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머무는 절, 청도 호거산 운문사
2007. 08. 17
아침 일찍 부산을 출발하여 언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밀양 땅을 지나 청도 운문사로 가는 국도를 달린다. 경북으로 넘어서는 고개 운문령에서 잠시 멈추고 지나온 아득한 고갯길을 내려다보며 아침 더위를 식힌다.
위로는 가지산과 운문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 아래로는 경북 땅인 청도운문사로 내려가는 도로
등산로 입구 솔숲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휴식을 취하는 동안 잠시 풀꽃들을 관찰한다.
수염며느리밥풀
까치고들빼기
꼭지가 있는 버섯, 흰꼭지버섯...?
층층잔대
고개를 내려서니 맑은 계곡이 길게 이어지고 도롯가에는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차량들이 군데군데 섰다.
<운문사 가는 길>
매표소를 지나 1km쯤 되어 보이는 운문사 드는 길은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어 호젓한 산사의 위엄을 더한다. 걸어서 간다면 운치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을...
솔밭 옆으로는 맑고 시원한 계류가 흘러 내리는데 3면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골짜기를 돌아드니 툭 트인 넓은 평지가 다정스레 나타난다.
남쪽은 운문산, 북동쪽은 호거산, 서쪽은 억산과 장군봉... 이들이 거느린 높고 낮은 봉우리가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운문사는 호랑이가 의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한 호거산(虎踞山) 산자락을 바라보며 그림처럼 앉았다.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앉은 운문사의 모습이 연꽃 같다고 하여 운문사를 ‘연꽃의 화심(花心)’이라고 하는데, 화심으로부터 짙은 안개가 두둥실 떠올라 구름의 문을 이루고 구름의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이 바로 세상의 모든 티끌을 씻어 버린 연화장세계이다.
절 가까운 입구에도 아름드리 솔숲은 이어지고 절 담장 밖에는 먼 하늘과 산을 배경으로 하얀 배롱나무꽃이 눈부시다.
절 앞 넓은 밭에서 밀짚모자를 쓴 비구니 스님들이 노작을 하고 있다.
운문사는 사미니계를 받은 200여 명의 비구니 학인스님이 수행하는 절인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은 선종 8대 조사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이자 선종 9대 조사로 강서성 백장산(百丈山)에 머물면서 대소승(大小乘)의 계율을 집약하고 절충하여 최초로 선원의 규칙인 '백장청규'를 제정하였다. 그는 선 수행에 노동을 도입하여 선농일치의 선농불교(禪農佛敎)의 태두라 불리기도 한다.
"선사께서 평생토록 힘써 수행한 일은 형용하기 어렵거니와 날마다 노동에는 반드시 남보다 먼저 나섰다. 제자들이 농기구를 숨기고 쉬기를 청하니, 그는 “내게 아무런 덕도 없는데 어찌 남들만 수고롭게 하겠는가”했다. 선사께서는 제자들이 숨긴 농기구를 찾다가 찾지 못하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一不食)’는 말이 천하에 퍼졌다." <祖堂集 제14권, 百丈章>
마조 도일(馬祖道一), 선종 8대 조사인 그의 사상은 '보통의 평범한 마음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말로 대변된다. 그는 새삼스럽게 닦을 필요가 없는 것이 도라고 하면서, 다만 무언가를 이루고 어딘가로 향하고자 하는 것을 더러운 짓이라 하여 경계했다. 마조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고의 틀 속으로 도피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의 말대로 '우는 아이를 달래어 울음을 그치게 하는 돈'(止啼錢)과 같은,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살아 숨쉬는 진리를 주장한 것이다. 요컨대 그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 담겨 있는 보편적 진리 파악을 강조했다.
노작과 수행을 함께 하는 스님들의 모습이 신선하고 아름다워 사진을 찍으니 멀리서 손사래질하며 말린다.
왼쪽 2층 누각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절 내부로 들어서는 범종루
지금은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는 이곳 운문사는 신라 때 원광법사가 화랑들의 정신적 지침인 세속오계를 전수하였고 고려 때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던 곳으로 우리 역사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절이다. 730년 전인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이곳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물렀다고 하는데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집필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범종루 아래로 경내로 들어서는 문이 있는데, 이런 모습은 고창 선운사와 비슷하다.
그런데 사천왕이 있아야 할 양쪽 자리에는 그냥 벽이 가로막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지나지만 뭔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나중에 작압전(鵲鴨殿)이라는 작은 전각을 돌아보면서 여기에 사천왕이 모셔지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범종루에서 바라보니, 눈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로 운문사를 둘러싸고 있는 능선이 정답고 넓은 대지에 편안한 거리를 유지하며 앉은 절집 풍경은 아늑하기만하다.
