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전망 아름다운 멋진 암자, 산청 둔철산 정취암

모산재 2007. 1. 16. 23:18

 

산청 둔철산 정취암(淨趣庵)

 

2007. 01. 04

 

 

 

 

정취암을 산청의 수종사라고 할 수 있을까. 둔철산 거의 꼭대기에 가까운 절벽 위에 자라잡은 정취암을 오르는 길은 양수리 운길산의 수종사를 오르는 길만큼이나 좁고 가팔라 아찔하기만 하다. 몇 년 전 가족들과 함께 찾아 느꼈던 감동을 이번 여행을 함께 했던 분들께도 전하고 싶어 다시 찾았다.

 

 

 

 

 

정취암은 산청에서 동남 방향 약 10km에 위치한 신등면 양전리 대성산(일명:둔철산)의 기암절벽 사이에 자리한 사찰로 그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간다 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신라 신문왕 6년(병술, 서기 686년)에 동해에서 장육금신(부처님)이 솟아올라 두 줄기 서광을 발하니 한줄기는 금강산을 비추고, 또 한줄기는 대성산을 비추었다. 이때 의상조사가 두 줄기 서광을 쫓아 금강산에는 원통암을 세우고 대성산에는 정취사를 창건하였다.

 

정취암에서 북쪽으로 약 4km에 위치한 율곡사는 원효스님이 창건하였는데, 정취사와 율곡사에 각기 주석하고 있던 의상 스님과 원효스님께서는 수시로 왕래하며 수행력을 서로 점검하고 탁마 수행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 중기의 기록에는 정취사로 사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 사이에 조성된 불화에는 정취암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취암은 정취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한국 유일의 사찰이라고 한다. 신라 헌강왕 2년(무인, 858년) 굴산 범일선사가 낙산사에 봉안했던 정취보살상을 고려 고종 41년(갑인, 1254년)에 명주성이 몽고병에 함락될 때 야별초 10인과 사노인 걸승이 땅속에 묻어 난을 무사히 피하게 되었다. 그 후 기림사 주지 각유선사가 이 정취보살상은 국가의 신보이니 어부(궁궐)에 모실 것을 왕에게 아뢰어 왕의 명을 받아 어부에 모시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3년(갑오, 1354년)에 화경, 경신 두 거사가 정취사를 중건한 후 어부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정취사로 이운하여 봉안하게 되었다. 정취사는 고려 공민왕의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 원나라와 이후의 명나라로부터 관섭을 극복하려는 개혁 세력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는데, 산청군에 전해지는 문가학과 정취암에 얽힌 설화는 당시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간의 갈등을 설화로 각색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취암은 창건 이래 고승납자들의 요결처가 되었으며,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신 고암 대종사와 성철 대종사도 한때 주석하며 정진하였다. 또한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정취관음보살의 가피력(加被力)으로 보리대원을 성취하여 최고의 관음 성지로 그 명성이 널리 전하여졌다.

그러나 조선 효종 3년(1652년) 4월 26일 원통보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이 전소하였으며 이때 정취보살상도 함께 소실되었다. 효종 4년(1653년)에서 9년(1658년) 사이에 봉성당 치헌선사가 중건하였는데 현재의 목조관음보살좌상(정취관음보살상)은 소실된 정취보살상을 재현하여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정취암의 중창조로 치헌선사가 입적한 음력 12월 20을 개산일로 정하여 개산제를 봉행하고 있다.

 

 

 

 

 

 

● 원통보전(圓通寶殿)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봉안하는 전각으로 '원통전', '관음전', '보타전'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부른다.

 

'원통보전'이란 이름은 천수천안(눈이 천 개, 손이 천 개)으로서 원통 삼매(圓通三昧)에 들어 일체 모든 중생들의 소리와 모습을 동시에 모두 듣고 보아 구원하는 관세음보살의 묘용(妙用)을 지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정취암 원통보전에는 주불로 정취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화로는 정취관음탱화, 동편에 신중탱화, 서편에 지장보살상과 지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응진전應眞殿)

 

응진전은 아라한을 봉안하는 전각으로 나한전(500라한, 16라한)이나 영산전 등으로도 부른다. 

 

가운데 주불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좌우에 16분 혹은 500분의 아라한과를 증득한 부처님의 제자들을 차례로 배열하여 봉안한다. '응진'이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능히 받을 수 있는진리를 깨달은 이를 말한다.

정취암 응진전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고, 28대 조사인 달마대사상과 16아라한상을 봉안하고 있으며 나한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칠성(七星)과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세 성인을 봉안하는 전각이다.

