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강릉 선교장을 찾아서

모산재 2007. 8. 7. 22:07

 

강릉 선교장을 찾아서

2007. 07. 22

 

 

 

 

열흘 전쯤 아무개 여행사에 울릉도 들어가는 배편을 예약하고 어제 묵호에 와서 여객선터미널 근처 여관에서 잠을 자고 아침 9시에 터미널로 달려갔더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팀장이란 사람이 나와서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보인다. 단체로 가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티케팅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황당할 수가! 초등학교 아이들 중에서 사정이 생겨 오지 않는 아이들이 없으면 배를 타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어떻게 되겠지 하고 기다려봤지만 결국은 배를 탈 수 없었다. 우리를 포함하여 배를 타지 못한 10여 명의 예약자들이 팀장에게 강력히 항의하여 보았지만 팀장도 쩔쩔 맬 뿐 별 도리가 없었다. 여행사에서 정원을 초과하여 예약을 받았다가 단체로 가는 초등학생 수백 명 중 예상과는 다르게 불참자가 없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여행사를 찾아가서 항의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팀장 앞에서 결국은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울릉도는 내일로 미루고 오늘 하루 보내는 숙식비를 받는 것으로 타협한다.

 

 

 

***

 

 

 

이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같은 운명이 된 분들 중에서 차를 가지고 오지 않은 두 아가씨들이 우리와 함께 하기로 하고 동승하였다.

 

 

 

망상해수욕장에 잠시 들렀다가 강릉 선교장과 경포대로 가기로 한다. 이미 여러번 가 봤지만 가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니까...

 

 

 

 

 

 

멀리 동쪽으로 경포호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선교장은 뒤로는 푸른 소나무 숲이 두르고 앞으로는 연못 가득 연꽃이 피어나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히는 곳, 2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규모조차 가장 큰 전통 한옥이다.

 

집의 명칭도 여느 전통가옥과는 달리 '장(莊)'자가 들어가 있으니 일반주택이 아니라 장원임을 나타내는데, 그 이름에 걸맞게 3만평의 대지 위에 10여 동의 건물을 세웠으니 모두 120여 칸에 달하여 민간주택 99칸을 초과한 대저택이다.

 

 

지금은 메워졌지만 예전에는 이곳까지 경포호가 이어져 배다리(船橋)를 이용해서 다녔다고 해서 '배다리마을'이라 했고 이로부터 '선교장(船橋莊)'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매표소를 지나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장승들이다. 예전엔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웬 장승들이 저렇게 떼를 지어 서 있는가.

 

 

 

 

 

처음에는 무심히 각양각색 장승들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사진을 담기에만 열중했는데, 나중에 자료를 찾다 보니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풍수지리에서 물길(水口)이 빠져나가는 것을 길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데, 선교장 터는 바로 경포호로 연결되는 물길이 넓게 벌어져 기와 재물이 빠져나가는 형상의 지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비보하기 위해서 인공으로 수구막이를 하는데 그 방법으로 나무를 심거나 돌장승을 세운다.

 

그래서 그런지 선교장의 집들은 경포호 방향을 외면하고 서쪽으로 살짝 틀어서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으로도 넓게 틔어진 물길로부터 충분히 비보되지 못하여 장승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한일자로 길게 늘어선 23칸의 행랑채를 전면으로 내세운 것도 바로 이러한 풍수지리적 결함을 비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장승을 보고 난 후 걸음을 옮기니 오른쪽으로 활래정(活來亭)이란 정자가 보인다. 그 아래에는 넓은 연못이 펼쳐져 있고, 연못 가득 연꽃들이 꽃망울을 달았다.

 

 

 

 

 

활래정이란 이름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그 시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半畝方塘一鑑開(반묘방당일감개) 자그마한 네모 연못이 한 거울처럼 펼쳐지니

天光雲影共徘徊(천관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떠다니누나!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 묻노니 연못 맑기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爲有源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 근원으로부터 살아 있는 물이 내려오는 까닭일세.

 

 

주자가 책을 읽다가 문득 느낀 바가 있어서 쓴 시인데, 새 물이 흘러 들어와서 맑은 호수가 되듯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도 언제나 새로움을 받아들여야 함을 표현한 것이다.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1816)에 인공연못 위에 세웠는데,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워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을 받쳤다.

 

그런데 ㄱ자형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두 채의 건물을 하나로 이은 쌍정(雙亭)이니 양식적으로도 특이한 정자라 할 것이다.

 

마루는 연못 안으로 들어가 있고 주위에 난간을 돌렸으며, 방과 마루를 연결하는 복도 옆에는 접객용 다실이 있고 벽면은 모두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명문사대부가의 정자에서는 온돌방과 누마루 사이에는 부속차실을 갖추고 다동(茶童)이 차를 끓여 내오게 하였다니 이 정자에서도 분명 그러하였을 것이다.

 

 

 

 

 

 

바깥에서 정자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가까이로 발걸음을 옮기니 연못 바로 곁에 솟을대문이 나타난다.

 

 

대문 양쪽 주련에는 한유와의 고사가 전해지는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시가 적혀 있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연못가의 나무 위에서 잠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중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

 

 

 

선교장의 낭만은 바로 이곳 활래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장의 사계는 그 어느 계절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강릉을 가리켜 사계의 고을이라 한다면 선교장은 사계의 장원이다. ...<중략>... 

