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 공주 마곡사로 향한다.
가는 길, 조선생의 고향 가까운 곳에 있는 익산 선바위성당을 잠시 들른다. 멀리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담한 산기슭에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황산 나루터에 상륙한 것(1845년)을 기념하기 위해 1906년에 건립한 이 성당은 서양식 성당 건축 양식에 동양식 기와를 얹은 지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15년 전쯤 청양 장곡사를 둘러 본 일이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그곳을 한동안 마곡사로 착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곡사 참 풍광 좋고 괜찮은 절이다."고 칭송하는 소리를 들으며, '글쎄, 그런 정도가 아니었는데...'라며 내심 의아해하지 않았던가. 참 터무니 없는 기억의 혼동! 어쨌거나 내가 가본 곳이 마곡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후 마곡사는 꼭 가봐야 할 1순위인 절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동안 내소사 같은 절은 예닐곱 번이나 찾았으면서도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마곡사는 한번도 찾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 이 여름 예정에 없이 마곡사를 찾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봄 풍광이 아름다워 '춘마곡 추갑사(春麻谷秋甲寺)'란 말이 있다는 마곡사를 한여름에 찾으니 그 풍광 찾을 수 있으려나... <택리지>나 <정감록> 등에서 난세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았다는 이 계곡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병화도 비켜간 곳이라고 하는데, 절 입구의 골짜기에는 늦여름임에도 피서 인파들이 붐비고 있다.
시원스럽게 흐르는 계곡을 오른쪽에 두고서 오르는 길은 상쾌하다.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계곡 건너 숲너머로 절의 전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멀리 계곡을 건너는 다리 하나가 그림처럼 나타난다. 나중 확인해보니 이름은 극락교.
다리 왼쪽(남쪽)에는 해탈문과 천왕문이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북쪽)에는 절의 본당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다. 절의 경역을 둘로 나누며 휘감아도는 이 계곡을 태화산 이름을 따 태화천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태극천은 그야말로 태극 모양으로 돌아흐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따라서 이런 태극 모양의 지형은 예로부터 '산태극 물태극(山太極 水太極)'이라 하여 '삼재팔난불입처(三災八難不入處)'의 명당으로 여겨져 왔던 모양이다. 임란과 6.25전란도 그래서 피해갔던 것일까.
이런 명당이 신라 말 마곡사가 폐사되면서 200여 년간 도둑 떼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마곡사를 중창하면서 저항하는 도둑떼들을 신술로 호랑이를 만들어 물리치고 대가람을 이룩하였는데 당시의 전각은 지금의 배가 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고, 병자호란이 지난 뒤에 중수하였지만 1782년 큰 불로 500여 간의 전각들이 다 타버리고 지금 남아 있는 당우들은 대부분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 세운 것들이라고 한다.
절 입구에는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다.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를 봉헌한다는 망발을 하던 대통령이 개신교인들을 노골적으로 권력 주변에 배치하고 부산 사찰 다 무너지라는 부흥회에 축사를 하는 한편, 대통령이 다니던 소망교회의 목사는 대통령이 주님의 아들이라고 발언하고 경찰청장은 전국경찰복음화 운동에 노골적으로 나서고 국가교통정보에 사찰은 빼버리고 교회 성당만 표기하더니, 급기야는 조계종 총무원장의 차량을 세우고 트렁크까지 수색하는 지경까지 이르러 전국의 불심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전란까지 피해갔던 이 골짜기가 배타적인 종교 편향에 빠진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불자들의 분노로 펄럭이고 있는 것이다.
이 작은 다리를 건너면 바로 절의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해탈문. 이곳으로부터 극락교에 이르기까지 해탈문과 천왕문이 중심 진입로를 이루고, 그 왼편으로 영산전 흥성루 매화당 수선사, 그리고 조금 떨어져 명부전과 국사당 등의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왼쪽 담장 안으로 일부 보이는 건물이 흥성루인데 그 안쪽으로 마주하고 있는 건물로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은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시간에 쫓겨 돌아보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것이 해탈문.
