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곽, 숙정문 지나 백악마루 넘어 창의문까지
2007. 12. 09
저기~ 원래 일정대로라면
전라남도 목포 앞바다에 그림처럼 떠 있는 한적한 섬,
노을 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젊은 연인들이 즐겨찾는다는 외달도에 와 있어야 하는 시간,
우리는 혜화동을 지나 서울과학고등학교 뒤쪽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꽃들이 사라지고 낙엽조차 다 져버린 휑한 겨울에
금쪽 같은 '쉴토' 낀 2박3일의 휴일을 찬 바람 맞으며 다 써 버리고 싶지는 않아
이렇게 당일치기로 북악산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합의본 것입니다.
30여 년 전 김신조 등의 무장공비 청와대 침투사건으로 닫혀진 북악산,
작년 개방 이후 오늘 처음으로 구경하러 나섰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참 좋습니다.
햇살은 명랑하고 공기는 시베리아산이 아닐까 싶게 청량합니다.
서울과학고 뒷울타리를 끼고 성곽으로 오르는 길이 바로 이어집니다.
울타리 철망에 조랑조랑 달린 노박덩굴 열매들은
노란 가종피와 붉은 씨앗의 아름다운 색감이 벌써 바래 버렸는데,
기특하게도 길가엔 볕살을 쬐며 개쑥갓이 희미한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초입의 성곽 풍경입니다.
이즈음의 가죽나무 모습입니다. 암수딴그루인데, 이 녀석은 열매를 잔뜩 달았으니 암나무이지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은행나무, 내년 봄에나 저 열매는 땅을 만나게 될까요.
아직까지는 자유개방구간입니다.
표지판에 보이는대로 말바위안내소에 가면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증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동하는 방향은 오른쪽 끝 서울과학고 쪽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말바위전망대-숙정문-촛대바위-곡장-청운대-백악마루-돌고래쉼터-창의문까지...
※ 서울성곽 안내도 (문화재청 자료)
벽오동 열매입니다. 이름은 오동이지만 오동나무와는 핏줄이 다릅니다.
물론 열매 모양도 아주 다르지요.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은 둘레가 약 18㎞가 넘는 커다란 성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본래의 모습을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1975년의 조사에 따르면 도성의 총 연장은 18,127m인데
이중 6,703m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 11,424m는 훼손된 상태였으니
온전히 남은 구간은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서대문과 동대문 부근의 성곽이 잘려나가기 시작하여
이듬해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남대문 부근의 성곽이 헐리게 되고
일제강점기에는 혜화문(동소문)과 서대문이 헐리며 평지의 성곽은 모두 사라집니다.
광복 후 혼란기에도 또 다시 성곽은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1975년부터 1981년까지 7개 구역으로 나누어 복원공사가 이루어졌지만
남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구간과 광희문에서 동대문까지 평지의 성곽은
흔적조차 찾을 수도 없어 원래의 모습을 찾을 수나 있을는지...
어쨌거나 문화재청은 2006년 복원사업 계획을 세우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을 목표로 추진해 나간다고 합니다.
물오리나무는 벌써 수꽃이삭을 주렁주렁 달았습니다.
저 상태로 겨울을 나고 봄을 맞아 꽃가루받이를 하겠지요.
팔각정 너머로 북한산 보현봉 꼭대기가 살짝 보입니다.
돌아본 말바위전망대입니다.
그리고 눈덮인 성가퀴 저 너머 멀리 숙정문이 눈으로 들어옵니다.
서울 성곽은 태조 때 토성으로 쌓은 것을 세종 4년(1422)에 석성으로 개축하고
300여 년 뒤 숙종 35년(1709)에 대대적으로 개축합니다.
돌을 가로 세로 2자(60㎝) 크기로 다듬어 쌓고 성가퀴(女墻)도 이때 마무리가 됩니다.
영조 19년(1743)에도 손을 봅니다.
드디어 숙정문(肅靖門)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성곽 4대문 중 북문에 해당하는 문으로 숙청문(肅淸門)으로 불리던 것을 중종 이후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규모가 4대문 중 가장 작은데 소문의 격식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산허리에 있는 문이라 다니는 사람이 적어서 그랬을 것인데, 대신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문을 지키는 출직호군(出直護軍)의 수가 대문은 30명, 소문은 20명인데 혜화문은 30명이었다니까요.
서울의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이 있습니다.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1396년 도성을 쌓는데 이때 성문의 이름을 지은이는 정도전입니다.
그는 통치 이념인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맞추어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 지었으나 북문은 이에 따르지 않고 숙청문(肅淸門)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쓸모가 별로 없던 숙정문은 태종 때(1413) 폐쇄되는데, 풍수지리상 경복궁의 좌청룡 지맥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조선 초 숙정문을 1년에 세 번만 다녀오면 그 해의 액운이 없어진다는 속설에 한양의 부녀자들은 숙정문 나들이를 뻔질나게 한 모양입니다. 북문 밖에는 뽕나무가 많았는데 부녀자들이 드나드는 이곳이 양반들의 눈에는 그리 건전하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 여인들이 모여드는 곳에 "사내 못난 것은 북문에서 호강 받는다."는 속담도 생길 정도로 사내들이 꾀여 들자 '음풍(陰風)이 들어온다’는 구실을 들어 북문을 닫아버렸다는 설이 있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속전된 바로는 북문을 열어두면 성 안에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 불어댄다 하여 이를 폐했다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상중하간지풍이란 부녀자의 풍기문란을 뜻합니다.
