듯해 흥미롭다.

 

이건창의 <수승대기> 끝 부분에 두 가문의 기싸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수승대는 시냇물 속에 있는 하나의 큰 바위일 뿐이니, 전택이나 동산처럼 누구의 소유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소송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기뻐하지만, 두 집안의 비루함은 민망히 여긴다.

 

 

 

 

 

거북의 앞발쯤에 해당하는 암벽면에는 '수승대'와 '수송대'란 이름을 나란히 크게 새기고, 그 아래에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라는 이름과 함께 퇴계 이황이 지어보낸 시가 새겨져 있다.

 

 

 

 

 

퇴계 이황이 보낸 시의 제목은 '기제수승대(寄題搜勝臺)', '수승대라는 글제를 보내다' 

 

搜勝名新換    수승으로 이름을 새로 바꾸어
逢春景益佳    봄을 맞으니 경치가 더욱 아름답네.
遠林花欲動    먼 숲에 꽃이 일렁일 듯하고
>陰壑雪猶埋    응달 골짜기 눈이 아직 덮여 있네.
未寓搜尋眼    찾고자 하는 눈길 부치지 못하나
唯增想像懷    상상의 그리움 멀리서 더 간절하네.
他年一尊酒    훗날 한 동이 술을 가지고 가서
巨筆寫雲崖    큰 붓으로 구름 낀 바위에 쓰겠네.

 

 

흥미롭게도 수승대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사연을 적은 기록이 퇴계의 문집에도 남아 있다.

 

安陰古縣, 有石臨溪, 俗名愁送臺. 泉石最勝, 余於是行, 以不暇往見爲恨. 亦嫌其名之不雅, 欲改爲搜勝, 諸公皆肯之.

안음 옛 고을에 바위가 개울가에 임해 있는데 속명이 수송대이다. 물과 바위가 매우 빼어나다. 나는 이번 행차에서 겨를이 없어 가보지 못하니 한스럽다. 또한 그 이름이 우아하지 못한 것을 싫어하여 수승이라 고치라고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수긍하였다.- 퇴계선생문집 별집 1권

 

 

 

물을 건너는 곳에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무지개 돌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수승대를 멋지게 묘사한 글로는 조선 말기의 대문장가 이건창 선생의 <수승대기>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덕유산이 동남쪽으로 흘러 영취산이 되고, 서남쪽으로 뻗어 금원산이 되었다. 물이 두 산에서 나오는데, 한데 모여 월성계곡이 되고, 다시 갈천이 된다. 수십 리의 계곡이 모두 맑은 물과 넓은 반석으로 되어 있다. 갈천에서 동쪽으로 몇 리를 내려오면 황산이 된다. 산색이 모두 흰빛인데, 물이 웅덩이에서 멈춘 곳에는 돌까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어 그 모습이 한 번 변한다. 여기에서 다시 1리 더 내려가면 여러 번 굽어 도는 물길이 여울이 되었다가, 폭포가 되기도 하고 못이 되기도 하는데, 바위는 다시 흰색으로 돌아온다.

산언덕과 바위골짜기가 송림 속에서 빛을 감추고 숨어 있는데, 계곡 위에 드러나 있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이 대이다. 대는 시내 한 가운데 있는 큰 바위로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며, 위에는 백여 인이 둘러앉을 수 있다. 이곳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원근의 산봉우리들이 묘하게 둘러서서 예쁜 자태를 뽐내지 않는 것이 없는데, 전후좌우에서 공손히 경의를 표하며 우러러 보고 있다.

상류 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옥처럼 영롱하기도 하고 명주처럼 찬란하기도 한데, 네모나고 둥글고 굽고 곧은 것이 날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여, 그 묘한 모양이 극진하지 않음이 없다. 맑고 수려함이 온축되어 있고, 그윽하고 미묘함이 끝없이 이어져, 그 무엇으로도 다 형용할 수 없을 듯하다.

대 위에는 백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패인 구멍에서 자생한 것이다. 사방의 모서리에는 담처럼 돌을 쌓아 놓아 대를 만들고, 대의 옆면에는 '수승대(搜勝臺)'라는 세 자와 퇴계의 시를 새겨놓았다. 그리고 또 '퇴계명명지대(退溪命名之臺)'와 '갈천장구지소' 등이 새겨져 있다. 이 대 북쪽 시냇가에 정자가 있는데, '요수정(樂水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요수'는 처사 신권의 호이다. 임갈천(林葛川)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거했는데, 퇴계가 그렇게 호를 지어주었다.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한 선비문화는 자연이 쉼터인 동시에 학습 장소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계곡 수승대는 구연서원과 같은 공간에 자리함으로써 더욱 빛난다.

