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변산 여행 (2) : 내소사가 좋은 두 가지 이유

모산재 2007. 2. 27. 21:16

 

 

내소사가 왜 좋다는 거지

 

2007. 02. 25

 

 

 

 

내소사가 좋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어느 절이 좋데, 라고 물으면 내 주변 사람들 상당수가 내소사를 꼽는다. 뭐가 좋은데, 라고 물으면 전나무 숲길이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더러는 유홍준씨의 영향인지 대웅전과 꽃창살문을 대기도 하지만.) 전나무 숲길, 아름답다. 월정사의 숲길처럼...

 

그런데 나는 좀 독특하다. 내소사가 좋은 첫번째 이유는 관음봉 기슭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좋아서이다. 그래서 나는 낮에 내소사를 정문으로 드는 법이 없다. 이곳을 찾은 둘쨋날 아침이면 언제나 먼저 직소폭포 가는 호젓한 길을 걷고, 그리고 관음봉 허릿길을 지나 내소사로 내려가는 것이다.

 

 

 

내소사 뒤 능가산 봉우리

 

 

 

관음봉을 향해 땀을 살짝 흘리며 올라와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이곳에서 그림처럼 앉은 내소사를 발견하는 기쁨이란... 그리고 오른쪽 바위 능선 위에 앉아 풍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진다.

 

 

 

 

 

 

 

산에서 내려와 경내로 들어선다, 전나무 숲길이 끝나고 벗나무 숲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드라마 '대장금'을 찍었다는 연지(蓮池)는 재정비하려는지 어지럽게 파헤쳐져 있다.

 

 

 

서쪽 산언덕에 자리잡은 부도밭

 

모두 9기의 부도 가운데 앞줄 4기의 주인은 왼쪽부터 능파당, 만허당, 관해당, 해안당으로 근대의 부도이며, 뒷줄은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인은 알 수 없다고 한다.

 

특히 앞줄 왼쪽의 해안선사의 비에는 당대의 명필 탄허스님이 앞면에는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라 쓰고 뒷면에는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라 쓴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생사가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라는 말의 뜻을 새겨 볼 만하다.

 

 

 

 

 

 

천왕문으로 이르는 벗나무길

 

일주문에서 이어진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연지에서부터 벗나무길이 시작된다. 사이사이 단풍나무도 심었다.

 

 

 

 

 

 

천왕문과 사천왕상

 

편액은 일중 김충현의 글씨이고 주련의 4구는 해안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한다.

 

 

 

 

목탁소리 울리며 종소리 퍼지고 죽비소리 나는구나.
봉황은 은산철벽을 넘어 날으는데,
그 누가 기쁜 소식을 내게 묻는가.
회승당 안에서 바리 가득 공양 올리는 것을...

鐸鳴鐘落又竹篦 (탁명종낙우죽비)
鳳飛銀山鐵壁外 (봉비은산철벽외)
若人問我喜消息 (약인문아희소식)
會僧堂裏滿鉢供 (회승당리만발공)

 

* 회승당 : 설선당 안쪽에 있는 당우

 

 

남방 증장천왕과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과 동방 지국천왕

 

 

 

 

 

천왕문에서 본 절의 전경

 

왼쪽이 보종각, 오른쪽은 범종각. 중앙 느티나무 뒤에 보리수 나무가 서 있고 봉래루를 통해 대웅전을 오른다. 느티나무를 지나 길이 왼쪽으로 살짝 비켜서면서 봉래루로 이어지는 것이 이채롭다.

 

 

 

 

세월을 지켜온 느티나무

 

 

 

 

 

내소사에는 종각이 둘 있다. 하나는 범종각이요, 또 하나는 보종각. 보종각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동종을 따로 보존하고 있다.

 

 

봉래루, 보종각, 그리고 보리수 나무

 

 

 

 

 

고려동종(보물 277호)

 

 

 

 

원래 내변산 청림사터에서 발굴된 것을 조선 후기에 옮겨 놓은 것으로, 통일신라의 형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시대의 특징이 살아 있는 동종이다.

 

 

범종각

 

 

 

 

 

봉래루(蓬萊樓)

 

조선 태종 12년 (1414)에 건립한 전면 5칸, 측면 3칸, 2층 누각의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하였는데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2층 누각을 받치는 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수평을 취하게 하였다.

 

 

 

 

원래 봉래루의 높이는 이보다 50cm 정도 더 낮아 봉래루 마루면이 대웅보전 앞 마당면과 거의 일치했을 정도였다 한다. 양반들이 하마하지 않고 대웅전까지 진입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 하는데 다소 과장된 속설인 듯싶다. 십수 년 전에 봉래루 아래로 사람들이 통과할 수 있도록 일부러 1층 기둥을 높이는 공사를 하였는데, 오히려 가람 전체의 수평적 공간감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이 있다.

