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대학병원 담장 밑에 핀 봄까치꽃

모산재 2008. 2. 27. 22:09

 

 

응급실 의자에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담장 밑에 환하게 핀 큰개불알풀 꽃송이들을 발견한다.

 

열흘이나 지나다니면서도 보지 못했던 꽃인데...

 

 

 

 

 

 

 

다시 병실을 들러 배낭에 넣어 두었던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서 정성껏 담아 본다.

 

새끼손가락의 손톱보다도 훨씬 작은 이 하늘빛 꽃송이들, 

내 지친 심신을 다 헹구어버릴 듯한 맑은 표정...

 

 

 

 

 

 

 

저 파릇파릇한 기지개, 저 환한 불꽃송이들!

 

꺼져가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모두 이처럼 깨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골짜기의 논과 밭에, 그리고 산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 져 나르던 강철 두 다리는 젓가락처럼 말라 버렸고, 앙상한 두 어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떨고 있다. 그렇게 누우신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너무도 차분한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 이제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하나 보다, 떨리는 마음으로 황급히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위기는 넘겼지만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야 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끝이 잘 보이지 않는 간병에 심신은 녹초가 되는 듯하다.

 

 

 

 

간병인에게 맡기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봄을 찾아 헤맨다. 남한산, 대모산을 오르내리며 눈 속에서 풍년화, 앉은부채 꽃소식을 살피고, 잘 듣지 않던 음악도 들어본다.

 

 

비발디의 '사계'에 노랫말이 놓여 있는 줄을 처음 알았다.

 

 

아름다운 봄이 왔다.
새들은 즐거운 봄맞이 노래를 부르고
시냇물은 부드러운 미풍을 타고
졸졸 흐른다.
검은 망토를 두른 하늘과
천둥과 번개는 다가올 폭풍을 예고한다.
폭풍우가 그친 후
다시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
꽃들이 만발한 풀밭에서
나뭇잎의 부드러운 속삭임 속에 목동은 잠이 들고
그 곁에는 목동을 지키는 충직한 개 한 마리.
통나무 백파이프의 흥겨운 가락이 울리면
요정들과 양치기들이 즐겁게 춤을 춘다.
봄이 찬란하게 다가왔을 때.
('봄' 악장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