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구름안개 속에 잠긴 황매산에 오르다

모산재 2007. 10. 14. 02:24

추석에 찾은 내 고향 황매산

2007. 09. 24

 

 

 

황매산 전경

 

 

 

 

 

 

추석을 이틀 앞두고 동생네 가족과 함께 합천 산골 고향집을 찾는다.

 

장마처럼 내리던 비가 연휴에는 그칠 것이라더니 대진고속도로를 타고 덕유산에 가까워지니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어둠이 내리고도 한참 지난 시간이 되어서야 도착한 고향집, 한달 만에 찾아뵙는 늙으신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은, 늘 그러했듯이, 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만난 것처럼 낯설고 가슴을 휑하게 한다.

 

자식과 함께 하기 위해 기다린 부모님과 늦은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본다. 아버지가 건강하셨다면 부모 자식 함께 막걸리잔이라도 나누었을 텐데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 것도 참 멋적다. 그러구러 밤은 깊어져 잠이 드는데 동생네는 작은방에서 나는 부모님과 함께 큰방에서 잠이 든다. 사랑방엔 토란줄기를 널어 놓았으니 같은 방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다.

 

부모님과 한방에서 잠을 자 보기는 성인이 되고 나서는 처음이 아닐까 싶은데, 참 많은 상념들이 다 떠오른다. 여름이면 격심한 천식으로 밤새도록 숨이 컥컥 막혀 괴로워하시던 아버지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잠결에도 내 마음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

 

 

 

자고 일어난 아침에는 비가 좍좍 쏟아지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무슨 날씨가 이럴 수 있나, 방 안에 갇혀 있어야 할 시간이 원망스럽기만 한데 오전 반나절이 지날 무렵부터 날이 개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막내 동생네가 오고 셋째 동생네가 오고 해서 집안 마당에 사람소리가 가득 차니, 서울에서부터 마음 먹었던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황매산, 중학교 2학년 가을 소풍날 올라 보고는 다시는 찾지 못한 산을 오늘 찾아보리라. 동생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얼씨구이다. 그렇게 해서 막내 동생이 차를 몰고 두심이를 거쳐 덕만을 지나 그 유명한 황매산철쭉제를 위해 만들어 놓은 주차장을 향하여 산길을 오른다.

 

 

▼ 덕만 가까운 도로 위에서 바라본 황매산의 남쪽 기슭, 모산재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

 

 

 

 

 

저기 구름 덮인 봉우리 아래에 불국사보다도 더 컸다던 영암사 절터가 있다.

 

 

 

 

 

 

모산재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 바로 아래는 덕만, 숲 너머는 감바위와 대기 마을 쪽 골짜기와 호수

 

 

 

 

 

목장쪽으로 오르는 길, 정상에 가까운 곳인데도 비가 많이 내린 탓인지 골짜기에는 많은 물이 흘러 내리고 있다.

 

 

 

 

 

 

 

황매평전을 향해 오르는 길, 햇살 좋은 등성이의 풀섶에는 물매화, 쑥방망이, 산비장이, 미역취, 자주쓴풀, 눈좁쌀풀 등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차를 세우고 한동안 이들 풀꽃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들 꽃들은 다음 글에 소개한다.)

 

 

날이 개기는 했지만 황매산을 오르는 내내 흐릿하기만 하던 날씨는 황매평전의 주차장에 이르렀을 때에는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을 보여 주고 있었다.

 

 

▼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열어 보이는 황매평전 서쪽 능선

 

 

 

 

 

그리고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멀리 푸른 하늘 아래 흰 안개구름을 거느리고 황매산의 아름다운 삼봉이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어린 시절 우리집 마당에서도, 소 먹이러 간 산등성이에서도 늘 바라보았던 정다운 봉우리들이다.

 

 

▼ 삼태성처럼 나란히 보이는 상봉 중봉 하봉의 아름다운 삼봉의 모습

 

 

 

 

 

 

기억에도 아득한 중학교 2학년 가을 소풍날, 모산재 아래에 있는 영암사에 소풍을 왔다가 해산을 하고 동네별로 뿔뿔이 흩어져 돌아갈 때에, 우리 동네 아이들은 모산재를 너머 이곳을 지나 저 삼봉에 올랐다. 삼봉의 바위 절벽에서 소 먹이러 다니던 야산에서는 보지 못했던,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단풍의 그 화려한 선홍빛의 감격이 떠오른다. 그 선홍빛은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늘 설레게 했던 소녀의 얼굴빛이었은지 모른다.

 

그리고 능선으로 올라서니 어느덧 안개구름이 산봉우리들을 덮어 버리고 눈아래로 광활한 황매평전이 아득히 펼쳐진다. 동생들은 지리산 세석평전보다도 더 넓은 평전이 아닐까 하는데,  촛대봉까지 오르는 그 넓이가 만만치 않다는 판단에 아닐거야, 라고 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이곳이 더 넓어 보이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능선 가까운 곳에는 구절초 쑥부쟁이 꽃들이 한창인데, 이틀 전 동해안에서 보았던 털백령풀도 무더기로 보인다. 아쉽게도 용담은 아직 꽃봉오리를 열려면 열흘 이상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이들 꽃은 다음 글에서...)

