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 구형왕릉과 왕산사지, 유의태 약수터

모산재 2009. 2. 22. 23:42

 

산청읍에서 북서쪽 길을 잡아 고갯길을 굽이굽이 타고 넘어 30릿길을 지나면 금서면 면소재지가 나타난다. 면소재지 도착하기 직전에 길 왼쪽으로 넓게 조성된 커다란 전통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덕양전이다.

 

덕양전은 가락국 10대왕 양왕(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서 왼쪽 산길을 따라 약 1킬로미터쯤 올라가면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서 구형왕릉이 나타난다.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구형왕릉이 있는 산을 왕산이라고 하는데,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무덤이 있어서 불리는 이름이다.

 

그러나 아직도 구형왕릉으로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구형왕릉으로 전해진다.'는 뜻의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며 사적 214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가락국 10대 임금인 구형왕은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 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그리고  김수로왕 별궁이었던 이곳 왕산 골짜기의 수정궁으로 옮겨 산 지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시호를 양왕(讓王)이라 하였는데 이는 신라에 나라를 선양한 것과 관계가 있으며, 그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이란 이름도 이 시호와 관련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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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형왕(仇衡王)

 

562년 음력 9월 신라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오니 왕이 친히 맞서 싸우려 했으나, 군사적 열세로 대항하여 싸울 수 없어,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上孫) 졸지공(卒支公)등은 신라로 들어가 항복을 하였다. 그가 신라에 항복할 때 동생 김탈지는 항복에 반대하고 금관경에 남아 있었다.

 

구형왕의 항복 연도는 532년이라고도 하고 562년이라고도 하는데,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가락국기’편은 두 가지 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 구형왕의 차남 김무력(517~579)은 부왕 구형왕을 따라 신라 진골에 편입되었으며 신라 관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백제 성왕의 목을 베는 성과를 올렸고 관직은 각간에 이르렀다. 김유신의 할아버지였으며, 첫 부인 박씨는 법흥왕비 보도부인의 동생으로 법흥왕의 동서였다.

 

 

 

 

구형왕릉은 자연석을 모아 피라밋 형식으로 쌓다가 봉우리를 동그랗게 만들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지만 지금은 왕릉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일부 학자들은 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180여 년 전에 발견된 왕산사기(王山寺記)에 의해 왕릉임이 증명되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았던 것은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음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왕산이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한 기록을 근거로 왕릉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산청현 유지>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 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 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

 

 

돌무덤의 앞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으며 그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는 문인석· 무인석· 석수가 각각 1쌍씩 있는데, 이들은 모두 근래의 시설물들이다.

 

 

 

 

 

이 무덤은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지만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구형왕릉을 나와서 왔던 길을 조금만 내려서면 왕산으로 오르는 임도가 나타난다. 임도를 따라 오르면 수로왕의 별궁이자 구형왕이 마직막으로 생을 보냈던 왕산사터(수정궁터)를 만날 수 있다.

 

사람들이 이 등산로를 오르는 이유는 유의태 약수터라고 전해지는 샘터 때문인데, 나는 그보다는 수정궁터가 어떤 모습일지가 더 궁금하다. 어째서 이 오지 높은 산속에 궁터가 있단 말인가.

 

 

 

 

 

아직은 차가운 겨울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오전의 따스한 햇살을 받고  네발나비가 날개짓하며 나타났다. 

 

 

 

 

 

임도이자 등산로인 길을 따라 20여 분, 산굽이를 몇 번 돌아서 오르막길인 곳에서 수정궁터라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유의태 약수터는 200여 미터쯤 더 오르면 된다고 하는 지점이다.

 

임도 오른편 숲 언덕 위로 올라서서 조금 들어가자 몇 백 평이나 될까 싶은 넓은 터가 펼쳐지는데 그곳이 바로 왕산사터이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별궁(수정궁)이기도 했던 이곳에서 나라를 신라에 넘기고 만 구형왕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몇 개의 부도. 항아리형으로 된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주변의 경개가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수도 없는 산비탈, 화전민이라면 한두 채 집을 짓고 살 만하다 싶은 좁은 공간이다. 한눈에 왕산사터는 군주가 거처할 공간으로는 무척 좁고 답답해 보이는 곳이다. 궁궐터라 해서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어서 적이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이 왜 이렇게 외지고 깊고 높은 산 속에 별궁을 지었을까.