 

 

 

 

칠성(七星)은 북두칠성을 말한다. 원래 도교에서 섬기는 신앙의 대상이었다가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 안으로 습합되었다. 도교에서 말하기를 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맡았다하며 이것이 곧 칠성여래, 칠원성군이라 한다.

 

산신(山神)은 산을 수호한다는 신령. 산신으로 원래는 토속신앙이었으나 불교가 전래되면서 다른 토속 신앙들과 같이 불교에 습합되었다. 호랑이와 곰 등은 산신 신앙의 대상이다.

 

독성(獨聖)은 즉 나반존자로 천태산에서 혼자 도를 닦아 연각을 성취하였으므로 독성이라 일컫는다. 연각은 12연기의 이치를 관하여 번뇌를 끊고 진리의 깨달음을 증득하거나, 떨어지는 꽃잎과 낙엽 등의 경계를 보고 무상적멸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삼성각에서 내려다본 조망

 

 

 

 

뒤편 바위 위에서 내려다 본 정취암

 

 

 

 

 

 

뒤편 바위에서 내려다 본 삼성각

 

 

 

 

뒤편 바위 위에 쌓은 돌탑

 

 

 

 

 

 

 

정취암을 돌아본 후 가까운 곳에 있는 밤절, 율곡사로 향하였다.

 

 

 

 

※ 정취암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두 가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정취암 전설 1> 정취암과 여우설화

 

고려시대 공민왕은 왕자 시절 원나라에 불모로 붙잡혀 갔다. 나라를 빼앗긴 국치의 모진 수모를 뼛속 깊이 새기며 절치부심의 나날을 피눈물로 보내다 돌아와 후일 왕이 되었다. 왕이 된 공민왕은 지금의 간도 땅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국가의 자주권 회복과 왕실의 권위 회복을 위한 개혁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신돈스님을 등용한 후 수구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려다 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개혁의지가 좌절되었다.

공민왕이 신돈스님을 등용한 후 국가의 자주권 회복과 수구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려 할 무렵을 전후하는 시기에 정취암은 개혁파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간접으로 시사하는 설화가 지금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다.

고려 말기 어느 때에 정취암 바위굴에는 500년 묵은 여우가 살고 있었다. 이 여우는 매년 섣달그믐 밤이면 사람을 홀려서 한 명씩 죽였다. 그리하여 정취암에서는 매년 섣달 그믐이 되면 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이 절을 비우고 피신을 하게 되었다. 절에서 대중들이 섣달 그믐마다 피신을 하자 그 피해가 인근 마을로 이어졌다.

이때 정취암 10여리 밖 소이 마을에 문가학이라는 선비가 살았다. 문가학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담대하고 문무를 겸비하여 그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바위굴의 500년 묵은 여우의 폐해가 널리 펴지고 인근의 큰 우환거리로 전해지자 문가학은 그 여우를 손수 잡기로 하였다.

문가학은 섣달 그믐날 술을 한 말 짊어지고 정취암에 올라가 밤이 깊어지도록 기다렸다. 간간히 스쳐지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만이 고즈넉한 산사의 밤을 지키는 듯 사위가 적막 그 자체였다. 이경이 지나고 삼경도 깊어갈 무렵 한 줄기 스산한 바람과 함께 나타난 여인이 문밖에서 서성거리며 문을 기웃거렸다.

문가학은 이것이 요괴이구나 마음으로 생각하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대는 무슨 연유로 이 깊은 밤에 산사를 찾았느냐."고 묻고 외간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밖이 추우니 방으로 들어오게 한 후 자리에 앉으라 하였다. 방으로 들어와 불빛에 비친 용모를 보니 아찔할 정도로 미색이 빼어난 미인이었다.

문가학은 "적적한 밤중에 이토록 빼어난 용모를 갖춘 귀인을 만났으니 어찌 술이 없을 수 있겠는가, 마침 좋은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자."고 하였다. 한담을 섞어가며 함께 술을 마시다 보니 밤은 깊어가고 술 또한 바닥이 드러나서 만취가 되었다. 여인이 술에 취하자 잠이 들어서 비스듬히 기대어 옆으로 눕는 것을 보니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의 화신이었다.

문가학은 미리 준비한 끈으로 여우의 손과 발을 묶었다. 여우가 깜짝 놀라서 깨어나더니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문가학은 꾸짖어 말하기를 "요사스러운 짓을 해서 많은 작폐를 하였으니 그 죄가 죽어 마땅한지라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우가 애원하며 말하기를 "나에게는 온갖 일을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둔갑술 비결이 있는데 살려주면 대신 그  책을 주겠다."고 하였다. 문가학은 마음속으로 기뻐하였으나 여우에게 속을 보이지 아니하고 먼저 그 책을 보고 난 후 사실과 다르지 않다면 살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여우가 굴로 들어가 둔갑술 비결이 적혀 있는 책 한권을 들고 나와서 건네주었다. 문가학은 둔갑술 비결이 적혀 있는 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지막 한 장이 남아 있을 때까지 독서 삼매에 빠져들어 보고 있었다. 그 때 여우가 끄나풀을 몰래 풀고 갑자기 책을 낚아 채어서 굴속으로 도망쳐 사라져 버렸다.