왼쪽 건물이 명부전이고 오른쪽 큰 건물은 만세루이다. 앞에 보이는 반송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운문사 처진소나무이다.
운문사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180호)
높이는 9.4m, 둘레는 3.37m로, 나이는 약 4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옛날에는 여름철에 여승들이 이 소나무 아래 둘러앉아 큰 스님의 강론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낮고 넓게 퍼지는 모습 때문에 반송(盤松)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반송은 줄기가 여러 갈래로 자라나 수형이 퍼진 모습. 이 나무는 하나의 줄기에 우산처럼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늘어진 처진소나무이다. (울진 불영계곡에 또 하나의 천연기념물 409호 처진소나무가 있다.) 키가 크고 가지가 짧으면서 버들처럼 밑으로 늘어진 처진소나무는 '유송(柳松)'이라 부르는데, 청도 매전면 동산리 천연기념물 295호 처진소나무가 그것이다.
비구니 스님들의 불심인 듯 흰배롱나무가 맑은 빛으로 새하얀 꽃을 피웠다.
하늘빛을 닮은 청초하게 핀 우선국 꽃
대웅전 앞에 자리잡고 있는 만세루. 여느 절의 누각과는 달리 누하문이 없는 단층의 형태로 비구니 학인 스님들이 강학을 하기에 좋은 강당으로 쓰이지 않을까 싶게 툭 트인 공간이 넓고 시원스럽다.
만세루 강단의 걸개그림
대웅보전에서 자라본 만세루
신축 대웅보전
정면 7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호거산을 배경으로 앉은 전각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신축 대웅보전의 삼존불
불전 뒤에 걸려 있는 괘불
나무수국
은반향나무
찰피나무. 싯다르타가 부다가야에서 깨달음(bodhi)을 얻었을 때 그 아래 앉아 있었다는 상록의 인도보리수와 수형과 잎 모양이 닮아서 인도보리수 대신 우리 나라 사찰에서 심는 나무이다. 열매를 염주 만드는 데 사용한다고 해서 '염주나무'라 부르기도 하는데, 염주나무는 찰피나무의 변종으로 따로 존재한다.
응진전 처마 아래에서 측면으로 바라본 신축 대웅보전과 대웅보전(비로전)
법륜(法輪, Dharma cakra)
만(卍)자와 더불어 불법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것을 법륜을 굴린다(轉法輪)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인 법을 전륜왕(轉輪王) 수레바퀴 모양의 고대 인도 무기인 윤보(輪寶)에 비유한 것으로, 세속의 왕자로서 전륜왕이 윤보를 돌려 천하를 통일하는 것과 같이, 진리의 왕이신 부처님은 법륜을 굴려 삼계를 구제하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다. 법륜은 부처님의 법이 원만하고 결함이 없음과 중생의 망견(妄見)을 타파하는 것을 상징하며, 부처님의 법이 전전(轉轉)하여 어느 곳에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법륜은 보통 바퀴살을 8개 넣어서 표현하는데, 이는 부처님이 괴로움을 소멸하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성스러운 도닦음의 진리(苦滅道聖諦)로서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중생이 고통의 원인인 탐(貪) ·진(瞋) ·치(痴)를 없애고 해탈(解脫)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8가지 길을 실천 수행해야 하는데, ①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②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 ③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④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⑤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⑥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⑦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⑧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대웅보전(오른쪽), 오백전(정면), 3층석탑
대웅보전(보물 제835호)
원래 비로전(毘盧殿)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었던 건물인데 어찌된 일인지 '대웅보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신축된 대웅보전과 함께 운문사는 2개의 대웅보전을 보여 주고 있다.
앞마당에 보이는 두 개의 석등은 보물인 금당의 석등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1653년(효종 4)에 지은 건물로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주춧돌은 자연석이며 그 위에 민흘림의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 부분에 창방과 평방을 짜 맞추어 하부 구조를 구성하였다. 정면의 문은 가운데 칸이 넓어 5짝 여닫이문을 단 것이 특이하다. 창호는 모두 꽃살무늬 창호인데 맞은편 금당의 꽃살 창호와 함께 매우 아름답다.
대웅전의 비로자나불
삼층석탑과 대웅전
운문사 3층석탑(보물 제678호)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두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
각 층의 기단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기고, 특히 윗층 기단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는데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며,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각 부분들이 차례로 올려져 있는데, 모두 본래의 것들이다. 기단부가 몹시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던 것을 일제시대에 보수하였는데 이 때에 팔부중상 등 일부를 새로운 돌로 보충하였다.