 

만세루란 이름이 1926년 이후 봉래루란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원래 실상사(함양 실상사가 아닌, 변산의 사라진 옛절) 누각이었던 봉래루를 옮겨왔다는 속설도 있다. 봉래루에 오르면 정지상의 시와 그 주위로 정지상의 원운을 차운한 시가 여러 수 있으며 중창기, 송덕기 등 36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대웅전(보물 제291호)

 

대웅보전은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팔작집이다.

 

 

 

 

중앙칸이 넓고 기둥은 두껍고 낮아 평활하며, 모서리 기둥은 배흘림으로, 안기둥에는 민흘림으로 하여 안정감이 있다. 공포는 외3 출목 내5 출목으로 내외출목간의 차이가 심한 편이어서, 내부공간에 높은 천장이 만들어졌다.

 

대웅보전 현판의 글씨는 조선후기의 유명한 서화가인 원교 이광사가 썼다. 다소 서툴러 보이는 글씨가 묘한 매력을 풍긴다.

 

 

 

 

 

※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

 

청민선사가 내소사를 중건할 때, 대웅보전 재건을 맡을 목수를 불렀는데, 목수는 묵묵히 나무만 다듬었다. 말한마디 않하고 나무만 깎고 있으니 장난기가 발동한 한 사미승이 목수가 깎고 있는 나무토막 하나를 몰래 감추어 버렸다. 나무를 다 깎았다고 생각한 목수는 깎은 나무토막 수를 헤아렸고 하나가 부족한 것을 알 게 되었다. 목수는 자신의 수양이 아직 부족한 것으로 생각해 청민선사에게 절을 지을 수 없다고 했지만, 청민선사는 그 부족한 한 토막은 이절과 인연이 안 되는 것 같으니 그만 생각을 바꿔 절을 지어달라고 사정했다. 후에 사미승의 소행임을 알게 된 목수는 부정탄 재목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해 그 나무토막을 빼고 법당을 완성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법당안에 오른쪽 윗부분 공포 내5출목의 목침 한개가 비어 있다. 그 옆에도 빈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단청의 유무를 가지고 보면 분명히 알수 있다. 원래 없었던 곳은 단청이 칠해져 있을 것이고, 지은 다음에 나중에 없어진 부분은 단청도 없을테니 말이다.

 

 

※ 관음조 전설

 

법당이 세워진 후 전각에 단청(丹靑)을 하고 벽화를 그릴 적임자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이 나타나서 자신이 벽화를 그릴 터이니 벽화를 그리는 동안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달이 다 되어도 화공이 나오지 않고 기척이 없자, 호기심 많은 이 절의 선우스님이 살짝 문을 열고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화공은 없고 오색 영롱한 관음조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다가 들어오는 스님을 보더니만 단청 한 곳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날아간 그 관음조는 능가산 중턱에 앉았는데, 그때부터쯤 노스님이 그곳에 암자를 짓고 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 스님을 관음조의 화신이라고 불렀으며, 이후에도 암자에 스님들이 살았으나 어느때부터 암자는 폐쇄되고 터만 남게 되었다. 이제 그 암자터를 복원하여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봉안하니 모든 공덕을 성취하는 관음기도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전 동쪽 도리는 바닥만 채색되고 덧그림이 빠져 있다고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의 목수는 호랑이가 현화(現化)한 대호선사(大虎禪師)이고 벽화를 그린 관음조는 관세음보살의 현화라고 한다.

 

 

두 전설이 산청 율곡사에 얽힌 전설과 너무 닮았으니, 유형화된 전설이 아닌가 싶다.

 

 

 

삼존불

 

대웅보전 안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백의관음보살좌상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이 그림은 바위에 앉아있는 백의를 입은 관음을 묘사한 것으로 조선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관음보살의 눈을 보면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 관음보살 눈동자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데,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는 속설이 있다.

 

불단의 기둥을 뒤로 물려 넓은 내부공간을 이루며 상부의 포작들은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조각되어있고, 천장에도 가득히 장식을 했다. 안팎 모두 장식으로 충만해 있지만 적절히 절제되고 통일되어 있어서 번잡한 인상은 주지는 않는다.

 

 

 

 

 

영산회괘불탱(보물 1268호)

 

이 괘불은 길이 10.50m, 폭 8.17m로 본존불인 석가불은 중앙에,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다. 그 뒤로 다보여래와 아미타여래, 관음보살, 세지보살 등의 4보살이 서 있는 7존 형식구도를 이루고 있다. 각 존상들은 둥근 얼굴에 원만한 체구를 지니며 뺨과 눈자위, 턱밑, 손과 발은 옅은 분홍색으로 처리해 밝아 보인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연한색을 넣어 경쾌함을 느끼게 한다.

숙종 26년(1700)에 그려진 이 괘불은 콧속의 털까지 묘사하는 선의 정밀함, 화려한 옷의 무늬와 채색으로 더욱 돋보이는 작품으로 17세기말에서 18세기초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며 각 인물마다 명칭이 있어 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중한 작품이라고 한다.