 

거북바위 앞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가 있다. 선비들이 모여 앉아 풍류를 즐기는 곳. 거기에는 술을 넣어두는 오목한 웅덩이 모양의 장주갑(藏酒岬)이 있고, 먹을 가는 벼룻돌 연반석(硯盤石)이 있으며, 붓을 씻는다는 긴 바위 도랑 세필짐(洗筆㴨)이 있다.

     

 

 

 

 

계곡 건너편 언덕 울창한 솔숲 속에는 요수정(樂水亭)이란 정자가 있다.

 

요수 신권이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으로 거북바위와 너럭바위, 그 앞으로 흐르는 담소, 그리고 정자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화를 이뤄 구연계곡은 빼어난 절경이 된다.

 

 

 

 

 

'요수(樂水)'는 '요산요수(樂山樂水)'로 표현되는 공자 사상의 핵심이다.

 

산수간에 우유자적하는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인자요산 지자요수(仁子樂山 知子樂水)라는 논어의 구절, 거기에서 따온 이름인 '요수정(樂水亭)'은 건너편에 마주보는 구연서원의 '관수루(觀水樓)'와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수승대에는 요산요수를 구현하는 욕기암(浴沂巖), 풍우대(風雩臺), 영귀정(詠歸亭) 등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들은 모두 논어에서 증자의 아버지 증점(曾點)이 "늦은 봄 봄옷이 차려지면, 어른 오륙 인과 아이 육칠 인으로 기수에서 목욕하고(浴乎沂),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風乎舞雩),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詠而歸)" 하니 공자께서 찬탄하시며 나도 너와 함께 하겠노라."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주자는 이러한 증점의 학문에 대하여 천지만물과 함께 위아래로 흘러 합일하는 경지로 평하였다.

 

 

 

 

 

맑은 물이 시원스레 흐르는 계곡, 거북바위 수승대와 구연서원, 정자와 솔숲이 어울린 계곡은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계곡은 국민관광 휴양지로 지정되고, 야영장과 수영장, 눈썰매장, 청소년 수련 시설 등 각종 놀이시설이 들어서면서 호젓한 계곡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여기에 국제연극제가 이 골짜기에까지 파고들면서 현대식 극장과 야외무대가 자연계곡을 잠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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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승대를 노래한 시

▼ 요수 신권

爲掃臺邊路(위소대변로)     대 옆길 쓴 것은
遮望華駕臨(차망화가림)     친구 맞기 바란 까닭
詩來人不至(시래인부지)     시는 보내 왔는데도 사람은 아니오니
無意獨登臨(무의독등림)     무심히 혼자 올라 멍하니 바라보네.
林壑皆增采(임학개증채)     언덕엔 채색이 더해지는데
臺名肇錫佳(대명조석가)     대 이름 바로 밝혀 아름답구나.
勝日樽前値(승일준전치)     좋은 날에 술두루미 앞에 차리고
愁雲筆底埋(수운필저매)     구름 같은 수심을 붓끝으로 무르려네.
深荷珍重敎(심하진중교)     진중한 가름침 깊은 짐이 되어도
殊絶恨望懷(수절한망회)     못만난 회포가 한이로구나.
行塵遙莫追(행진요막추)     바라던바 헛수고로 딸치 못하고
獨倚老林崖(독의로림애)     나 홀로 언덕에 노닐어 보네.


▼ 석곡 성팽년

華仗春俱至(화장춘구지)     꽃이 피어 봄 이르니
龍門節正佳(용문절정가)     용문리가 정녕 아름답구나.
溪肥磯半沒(계비기반몰)     시냇물이 불어나니 강변잠기고
山黑雨全埋(산흑우전매)     산록은 비에 젖어 어둡기만 하구나
石帶詩仙子(석대시선자)     반석에는 시선들이 둘러앉았고
杯寬野客懷(배관야객회)     나그네 술잔에는 회포도 너그럽네.
莫愁雲日暝(막수운일명)     구름 가린 어두움을 탓하지 마오.
餘照在層崕(여조재층애)     비탈에 남은 햇볕 있지 않는가.


▼ 삼연 김창흡

搜勝臺堪倚(수승대감의)     우뚝한 수승대가 하늘에 기대섰고
連莚水石長(연연수석장)     잇닿은 수석 경치 길이 뻗혀 장관이네.
雨兼豊波意(우겸풍파의)     비 오자 바람 부니 물너울이 일어나고
晴又日沈光(청우일침광)     날 개이자 밝은 햇볕 물에 잠기네.
照壁憧憧燭(조벽동동촉)     절벽 비춘 촛불 빛 흔들거리고
臨溪撼撼床(임계감감상)     냇가에 다다르니 평상이 흔들리네.
十年猿鶴夢(십년원학몽)     10년 동안 원학동을 꿈 꾸어오다.
輸了一朝忙(수료일조망)     하루아침 쫒긴 생각 떨쳐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