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높은 기품, 도봉산
2007. 10. 05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긴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먼 골 골을 되돌아 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 청록집(1946)
오랜만에 도봉산을 찾는다. 평생을 저 우뚝 솟은 도봉의 바위봉우리처럼 맑고 기품 있게 사시다 10여 년 전에 세상을 뜨신 혜산 박두진 선생의 시 '도봉'이 생각나서 읊조려 보는데 앞 부분만 떠오를 뿐이다. 그 쓸쓸한 시의 내용은 아린 가슴으로 남아 있지만 뒷부분의 구절은 종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인터넷 검색을 하고 시를 제대로 읽어본다.
가을 산의 적막한 풍경과 그 산의 적막 속에 홀로 앉은 한 인간의 고독한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소월의 <초혼>에서처럼 이 시에서의 '나'도 대상 없는 부름과 대답 없는 메아리, 그 공허하고 외로운 정서에 갇혀 있다. 그러나 가슴 아프고 쓸쓸한 사랑일지라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지 모르는 ‘그대’를 향한 기다림, 그런 기다림을 가진 삶이라면 그래도 따뜻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일지라도" "그대 위하여" "긴 밤과 슬픔"을 가질 수 있다면 행복 아니겠는가...
올려다본 도봉산 봉우리들에는 맑고 높은 기품이 느껴진다.
티없이 높푸른 하늘을 인 도봉의
견고한 화강암
바위 봉우리들이 청청한 솔숲을 거느리고 밝은 가을 햇살과 청량한 바람에 머리를 헹구며 솟았다. 오늘은 저 맑고 높은 도봉의 기품만을 생각하며 말없이 산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족하리라.
▼ 왼쪽으로부터 선인봉(708m), 만장봉(718m), 자운봉(740m, 최고봉), 신선대, 주봉(675m), 뜀바위, 칼바위
▼ 도봉산 봉우리들과 등산로
▼ 우이암(쇠귀바위). '관음암'이라고도 부른단다. 왼쪽 아래에 원통사라는 절이 보인다.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을 '원통전'이라고 하니 관음보살을 모신 암자인듯...
▼ 능선으로 올라서자 왼쪽 송추계곡으로 향하는 능선엔 다섯 형제처럼 다정하게 늘어선 오봉의 모습이 나타난다.
▼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도봉의 연봉들이 푸른 하늘을 이고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 산부추의 계절이라 꽃이 한창이다.
▼ 돌아보면 북한산의 기맥을 이은 상장능선이 우람한 근골을 뽐내며 송추계곡을 향해 달리고 있다.
▼ 가까운 곳에서 오봉의 모습을 다시 한번 담아 본다.
▼ 열매를 맺은 참꿩의다리(은꿩의다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산 메마른 능선이어선지 키가 한 뼘 남짓하다.
▼ 며느리밥풀꽃 종류들은 거의 꽃이 지고 열매를 달았다. 애기며느리밥풀로 보이는 몇몇 녀석은 아직 꽃을 남기고 있다
▼ 왼쪽 봉우리엔 물개 형상의 바위가 보인다.
▼ 비늘말불버섯이라고... 꼭 전구를 닮았다.
▼ 물개바위를 좀더 가까이에서 담아 본다.
저 아름다운 도봉의 바위 봉우리들을 오르지는 못하고, 한동안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며 감상하다가 바로 하산길로 접어든다.
▼ 하산길에 만난, 바위 틈에 무리 지어 자라는 물통이
▼ 관음암 극락보전과 오백나한상
도봉산 입구의 계곡물.
도봉의 기품을 그대로 담은 물이 내 마음의 풍진을 말끔히 씻어 주는 듯하다.우리의 삶도 저렇게 맑고 서늘한 기운으로 쉬임 없이 흐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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