오래된 성곽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부싯깃고사리,
여름이 지나면 잎이 마르는데 부싯돌 불을 붙이는데 쓰였다고 합니다.
자생지 훼손으로 지금은 만나기 쉽지 않은 귀한 종입니다
이것은 바위채송화일까요...
숙정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촛대바위가 나타납니다.
일제가 북한산의 기맥을 끊는다고 쇠말뚝을 박은 곳이라고 합니다.
바위 위 쇠말뚝을 뽑은 자리에는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촛대바위에 오르니 흘러내리는 능선에 선바위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선바위는 지금도 부처님과 같은 신성한 대상물로 숭배받는 바위인데,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있는 형상을 닮았습니다.
이 바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쌓을 때 당시의 문신이었던 정도전과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로 크게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합니다. 만일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면 불교가 왕성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문신들은 힘을 못쓰고, 성 밖에 두면 반대로 승려가 힘을 못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태조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어느 날 큰 눈이 내립니다.
이튿날 아침 한양의 안쪽은 눈이 녹은 반면에 바깥쪽은 여전히 녹지 않고 하얗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눈 녹은 선을 따라 성곽의 선을 그었는데, 결국 바위는 성 밖으로 밀려났다 합니다. 숭유억불이란 운명이 여기서 결정된 것일까요...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가 근근히 버티고 있습니다.
드디어 꼭대기 성의 굽은 담인 곡장(曲墻)에 올랐습니다.
건너다보이는 북악산 백악마루로 이어지는 성의 풍경이 보기에도 시원스럽습니다.
오른쪽 저 멀리 인왕산으로 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멀리 마침 환하게 내리는 햇살에
보현봉, 문수봉, 승가봉, 사모바위, 비봉,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비봉능선이 드러납니다.
비봉은 진흥왕순수비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 성벽 축조의 시대별 차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성곽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성곽은 태조 때의 축조와 세종, 숙종대의 대대적인 수축 등 세 차례의 축조공사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현재도 이 태조, 세종, 숙종 때 만들어진 성곽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태조 때의 성곽은 1척 정도의 다듬어지지 않은 네모 모양의 작은 돌들을 불규칙하게 쌓았으며 벽면은 수직인 상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세종 때 축조된 부분은 2x3척의 긴 네모 모양의 다듬은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래 부분은 비교적 큰 돌로 그리고 위 부분은 작은 돌로 쌓았았는데, 이 때 쌍은 성은 성벽의 중앙이 밖으로 약간 튀어나와 있습니다.
숙종 때의 성곽은 가로 세로 2척 크기의 정방형 모양의 돌들을 정연하게 쌓아 간격도 일정하고 벽면도 수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태조 때의 성곽이고,
이것은 숙종 때의 성곽이겠지요.
이 성벽에는 두 가지 모습이 드러납니다.
왼쪽 가까운 곳은 태조 때의 조잡한 자연석, 왼쪽 대부분은 숙종 때의 반듯한 장방형의 돌로 쌓았지요.
돌아본 모습입니다.
멀리 보현봉이 보이고, 가까이는 곡장과 팔각정이 있습니다.
다시 비봉능선입니다.
청운대에서 내려다본 경복궁 전경(당겨 잡은 모습)
공사 실명제를 도입한 성벽공사
1396년(태조 5) 1월부터 시작하여 49일간 지속되었던 공사는 각 도로부터 동원된 인부는 11만 8,000여 명으로 세밀한 계획을 세워 공사를 진행했는데, 공사의 완벽을 기하기 위하여 이중 삼중의 책임자와 감독자를 두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방법으로 성벽 바깥쪽 돌에 감독자의 출신지와 성명 등을 새기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도를 계승하기만 했어도 오늘날의 그 수많은 부실공사와 그로 인한 참혹한 사고와 손실들은 없었을 것을...
가죽나무 열매
청가시덩굴의 까만 열매
드디어 백악마루에 올랐습니다.
시내 쪽으로는 시야가 제대로 트이지 않고,
바위 위에 올라서보니 멀리 북한산 비봉능선만 시원스럽게 보입니다.
멀리 흘러내리는 북한산 비봉능선 봉우리들
백악마루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길로 이어집니다.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길, 돌고래바위
마침내 창의문(彰義門)에 도착합니다.
가파른 산성길을 다 내려선 지점인 서울의 북서쪽,
세검정 근처에 있는 북소문으로 '자하문'이라고도 부릅니다.
뜻은 '옳은 것(의)을 밝게 드러나게(彰) 하는 문'인데,
4소문 중 유일하게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문입니다.
돌로 쌓은 홍예(虹霓)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는데
북문인 숙청문이 늘 닫혀 있어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이곳으로 왕래하였다고 합니다.