 

 

 

 

 

대웅전 꽃창살

 

대웅전 정면 창호는 2짝-4짝-2짝 구성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창호에는 정교하게 해바라기꽃, 연꽃, 국화꽃 등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새긴 모양이 문마다 다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전설 속의 목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다. 수백년의 세월 속에 채색은 다 지워지고 나무결 무늬만 남아있지만 만져 보면 감촉이 참 좋다.

 

 

 

 

 

 

 

단층의 흔적

 

 

 

 

 

대웅전을 돌아보고, 왼쪽의 삼성각까지 보고 나면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든다.

 

이 절에는 어느 절에나 다 있는 명부전(또는 지장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그 비밀은 일주문을 들어서서 전나무 숲길 중간쯤에서 오른쪽 사이길로 가면 나오는 지장암이란 부속 암자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내소사 삼층석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나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높이는 3.46mm 이다. 2층 기단 위에 3층탑이 올려져 있으며, 맨 아래의 받침대는 하나의 돌을 이용한 것이다. 몸체도 층마다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각 면마다 기둥을 새겼다. 몸체와 지붕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와 높이가 급격하게 줄었으며, 지붕들의 경사도 심한 편으로 날렵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 뒤편 언덕에 핀 봄까치꽃

 

 

 

 

 

설선당(說禪堂) 요사 문에 걸린 글꽃...

 

 

 

 

 

요사채 설선당(說禪堂)

 

내소사의 대중 요사로서 승려들의 수학 정진과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이다. 

 

 

 

 

□자형의 폐쇄적인 건물로, 지면의 높이 차를 이용하여 건물의 일부를 2층으로 구성하였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넓은 대방과 승방, 부엌 등이 배치되고, 2층의 고루(高樓: 높은 다락집)는 각종 곡물 등을 저장할 수 있도록 벽면에 여러 개의 환기창을 설치하였다. 건물의 지붕선이 뒤쪽에 보이는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이 건물은 1640년(인조 18)에 내소사를 중건할 때 같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요사채 오른쪽으로 돌아 뒤편으로 약 1km쯤 올라가면 청련암이라는 아담한 암자가 있다. (부산 범어사에도 청련암이 있는데 분위기가 아주 대조적이다.) 푸른 대나무숲을 배경으로 곰소만의 바다 조망이 일품인데다, 겨울철의 설경 또한 빼어나다고 한다. 한때 여운형, 송진우, 김성수 등이 일제의 피검을 피하기 위해 머물기도 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외진 곳이어서 챙겨서 들르기 쉽지 않은데 시간에 쫓겨 가 보지 못해 아쉽다.

 

 

내소사 홈페이지 자료

 

 

 

 

나는 내소사를 찾으면 꼭 1박을 하는 일정을 선택한다. 내가 내소사를 정문으로 드는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지는 밤이다.

 

대개 변산을 찾을 때면 채석강에서 일몰을 보고, 해가 진 뒤 깜깜해져서야 내소사 앞의 산장 민박집으로 찾아 든다. 저녁 시간은 동료들과 올 때에는 대개 술자리로 이어지지만 아이들과 올 때에는 저녁을 지어먹고 간단한 친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시간이 된다. 그리고 자정에 가까워지면 내소사를 들어선다. 함께하고픈 몇몇 사람들과...

 

 

노랑상사화 새싹

 

 

 

 

개복수초

 

 

 

 

개구리발톱

 

 

 

 

 

 

전나무 숲길

 

일주문에서부터 이어지는 숲길이다. 150 년 정도 된 전나무 500여 그루가 숲 터널을 이루어 청정한 기운이 절로 느껴진다.

 

 

 

 

 

깜깜한 밤 전나무 숲길을 걸어보라. 어둠이 주는 외경, 보이지 않으며 예민해지는 코와 귀와 살갗으로 새롭게 느껴지는 세상. 숲은 향기롭고 바람은 맑고 부드럽다. 생명들이 속삭이는 소리, 존재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존재들과 이어지는 소리...

 

어둠의 터널을 한동안 걷다보면 어느새 달빛처럼 밝혀진 절마당으로 들어선다. 밤에 보는 4천왕은 얼마나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다음날 아침 폭포를 돌아와 다시 들를 때에 4천왕을 다시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

 

달빛처럼 적막한 경내, 아무 소리 내지 않고 가만가만 돌아보기만 해도 좋다. 함께하는 사람이 없다는 듯이...

 

내소사가 좋은 두번째 이유다.

 

 

 

 

 

 

 

더보기
※ 내소사(來蘇寺)의 역사와 유래

능가산(관음봉:433m) 가선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능가산 내소사'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는 백양사의 말사로 있었으나, 지금은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의 말사이다.

백제 무왕 34년(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는데, 언제 '내소사'로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벡제 명망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절에 들러 시주했기 때문에 소래사가 내소사로 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고려 때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인조 11년(1633)에 청민(淸旻)선사가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지었는데, 이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 사찰 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을만큼 정교하고 예술적이다.

예전에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함께 '변산의 4대 명찰'로 꼽혔으나 다른 절들은 전란 통에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내소사만이 남아 있다.

 

 

 

 

 ※ 내소사 전각 배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