문가학은 지금까지 본 둔갑술 비결대로 둔갑술을 부려 몸을 바꾸어 보았다. 그런데 둔갑이 완전히 되지 못하고 옷고름은 감출 수 없었다. 그 후 문가학은 과거에 급제하여 내한 벼슬을 하면서 여우에게 배운 둔갑술로 새로 변하여 궁중에 들어가 은자(은으로 만든 돈)를 빼내어 거사 자금으로 쓰다가 발각되어 역모죄로 참수되었고 그 집터도 못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밖에 둔갑술로 은기둥을 만들게 하여 남쪽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관병이 뒤쫓아 고향 마을을 찾아와서 가산을 적몰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국가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수구 보수 세력들을 척결하여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려던 공민왕의 개혁의지에 뜻을 함께 하던 개혁파 세력들이 일으킨 거사와 관련된 이야기로 사료된다. 정취암에서 멀지 않는 청곡사에 신돈스님이 주석하였고, 공민왕 3년에 스님이 아닌 화경과 경신이라는 두 거사가 정취암을 중수한 것과 중수 후 왕실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이곳 정취암에 옮겨와 봉안 한 것, 목화 씨앗을 중국에서 몰래 가져와 우리나라에서도 무명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한 삼우당 문익점 선생이 문가학과 같은 시기에 살고 같은 남평 문씨 일족이며, 또한 역모에 연루된 점등 많은 관련 증거들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여우와 둔갑술은 무엇을 상징 할까? 여우는 거사를 위한 어떤 계획이거나 결사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둔갑술로 궁궐에 들어가서 거사 자금인 은자를 빼내왔다는 것은 왕실에서 거사 자금을 비밀리에 주었거나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는 상징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설화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하여 유추해볼 때 정취암은 당시 고려 말 국운이 쇠퇴하여 진나라를 새로 일으켜 세우려는 국가 개혁 의지에 대한 모종의 결집체였거나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설화이다. (정취암 홈페이지 인용)

 

 

<정취암 전설 2>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에 관한 전설

 

인근에 있는 율곡사에 거처하던 원효대사가 보리죽을 먹고 있었는데, 정취암에 머물던 의상대사는 하늘에서 내려준 공양을 받고 있었다.

어느날 정취암으로 의상을 찾아온 원효가 점심 공양 시간이 되었는지라, "자네는 천공을 받아 먹고 있으니 어디 나도 함께 드세" 라고 하면서 기다렸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천녀(天女)가 내려 오지 않으므로 원효가 그만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제야 天女가 공양을 바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이었다.

"왜 이제야 오느냐" 고 물으니 천녀가 말 하기를
"원효대사를 옹위하는 팔부 신장(神將)이 길을 가로 막아서 정취암으로 올 수가 없었다" 라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깨달은 의상이 자신이 원효대사에게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그 뒤로는 천공을 사양 하였다고 한다.

 

 

 

 

● 산청 정취암 목조관음보살 좌상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314호. 정취암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는 관음보살좌상이다. 정취암은 의상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관음성지로 유명하다. 이 불상은 불신(佛身)과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낮은 대좌가 하나의 목재로 조성되었다.

자세는 등을 세우고 머리부분을 약간 앞으로 내민 모습의 가부좌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은 중앙에 큰 화불(化佛)과 앞뒤로 불꽃무늬 장식이 달려 있으나, 후대에 따로 만들어 부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네모 반듯하며 턱이 둥근 형태이고 가늘고 긴 눈, 완만한 콧등, 입술 양끝에 양감을 주어 미소를 머금은 모습등이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짧은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를 얕게 표현하였다. 옷주름선은 대체적으로 간략한데, 반가부좌하여 드러난 오른발 밑으로 보이는 군의자락을 종아리와 평행하게 드리운 것이 특징적이다.

규모는 50cm 정도의 크기로 안정감이 있고 단아한 인상을 주는 작품으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 산청 정취암 산신 탱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43호. 이 그림은 1833년(순조33)에 제작된 것으로 가로, 세로가 각기 150cm 크기의 불화이다. 불화라고 하지만 산신이 호랑이를 타고 행차하는 것을 협시동자(挾侍童子)가 받들고 있는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의 주제는 불교적이라기 보다 오히려 토속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의 혼합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