구 대웅보전과 만세루 사이로 바라본 신축 대웅보전
오백전(五百殿)
5백 나한상을 모시고 있는데, 대웅보전의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작압전(鵲鴨殿)
'까치 작'에 '오리 압'이라는 독ㅌ특한 이르므로 된 전각. 운문사에서 꼭 보아야 할 건물인데, 이름 그대로 까치집 모양을 하고 있으며 운문사에서는 가장 작은 건물이다. 처음 보양 국사가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는데, 편액은 '작압(鵲鴨)'으로만 되어 있으나 '작압전'이라고 부른다.
작압의 원형은 신라시대에 조성한 전탑 형식의 불전이었다. 훗날 세월이 흘러 무너지자 1935년 무렵에 벽체의 벽돌을 제거하고 목조 건물의 형태로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전각도 평면이 사각형인 데다가 지붕 꼭대기에 보주(寶珠)가 설치되어 있는 등 불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곧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 창사의 연기를 말해 주는 것이다. '작압전'이라 하지 않고 그냥 '작압'이라고만 하는 것도 본래 전각이 아니라 전탑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안에 있는 석조 여래좌상과 사천왕 석주는 발견 당시 절반 가량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하는데, 본존불의 좌대 속에서 발견된 사리합 명문에 의하여 신라 경문왕 때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
높이 0.63m의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이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지만,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세부 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분명하다.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인데, 가는 눈썹·작은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평판적인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그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속옷이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꼽 부분에 놓여져 있는데, 손이 작고 표현이 섬세하지 못해 투박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투박한 모양이며 가장자리에 형식적인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특이한 양식으로 주목된다. 맨 윗부분은 평면 타원형으로 14개의 연꽃잎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는 6각형이며, 아랫부분은 긴 6각형에 18개의 연꽃잎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겉옷 안에 표현된 속옷, 전반적으로 투박해진 표현기법 등에서 9세기 불상을 계승한 10세기 초의 불상으로 보인다.
사천왕 석주(보물 제318호)
작압전(鵲鴨殿)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의 좌우에 사천왕상이 각각 2기씩 모두 4기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운문사 입구 천왕문이 따로 보이지 않은 것도 바로 이 사천왕 석주 때문은 아닐까...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관음전
명부전 내부
망자들의 위패들이 많이 모셔져 있다.
정오가 되자 범종이 은은히 울려 퍼진다. 범종을 치는 비구니 스님의 불심이 종소리에 실려 산사의 담장을 넘어 골짜기는 경건함으로 가득 찬다.
이렇게 바쁘게 절 경내를 한바퀴 둘러 보고는 계곡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쉬운 것은 금당을 둘러 보지 못한 것인데, 사전에 그 존재조차 몰랐고 관람의 동선에서 벗어난 곳에 있어서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외잎으로 자란 반하
잠자리
운문사 계곡
이 맑은 계곡은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명경지수를 자랑하고 있다.
쉬나무 열매
절 입구의 계곡 쪽으로 이동하여 발을 담그고 놀다가 서울을 향한다.
운문사를 제대로 보려면, 비구니 스님들의 장엄한 아침 예불 모습과 이른 아침 북대암에 올라 바라보는 물안개와 구름에 둘러싸인 사찰 전경, 청도팔경의 하나라는 운문사 새벽 종소리와 원근의 새벽 경치를 빼먹지 말라 하였는데, 시간에 쫓기어 돌아가야 하니 아쉽기만 하다.
※ 운문사 가람 배치도
<참고 1> 운문사의 역사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운문사 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현, 운문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950년대 교단 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참고 2> 운문사의 보물들
아래의 것들은 직접 보지 못한 것이지만 운문사가 가지고 있는 보물들로 문화재청의 자료들을 인용하였다.
● 동호(銅壺, 보물 제 208호)
'구리 항아리'라 부르면 될 겋 어려운 한자어로 명명해 놓았다. 전체가 흑색을 띠고 있는데, 감로준(甘露樽)이라는 이름이 전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불교 용기의 하나로 추측된다. 제작연대는 이보다 앞선 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추정된다. 높이 55㎝, 아가리 지름 19.5㎝, 몸지름 31㎝로 뚜껑 모서리 부분은 둥글게 표현하였고 위로 6장의 연꽃잎과 十자형으로 된 불꽃 모양이 있는 높은 손잡이가 달려있다. 뚜껑 손잡이의 불꽃 모양은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에 걸쳐 만든, 스님의 사리를 모시는 부도의 머리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운문사에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응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워 귀국하였다.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상태로 세 쪽으로 잘린 비몸만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금당앞 석등(보물 제193호)
운문사 금당 앞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각 부분이 잘 균형을 이룬 우아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바닥돌과 하나로 이루어진 아래받침돌에는 여덟 장의 잎을 새긴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가운데기둥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며,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경쾌한 모습이며, 꼭대기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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