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너럭바위로 오르는 길이 편안한 아차산

모산재 2007. 12. 18. 22:43

 

너럭바위 길이 편안한 아차산

 

2007. 12. 01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첫날, 아이들과 함께 아차산을 오릅니다.

 

오늘은 야외에서 활동하는 마지막날인데 꽃이란 꽃은 자취도 다 사라지고 햇살은 명랑하고 바람은 청량하니 그 동안 한번도 않았던 산행을 하기로 합니다.

 

 

 

 

생태계공원을 지나 10여분을 오르니 바로 아차산성이 나타납니다.

 

원래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 정도라는데 현재 흔적처럼 남아 있는 모습은 그저 나지막한 돌담 정도로 보입니다. '아단성 (阿旦城)'이라고 불렸던 아차산성, 성 전체 길이는 1,125m라니 그리 크지 않은 성이지만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 신라, 백제가 치열한 투쟁을 벌인 역사적으로는 커다란 의미를 지닌 산성입니다. 처음에는 바로 맞은편 강 건너에 있는 도읍지를 방어하기 위해 백제가 도하처 보호 목적의 산성으로 쌓았을 것입니다.

 

 

 

 

 

 

성에서는 동, 서, 남쪽에 문이 있던 흔적과 물길, 문 앞을 가려 보호하는 곡성, 여러 건물터가 남아있는데, 많은 토기와 기와조각이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1997년 아차산성 보루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나왔는데 (100여 점의 토기류와 30여 점의 철기류, 100여 점의 철제 무기류 등), 고구려 계통의 토기들이 많아 고구려와 깊은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성 안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유물들이 나오고 있어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에도 성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국이 한강을 두고 서로 다투는 중요한 성이어서 이곳에는 역사의 비극이 담긴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부터 1500년도 더 지난 475년, 백제는 도읍 한산이 장수왕이 보낸 3만의 고구려군에 7일만에 함락되고 고구려군에 쫓겨 탈출을 시도하던 개로왕은 그를 배반하고 고구려로 망명한 옛 부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에게 붙잡힙니다. 개로왕은 포로로 잡혀와 이 성 아래에서 피살됩니다.

 

개로왕이 살해되는 장면은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일단 말에서 내려 옛 임금인 개로왕에게 절을 했다. 그 다음 옛 죄를 다그치며 왕의 얼굴을 향하여 침을 세 번 뱉었다. 그리고 개로왕을 묶어 아단성(아차산성) 아래로 끌고 가서 죽여 버렸다.

 

 

문주태자가 신라에서 1만명의 구원병을 끌고 왔지만 때는 늦어 개로왕이 참수 당한 뒤였습니다.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결국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472년 개로왕은 고구려의 남하를 막기 위해 북위(北魏)에 원병을 청했으나 거절당합니다. 당시 남조의 송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고구려와 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뿐더러 오히려 북위는 이러한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고, 이를 알게된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공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중 도림을 첩자로 보내 바둑을 두며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는 한편,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으로 삼국사기는 전합니다. 물론 개로왕으로서는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귀족세력들을 배제함으로써 백제는 내부의 결속력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 개로왕은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고 합니다. 도미의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으려던 폭군, <도미설화>의 주인공으로도 전하는 개로왕, 그가 얼마나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비명에 죽어간 그의 시신이 묻힌 곳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곳 아차산 어딘가에 함부로 버려져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뒤로 보이는 꼭대기가 아차산 제5 보루 발굴지

 

 

 

 

 

아차산성은 또 온달장군이 죽령 이북의 땅을 찾기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를 뒷받침이나 하듯 성안에 온달샘이 있는데, 온달이 죽은 아단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도 합니다.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곳에 있는 아차산성(阿且山城)이라는 주장과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溫達山城)이라는 주장으로 엇갈립니다. 두 곳 모두에 온달과 관련된 설화와 유적이 전해지는데 단양에는 온달동굴과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 등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차산성이 온달의 죽음과 관련된 아단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당시 삼국의 형세로 볼 때 고구려의 군대는 남한강의 상류 지방인 단양까지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강 유역의 탈환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온달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어 말하였다.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대왕께서 어리석은 저를 못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가서 반드시 땅을 되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하자, 온달은 떠나면서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지만 온달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라고 말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 대왕이 이를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너럭바위를 오르며 내려다 본 팔각정 쪽 풍경

 

 

 

 

 

 

 

 

 

 

뽀얗고 매끈한 피부가 자작나무처럼 보이는 나무. 사스레나무일까? 물박달나무일까?

 

 

 

 

 

 

 

 

 

 

 

※ 아차산성 안내도

 

 

 

 

 

▶ 아차산 제1 보루터

 

 

발굴 및 복원 사업을 하느라 나무를 베어내었다. 오른쪽 꼭대기는 제5 보루터.

 

 

 

 

 

▶ 아차산 제5 보루터

 

 

 

 

 

▶ 보루터 꼭대기의 돌탑과 낮달

 

 

 

 

 

▶ 건너다 보이는 용마산 (정상 348m)

 

 

 

 

 

무슨 나무일까, 뽀송한 겨울눈이 사랑스럽다.

 

 

 

 

 

 

▶ 다시 내려오며 보는 팔각정 풍경

 

무슨 까닭인지 철거 준비를 하고 있다.

 

 

 

 

 

 

 

너럭바위로 이어지는 양지바른 길이 아늑하고 정답다.

 

 

 

 

 

저렇게 자연보다 아주 작게 보일 때 사람은 정겹고 아름답다.

 

 

 

 

 

이끼. 저 차갑고도 메마른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도 더 푸르러지는 생명

 

 

 

 

물오리나무. 흐릿한 하늘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흑백의 풍경에 잠시 빠져 본다.

 

 

 

 

 

낙상홍

 

 

 

 

 

요술거울이란다.

 

 

 

 

 

생태계공원 한쪽 구석에 세워진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상

 

 

 

 

 

 

 

※ 아차산, 용마산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