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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선생의 발자취 (1) : 덕천서원(德川書院)

모산재 2007. 1. 16. 16:04

 

남명 선생의 발자취 (1) 덕천서원(德川書院)

 

2007. 01. 04

 

 

 

산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식사도 미룬 채 지리산의 한 자락인 밤머리재를 넘어서 덕산으로 향한다. 오전에 남명 선생의 흔적을 살펴본 다음 정취암과 율곡사를 들러서 서울로 향하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다.

 

덕산에 도착하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장이 섰다. 장 구경은 덕천서원을 둘러 본 다음 하기로 한다.

 

 

덕산에서 다리를 건너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것은 남명 선생의 시조비이다.

 

 

 

 

 

두류산 양단수(頭流山 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겻세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이 시조는 남명 선생이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은둔 생활하면서 쓴 것인데, 이 시기에 씌어진 또 다른 시조가 있는데 바로 다음 작품이다.

 

 

삼동(三冬)에 베옷 입고 암혈(巖穴)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볓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 지다 하니 눈물 겨워 하노라.

 

 

벼슬하지 않은 가난한 선비로 초야에 묻혀 지내다 중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그 슬픔을 표현한 시조이다.

 

 

 

덕천서원 앞에 이르면 강언덕에 서 있는 세심정(洗心亭)과 그 옆에 서 있는 '욕천(浴川)'이란 글을 새긴 석비를 볼 수 있다.

 

 

 

● 세심정(洗心亭)

 

세심정은 1576년 덕천서원을 세울 때 함께 세운 정자라고 한다. 주역에 나오는 '聖人洗心(성인세심)'이란 말을 취하여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세심정'이란 이름의 정자는 다른 서원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데, 물가 등 서원의 바깥에 자리잡고 있어 공부를 하다가 머리가 번잡해진 유생들이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세심정 바로 옆에는 '욕천'이라는 제목의 시를 새긴 빗돌이 서 있는데, 티끌 하나라도 담지 않겠다는 선생의 선비정신이 조금 섬찟하다 싶을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몸에 쌓인 사십 년 간의 허물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섬 맑은 연못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만약 티끌이 오장 속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바로 지금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리.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 9) 남명 조식(曺植)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사림들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하였다. 1609년(광해군 1)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다. 선생이 수양을 하던 산천재(山天齋)와 묘소도 가까운 곳에 있다.

 

조식은 1501년(연산군 7년) 삼가현(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에서 출생하였는데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 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덕산 입구의 입덕문(入德門)을 지나면 수령이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 덕천서원에 이른다. 지리산으로 접어드는 도로, 덕천강가에서 바라보면 홍살문이 보이고 태극문양의 솟을삼문인 시정문(時靜門)이 우뚝 솟아 있다.

 

 

 

● 홍살문과 시정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그 앞쪽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곳이고,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실천적 유학자 남명 선생의 사상 핵심은 경(敬)과 의(義)이다. 이러한 경과 의의 사상은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로 표현되는데,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 경(敬)이며, 행동을 반듯하게 하는 것이 의(義)"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주역의 '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남명 선생은 성성자(惺惺子)라는 쇠방울을 차고 다니며 '경'의 정신을 스스로 일깨웠으며. 작은 칼을 차고 다니며 '의'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다.

 

 

 

 

 

이런 선생의 사상은 소위 '단성소(丹城疏)'로 잘 알려진 '을유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남명이 55세(1555년.명종 10)되던 해 10월 11일, 삼가의 뇌룡정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중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한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당시는 을유사화에 이어 문정왕후와 그 외척인 윤원형 일가가 세도를 부리며 전횡을 일삼던 시절이었고 뜻있는 선비들은 낙향하여 실의를 달래던 때였다.

선생은 고지를 받은 한 달 후 상소를 올린다.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그릇되어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가 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입니다. (중략) 대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고아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 하늘의 재앙과 억만 갈래로 갈라진 민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수습하시겠습니까.

 

 

대비를 '과부'로, 왕을 '고아'로, 이 과격해 보이는 표현을 서슴지 않은 선생의 기개가 어떠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상소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지만,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의 상소에 죄를 물어서는 안된다는 간언으로 화는 면할 수 있었다.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오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으로 중앙에는 조식의 위패, 오른쪽에는 그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남명선생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덕천서원을 돌아본 뒤 돼지국밥집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거나하게 하고(주인 아주머니가 덤으로 내놓는 수육까지 배불리 먹고) 시골장을 흥미롭게 돌아본다.

 

 

 

 

 

 

 

이곳이 감이 유명한 곳이라 시장의 주 종목이 곶감이다. 품질 좋은 것으로 반 접에 3만원 정도의 값이었는데, 선물용으로 구입한 뒤 바쁘게 산천재로 이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