 

 

▼ 서쪽 능선에 올라서 바라본 광활한 황매평전 풍경

 

 

 

 

 

우리가 걷는 억새밭 능선에도 서쪽 차황쪽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점령하기 시작한다. 어느 새 푸른 하늘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사방이 오리무중인 듯 시야가 조금씩 닫히기 시작한다. 이렇게 넓은 곳에서 저렇게 모호한 것으로 제대로 갇혀보는 것 또한 흥미진진한 것일 테지...

 

 

▼ 억새밭 너머 배꼽봉

 

 

 

 

 

바로 아래에 영화 '은행나무침대'의 속편인 '단적비연수'의 촬영장 세트 건물이 안개구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 주제공원(Theme Parks)인데, 영화 속 화산족과 매족의 원시부족의 가옥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어서 주변 자연과 잘 어울린 독특한 풍경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 만하다.

 

 

 

 

 

 

황매평전의 이 너른 풍광이 좋아서인지 이곳은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많이 이용되었다. '단적비연수' 외에도 ' '천군', 내 머리 속의 지우개', '태극기 휘날리며'를 들 수 있고, 특히 텔레비전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이 말 달리고 해모수가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바로 이 황매평전의 억새밭에서 촬영되었다.

 

 

▼ 등성이에 만발한 쑥부쟁이 꽃들

 

 

 

 

 

황매평전까지 임간도로가 나 있는 덕에, 평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정상에 오르는 길은 어렵지 않다. 능선을 따라 산책하듯이 탁 트인 풍광을 즐기며 터벅터벅 걷다보면 금방 상봉 아래에 도착한다.

 

 

▼ 상봉으로 오르는 길

 

 

 

 

 

 

▼ 상봉 오르는 바위 틈에 핀 구절초 꽃

 

 

 

 

 

▼ 정상(1108m)의 봉우리

 

 

 

 

 

황매산은 군립공원이지만 합천사람들에게는 지맥에서 받는 정기의 원천인 듯하다. 특이하게도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의 교가를 아직도 잘 외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릴 때 들었던 합천군가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교 교가는 아예 황매산으로 시작한다.(동네 이름이 도탄道呑인데 '도를 삼킨다'는 뜻. 도탄(倒憚)이 아니다.)

 

 

황매산 정기 받아 우뚝 솟아서
긴 내력 자랑하는 도탄이로세.

 

 

중학교 교가는 '스케일' 있게 공간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태백산'으로 시작한다.

 

 

태백산 정기가 주름을 잡아
황매의 기슭에 향기 드높다.

 

 

합천군가는 역사적 상상력 속에 황매산을 자리매김한다.

 

 

아 아라리 푸르른 하늘을 이고
뫼 천 년 물 천 년에 터 잡은 이곳
서으로 황매산성 동으로 낙동

 

 

▼ 정상에서 건너다 보이는 상봉(1104m)의 풍경

 

 

 

 

 

 

 

 

상봉만 한번 얼굴을 보여 줄 뿐 중봉과 하봉은  안개구름에 갇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처음에는 상봉, 중봉, 하봉 쪽으로도 가기로 하였는데 해질 시간이 가까워진 데다 짙은 안개구름이 산을 덮다시피하고 있어 아쉽지만 그냥 하산하기로 한다.

 

 

▼ 멀리 삼봉 방향, 구름안개에 덮인 풍경

 

 

 

 

 

 

내려오는 길, 지척이 분간되지 않는 가운데 엉뚱한 곳으로 접어 들어 수십분을 관목 덤불숲을 헤매는 불상사를 겪을 줄이야!

 

관목숲을 헤매면서 독사에 물리면 어쩌나 찔레가시에 방해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발목을 붙드는 것이 없었으니 무학대사 덕인지 모른다.

 

합천댐 쪽 악견산 아래에는 이성계를 도운 무학대사 생가가 있다. 무학대사가 이곳 황매산에서 수련할 때 그 어머니가 뒷바라지를 위해 산을 오르내리면서 칡덩굴과 땅 가시에 발등이 긁혀 넘어져 상처가 나고 뱀에 놀라는 것을 보고 황매산 산신령에게 100일 기도를 드리니 지금까지 뱀과 땅가시 그리고 칡덩굴이 자라지 않아 황매산은 3무(無)의 산이라 불리고 있다.

 

 

▼ 엉뚱한 곳에서 헤매다가 능선으로 올라서며 본 정상의 모습

 

 

 

 

 

 

한참을 헤매다 다시 능선에 올라섰을 때에야 안개구름이 물러서고 풍경이 길을 열어 주었고, 멀리 우리가 타고 온 차가 외롭게 서 있는 주차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어둠에 젖어드는 황매평전 풍경

 

 

 

 

 

 

산 속으로는 안개가 몰려 오듯이 어둠이 빠르게 밀려드는데 우리는 어둠을 거슬러 느릿느릿 산을 벗어난다.

 

 

▼ 어둠이 깃드는 계곡

 

 

 

 

 

 

 

※ 황매산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