여름은 뒤 솔밭으로부터 온다. 짙은 녹음을 이루는 고송, 고목 속에 깃을 친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 매미, 쓰르라미 소리로 한여름은 짙어간다. 이때 제철을 맞는 것이 활래정이다. 연꽃 봉오리가 솟고 꽃봉오리가 터지면 누마루에 올라 술자리를 벌인다. 그땐 으레 시서화를 곁들이게 된다. 비오는 날, 연잎에 듣는 빗소리 역시 문객의 시정을 일게 한다. ... 

- 이 집안 후손인 이기서 님이 쓴 <강릉 선교장>, 열화당

 

 

 

열려진 문으로 방을 들여다 보니 보이는 것은 다시 저쪽으로 열려진 문 밖의 연못과 연꽃...

 

 

7월말 여름 한낮의 땡볕 속에서 정자의 그늘로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서늘한지 저 방으로 들어가 시원스레 낮잠이나 한판 늘어지게 잤으면 얼마나 좋을거나...

 

 

 

 

 

 

다시 정자 안쪽으로 돌아드니 마침 붉은 연꽃 한송이가 꽃봉오리를 내밀고 있다.

 

 

 

 

 

 

 

선교장은 세종의 중형인 효령대군의 11대 후손으로 이 고장의 명문가인 전주이씨 이내번(1703∼1781)이 처음 터를 잡았다.

 

가선대부 이내번(李乃蕃)은 충주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안동 권씨)와 함께 외가 근처인 강릉 경포대 쪽에 옮겨와 살았다. 어느 정도 재산이 불어나면서 좀더 넓은 집터를 물색하던 중, 한 떼의 족제비가 일렬로 무리지어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이내번이 그 족제비들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선교장 터 부근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를 계기로 이내번은 이곳에다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풍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동물들이 잠을 자거나 쉬는 곳, 나뭇군들이 짐을 지고 가다가 으레 쉬기를 좋아하는 곳, 겨울에 눈이 가장 먼저 녹는 곳 등을 명당으로 친다고 하는데,선교장도 바로 이 같은 풍수지리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내번의 손자인 오은 이후는 열화당(悅話堂)과 활래정(活來亭)을 세웠으니, 오은 이후는 선교장의 낭만적인 정체성을 확립한 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일제시대에 이후의 증손자인 이근우가 23칸 행랑채가 증축함으로써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수백 년 고목의 울창한 금강송 숲을 배경으로 23칸 긴 행랑채의 위엄조차 오히려 정답겨 보인다. 

 

 

 

 

 

증언에 따라면 6.25 전쟁으로 선교장도 무사하진 못했는데, 9. 28 수복 때 미군기의 조준폭격으로 동별당 앞 행랑채 일부가 날아가고 600년이나 된 소나무도 여러 그루 불탔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전 고성 산불의 위기도 넘겨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숲 중의 하나가 저렇게 살아남았다. 

 

 

 

 

 

청청한 금강송의 연륜과 기품을 그냥 보고 지나치기는 아쉬워...

 

 

 

 

 

안채는 170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로 이내번이 창건한 것으로 선교장 건물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부엌이 안방에 붙어 있다.

 

 

 

 

 

동별당은 선교장에서 제일 호사한 건물로 1815년에 지었으며 각종 제사, 잔치 때에 집안 친척들의 숙소와 연회장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건물이 높고 방들이 큼직하며 방과 마루 사이 벽이 문으로 되어 있어서 칸막이 벽이 없어지고 건물 전체가 하나의 방이 되어서 선교장 주인들의 개방적이며 활달한 성품이 건물의 구조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 곳에 있던 건물이 퇴락하여 신축하였다. 

 

 

 

 

 

 

후원(노야원) 높은 언덕에 자리한 선교장 내부 건물 중 유일한 초가집, 초정이 한가롭고 시원스럽다.

 

 

 

 

 

낙락장송의 위엄

 

 

 

 

 

꽃이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 쉬나무

 

 

 

 

 

 

아, 그리고 어찌하여 열화당(悅話堂) 건물을 사진에 담지 못하고 말았다. 머리를 익힐 듯한 한낮의 땡볕이 부담스러워 그늘만 딛고 다니다가 그만...

 

 

열화당은 남주인 전용의 사랑채로서 이내번의 손자 이후가 1815년에 건립하였다.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가운데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에서 따온 것인데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한다’의 뜻을 가졌다.

 

선교장이 충효라는 엄숙한 유교적인 분위기를 벗어나 인간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낭만적인 정감을 얻게 된 것은 바로 활래정과 열화당을 세운 이후의 공이라 할 것이다.

 

 

서쪽 언덕에서 내려다 본 선교장 전경

 

 

 

 

 

 

 

명문가의 전통가옥이 대개 집약되고 폐쇄적인 건물 배치를 이루는 데 비하여 선교장의 건물들은 분산적이고 개방적인 건물 배치를 이룬다는 점, 그래서 선교장은 보면 볼수록 자유스럽고 활달하여 편하게 느껴진다.

 

 

한마디로 선교장은 인간미가 넘치는 주거 공간이다. 게다가 소나무 숲으로 울을 둘렀으니 자연과의 조화미도 좀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