 

 

 

 

 

숲이 우거진 산 속에 터만 남아 쓸쓸함을 더하는 왕산사터. 하지만 200년 전까지만 해도 왕산사는 온전히 존재했던 절인데 당시 법당 들보 위 나무궤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들이 나왔고 명승 탄영의 왕산사기 등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구형왕릉이 왕릉으로 확인되게 된 것이다.

 

구형왕릉이 자연석 돌무덤이었던 것처럼 이곳 왕산사터에 남아 있는 돌들도 자연석 덩어리밖에 보이지 않아 궁터에 대한 나의 상상력은 여지없이 배신을 당하고 만다.

 

 

 

 

 

왕산사는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왕대암으로 전하여지고, 175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왕대암이 폐사되고 왕산사가 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어, 왕산사지는 1500년대에 이미 존재한 것으로 확인됐다.

 

가야문화연구소의 지표 조사 결과, 이곳에는 6개의 건물터, 추정 문터, 추정 계단시설, 비좌, 부도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 많은 양의 기와 조각과 그릇 조각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시 임도로 되나와서 보니, 임도 왼쪽으로도 건물터로 여겨지는 평평한 넓은 터가 보인다. 잡목들이 자라나 있긴 해도 꽤 커다란 건물이 서 있었던 직한 공간이다.

 

 

 

 

 

약수터도 마저 보고 가자고 가파른 골짜기를 따라 좀더 올라 본다. 천하 명의 유의태가 약수로 사용했던 물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 있는가.

 

 

막상 도착해보니 계곡에 자리한 유의태약수터는 물 한 방울 나지 않은 바닥만 드러내고 있다. 다만 우물이 아닌 다른 쪽에서 쫄쫄 흘러 나오는 물을 구경할 수 있을 뿐이다. 겨울 가뭄 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의 가뭄에도 물이 마를 정도라면 명의 유의태를 끌어들인 약수터 이름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이 헛되다고 할 정도이다.

 

텔레비전 사극에서 명의 허준의 스승으로 나와 주목을 받았던 유의태는 실은 허준보다는 훨씬 후대의 인물, 유이태(劉爾泰)라고 한다. 유이태는 경남 거창 위천 사람으로 외가가 있는 산음(지금의 산청군 생초)으로 옮겨와 그곳에서 의술활동을 펼치다가 숙종 때에 어의를 지낸 인물이다. 특히 숙종 때 두진(痘疹=천연두)·마진(痲疹=홍역) 등의 병이 크게 전염되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는데, 유이태는 이에 자극받아 <마진경험방>을 토대로 하여 예방·치료에 대한 의학전문서인 <마진편>을 펴냈다. 관직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전념하였으며, 의술이 신기에 가깝다 하여 중국의 명의 편작에 비유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 유이태 외에 산청군 신안 출신 서자로 선조 때 허준 선생의 스승인 유의태라는 사람도 실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산청군은 이곳에 유의태 약수터를 관광상품화한 듯 보인다.

 

 

▼ 말라븥은 유의태 약수터

 

 

 

 

▼ 산청군에서는 거창 사람인 숙종 때의 어의 유이태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인물인 산청 신안 사람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이라고 보고 있다.

 

 

 

 

 

 

약수터에서 정상까지는 4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는데 시간에 쫓겨 그냥 돌아선다. 거대한 바위들이 모여 암봉을 이루고 있는 정상에 서면 산청읍 일대와 경호강 엄천강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고 지리산 천왕봉에서 웅석봉까지 길게 뻗은 산자락을 조망할 수 있다는데...

 

 

 

1킬로미터 남짓한 길, 덕양전이 있던 곳에서 내려서 걸어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형왕릉 위패를 모신 덕양전도 돌아보고 걸어 오르다보면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산청으로 낙향한 고려 충신 민암부 선생을 기려 만든 망경대와 망경루가 나타나고, 김유신이 활을 쏘았다는 사대석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타나는 가락국 유적비 등...

 

차를 타고서 주마간산격으로 볼 것만 보는 여유 없는 여행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