인조반정 때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어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揭板)이 있답니다.
그리고 문루 양쪽 바깥쪽으로는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만든
서로 다른 모양의 누혈(漏穴) 장식이 한 쌍씩 만들어져 눈길을 끕니다.
(윗 사진 무지개문 위의 양쪽에 튀어나온 구조물)
1958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무지개 모양의 월단 맨 위에 봉황 한 쌍을 새겨 놓았는데,
속설에 따르면 창의문 밖의 지형이 지네를 닮아서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무지개문 천정에도 닭인가 싶은 한 쌍의 봉황이 그려져 있습니다.
성곽 여행을 끝내고는 뭘 할까요.
뻔하지요, 창의문밖 어느 식당에서 소주 한 잔,
그리고 근처에 있는 일행인 선배의 집으로 몰려가서 또 한 잔을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 북악산 서울성곽 탐방로 안내도
※ 서울성곽 이해를 위한 참고 자료
1392년 7월17일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이 겨울철을 앞두고 공사를 일으킬 수 없다고 반대하자, 때를 늦추어 궁궐과 종묘, 사직, 관공서 등을 건축한 뒤에 천도하기로 하였다.
이듬해(1393년) 정월에 권중화가 풍수지리학상 계룡산이 새 도읍으로 가장 좋은 곳이라고 건의하자, 태조는 직접 무학대사와 지관들을 데리고 계룡산으로 내려가 신도를 정하고 각 도에서 인부를 차출하여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륜이 송나라 호순신의 지리서를 이용하여 계룡산 신도의 부당함을 상소하자 태조는 일단 공사를 중단하고 재검토하고 다시 신도 후보지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신도 후보지가 저마다의 풍수 이론에 따라 이견이 크자 태조는 재위 3년(1394) 8월8일부터 13일까지, 무학대사를 대동하고 자신이 직접 현장을 시찰한 다음 지금의 서울 지역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태조는 곧바로 정도전을 한양에 파견하여 도시 건설 전체를 맡기고, 9월에는 신도조성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권중화 등과 협력하여 종묘, 사직, 궁궐, 도로, 시장 등 도시계획을 작성하였고 그해 12월에 종묘의 터 닦기를 시작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약 10개월 후인 태조 4년(1395) 9월29일에 대묘와 새 궁궐이 완성되었다.(태조가 경복궁에 입주한 것은 12월 28일이었다.) 이 공사에 필요한 인력은 전국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충당하였고,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충청도의 민간 장정들은 농한기인 1, 2월과 8, 9월 가을에만 동원하였다.
이렇게 결정된 서울 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 18.2km)이었다. 서울 성곽은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축조하기로 계획되었는데,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만 하기로 하고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396년 1, 2월 49일 동안에 걸친 1차 공사에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등에서 11만8천 명을 동원하였다. 이때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는 전 해에 궁궐 공사 때 차출되었기 때문에 면제시켰고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도 국방상의 임무를 고려하여 동원하지 않았다. 1차 공사에서 서울 성곽은 대부분 완공되었고, 다만 동대문 지역은 웅덩이로 되어 있어 말뚝을 박고 돌을 채워 기초를 다져야 했기 때문에 늦어질 수밖에 없어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다.
성곽의 공사는 총 길이 59,500척을 600척(약 180m) 기준으로 모두 97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하였고, 각 구역을 북악산 산마루에서 동쪽으로 돌면서 천자문千字文의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天 자부터 조민벌죄弔民罰罪의 조弔자까지 이름을 붙였다. 성곽 전체를 600척으로 나누면 97척 하고도 1,300척이 남는데 이는 인왕산 부근 자연 암반 절벽을 그대로 성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시 가을 농한기인 8, 9월에는 49일 동안 7만9천4백 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사대문과 사소문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문루의 누각들은 공사 후 건축 기술이 뛰어난 승려들을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대문은 2년 뒤인 태조 7년(1398)에야 준공되었다.
그후 27년이 지난 세종 4년(1422), 세종은 서울 성곽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 정비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는 결과적으로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이었으며, 1, 2월 농한기 38일 동안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인부와 2천2백 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서울 성곽의 기본 골격이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인조는 서울 성곽과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과 강도성, 강화도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에 맺은 ‘삼전도 맹약’ 중에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서울 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근 70년 지난 숙종 30년(1704)에 이르러,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조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 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이 공사는 6년에 걸쳐 시행되었고, 서울 성곽이 정비되자 숙종은 이듬해인 재위 37년(1711), 곧바로 북한산성을 수축하여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 성곽이다.
이후 고종36년(1899)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에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를 부설하기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려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 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서울 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그 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글 : 유홍준 문화재청장 )
'우리 산하와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낙안읍성과 민속마을 (0) | 2008.01.13 |
---|---|
순천만 자연 생태 공원 (0) | 2008.01.12 |
너럭바위로 오르는 길이 편안한 아차산 (0) | 2007.12.18 |
맑고 높은 기품, 도봉산 (0) | 2007.10.28 |
구름안개 속에 잠긴 황매산에 오르다 (0) | 2007.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