다른 절에서라면 '인왕문' 또는 '금강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전각에 해당된다. 절의 수문장이라고 할 인왕(또는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아마도 이 문을 지나면서 세속의 먼지를 깨끗이 털어내고 해탈의 경지를 느끼라는 뜻이리라. 해탈문 안 통로 양쪽에는 금강역사상과 보현 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입을 앙다문 채 눈을 부릅뜨고 주먹 쥔 팔을 들어올리고 있는 인왕(금강역사)의 모습은 근엄하기는 하지만 무섭다기보다는 다소 해학적이어서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일본의 절에서 보이는 고약한 인상의 인왕과는 질이 다르다. 장차 붓다가 될 보살이자 아촉불의 현현(現顯)이라는 금강역사는 힘만 센 수호신이 아니라 지혜의 불법 수호신이다. (금강이란 말이 ‘지(智)’를 가리키지 않은가)
한국 사찰에서는 대개 왼쪽에 밀적금강(密迹金剛), 오른쪽에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서 있다. 밀적금강은 손에 금강저를 들고 항상 부처를 호위하는 야차신이고, 나라연금강은 코끼리보다 100만 배나 힘이 세면서도 신성한 지혜를 가진 신이다. 우락부락하지만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커다란 인왕 곁에는 귀엽기 짝이 없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상이 놓였다.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인데 '묘길상(妙吉祥)'이나 '묘음보살(妙音菩薩)'이라고도 한다. 문수보살은 석가가 열반한 후 인도에서 태어나, 만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불법의 참다운 이치를 깨닫는 지혜를 의미하는 반야(般若)의 도리를 널리 알렸다고 하며, 반야지혜의 상징으로 표현되어 왔다. 반야경(般若經)을 모아 편찬한 보살로도 알려져 있어 경전을 손에 쥔 모습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다.
맞은편에 있는 인왕은 입을 길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나 살짝 긴장된 눈빛에 근심과 연민이 가득해 보인다. 그래서 인자함이 느껴진다. 부처를 호위하는 힘이 단순히 주먹이라는 물리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비라는 것에서 나오는 것임을 저 표정이 말해 주는 듯하다.
그 옆에는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상이 보인다.
그런데 보현동자상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유행하는 도상이지만, 우리나라의 불상 및 불화에서는 찾기 어렵다고 한다. 다만 이처럼 특히 인왕문(또는 금강문)에 인왕과 함께 동자상으로 조성되는 예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연화좌에 앉아 연꽃을 쥐는 형상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현보살은 부처의 오른쪽에서 보필하는 협시보살로 실천행을 강조하는 성격을 지닌다. 화엄경에는 보현보살의 10대원(十大願)이 설해지고 있으며, 이 열가지 원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보살이 보현보살이다. 보현보살은 또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해탈문을 지나자마자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이 나타난다.
사천왕은 수미산 정상의 제석천(帝釋天)을 섬기며, 불법(佛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동쪽의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을 가리킨다.
비파를 든 지국천왕(동), 칼을 든 증장천왕(남)
용과 여의주를 든 광목천왕(서), 탑을 든 다문천왕(북)
이들 사천왕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맡은방위 | 이름 | 들고 있는 물건 | 피부색 | 얼굴 특징 | 서 원 | |
오른손 | 왼손 | |||||
동 | 지국천왕 | 비파 | 청 | 다문 입 |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리라 | |
남 | 증장천왕 | 칼 | 적 | 성난 눈 | 만물을 소생시키리라 | |
서 | 광목천왕 | 용 | 여의주 | 백 | 벌린 입 | 악한 자에게 고통을 주어 불법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리라 |
북 | 다문천왕 | 탑 | 흑 | 이가 보임 | 어리석음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중생을 인도하리라 |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났으니 이제는 부처님 계시는 법계로 향할 차례...
※ 마곡사에 대하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로 현재 충청남도 70여 개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640년(신라 선덕여왕 9)에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창건한 절로 여러 차례 화재가 있었으나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 지눌(知訥)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는데, 자장이 절을 완공한 후 설법했을 때 사람들이 '삼(麻)'과 같이 빽빽하게 모여들었다고 해서 마곡사라 했다는 설과 신라 무선대사가 당나라 마곡보철(麻谷普澈)선사에게 배웠기 때문에 스승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마곡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 절은 고려 문종 이후 100여 년간 폐사되어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으나 1172년(명종 2)에 왕명을 받아 보조국사가 그의 제자인 수우(守愚)와 함께 왕으로부터 받은 전답 200결(160만 평)에 중창했다. 당시 사찰의 규모는 지금의 2배가 넘는 대가람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뒤 1650년(효종 1) 주지인 각순(覺淳)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옛 모습을 찾았으나 1782년(정조 6) 다시 큰 화재로 영산전과 대웅전을 제외한 1051여 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대광보전은 1788년(정조 12)에 재건되었고, 영산전과 대웅보전은 1842년(헌종 8)에 개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항일독립운동가 김구가 일본 헌병 중위를 죽이고 잠시 피신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이 절의 가람배치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대광보전(보물 제802호)·5층석탑(보물 제799호)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된 특이한 형식이며 그 주변으로 영산전(보물 제800호)을 비롯하여 응진전·명부전·국사당·대향각·흥성루·해탈문·천왕문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이밖에 중요문화재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보물 제269호),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보물 제270호), 석가모니불괘불탱(보물 제1260호), 동제은입사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 동종(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 등이 있다. (브리태니카백과사전)
※ 태화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마곡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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