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만해· 동리의 발자취가 서린 사천 봉명산 다솔사

모산재 2007. 1. 16. 00:45

 

만해 한용운 선생이 한때 머물렀고, 김동리가 소설 '등신불'의 모티프를 얻은 절이라는 강 선생의 강추로 다솔사(多率寺)를 찾았다. 도착하니 다섯 시에 가까워 어둠이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바깥 주차장에서부터 오르는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고즈넉하여 정밀한 산사의 분위기를 미리 보여 주는 듯하다. 소나무의 검푸른 빛의 이미지로 엄숙하게 다가왔던 다솔사가 나중에 알고 보니 화려한 가을 단풍으로도 유명하다.

 

 

여느 절이라면 숲길이 시작되는 산길 입구쯤에 일주문이 서 있을 만한데 일주문이 없다.

 

 

 

 

 

 

 

다솔사는 봉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봉암산을 비롯해 해발 300m가 넘는 봉명산, 천왕산들이 연결되어 있어 등산하기에도 좋고, 국립공원인 다도해를 바라보는 조망이 아름다운 절이라고 한다.

 

다솔사(多率寺)는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이다. 511년에 연기조사가 영악사(靈嶽寺)라 하여 처음 세웠고 636년 다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676년 의상대사가 영봉사(靈鳳寺)로 칭한 뒤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다시 손질하여 고쳐 짓고 다솔사라 하였다. 1326년에 나옹이 중수한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불탔으나 숙종 때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현재 대양루를 제외한 건물은 1914년 12월의 화재로 모두 타버린 것을 이듬해 다시 세운 것이다. 절 안에는 대양루(大陽樓, 대웅전, 나한전, 천왕전, 요사를 비롯한 1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과 고려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보안암 석굴, 부도군 등이 있다.

 

 

 

 

 

다솔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소나무가 많은 절'이라는 것으로 이에 대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는 이 절이 자리한 봉명산이 대장과도 같아 '군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이러한 내용은 「다솔사명부전대양루사왕문중건기」에 전하는데, 그 관련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 절의 주악(主嶽)은 마치 전후좌우에 대궐을 지키는 병사들이 둘러처져 있는 것과 같은 대장의 모습으로 앉아 있다. 사찰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것과 같다’는 데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절 앞마당의 고사목

 

 

 

 

 

다솔사에는 일주문만이 아니라 천왕문도 따로 없다. 절의 규모가 작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담하고 소박한 절이다.

 

돌계단 위의 저 대양루(大陽樓)를 통해 올라서면 바로 적멸보궁이 나타난다.

 

 

 

 

 

 

경내에 들어서면 본전인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극락전과 응진전이 자리하며, 극락보전과 마주보며 대양루가 있다. 대양루 양쪽에는 요사가 각각 위치한다. 오른쪽에 있는 요사는 안심료인데, 종무소와 식당을 겸한다. 안심료 뒤에도 승방 등 여러 채의 요사가 있다.

 

 

 

● 대양루(大陽樓)

 

다솔사의 경내 가장 앞에 있는 2층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은 집이다. 적멸보궁과 마주하고 있으며, 아래 ·윗층의 높이가 모두 13m로 전부 36개의 아름드리 큰 기둥이 육중한 건물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적멸보궁을 향한 쪽은 개방되어 있으나 좌우 양쪽과 뒷쪽에 벽을 설치하여 막았고, 뒷쪽에는 창문을 달아 놓았다. 앞마당과 누각의 마루는 떨어져 있고 오른쪽 퇴칸 앞으로 돌다리를 걸쳐 놓아 출입하도록 하였다.

 

아래층은 본래 출입문 역할을 하였으나 누각 왼편에 새로 돌계단이 생기면서 지금은 칸막이가 생겨 창고와 기타 용도로 이용되고, 2층은 수도장일 뿐 아니라 신도들의 집회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대양루 위에는 추사 김정희의 필적인 '유천희해(游天戱海)'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누구의 손을 탔는지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 '유천희해(游天戱海)

위나라의 종요(151~230)는 빼어난 서예가였다. 양나라 원앙(袁昻)은 <고금서평(古今書評)>에서 말하길 “종요의 글씨는 뜻과 기운이 조밀하면서도 아름다워 마치 나는 기러기가 바다를 희롱하고 학이 춤추면서 하늘을 노니는 것 같으며 행간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서 실로 지나가기가 어렵다.(鍾繇書 意氣密麗, 若飛鴻戱海, 舞鶴遊天, 行間茂密, 實亦難過).”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서예의 기질이 한산하고 표일한 것을 형용한 '유천희해(游天戱海)'란 말이 생겼는데 추사도 이 말을 즐겨썼다고 한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다솔사의 금당으로 경내보다 훨씬 높게 쌓은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다포계에 내외 3출목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원래 대웅전 건물이었으나 1978년 후불탱화 속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되면서 적멸보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적멸보궁 안에는 닫집과 불단을 마련하여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의 모습인 와불상을 금동으로 모셨고, 그 뒤로 안상(眼象) 모습의 유리창을 내어 적멸보궁 안에서 뒤에 있는 사리탑을 바라보고 친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안에는 근래에 조성한 신중탱과 조선시대 후기의 동종(銅鍾)이 있다.

 

 

 

 

 

 

↓ 적멸보궁내의 와불(부처님 열반상)과 창을 통하여 보이는 진신사리탑

 

 

 

 

 

● 진신사리탑

 

1978년 대웅전 삼존불 후불탱화 속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되어 익산미륵사지 석탑 형태의 높이 2.3m 30평 정도의 성보법당을 탑 안에 설치하고 적멸보궁 사리탑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시계 방향으로 탑을 세 바퀴 돌며 기도하면 소망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신도들이 탑돌이를 하기도 한다.

 

 

 

 

 

 

진신사리탑 뒤편 언덕은 차밭인데, 자연차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차밭은 일제시대 당시 주지였던 최범술 스님이 인근에 자생하던 차나무 씨를 받아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차가 바로 다솔사의 명품인 반야로(般若露) 차이다. 품질이 좋으며 주차장 옆에 있는 보제루에서 직접 판매하고 있다.

 

 

● 극락전과 응진전

 

둘다 맞배지붕집이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과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이 있고, 응진전에는 16나한을 모시고 있어 나한전이라고도 불린다.

 

 

 

 

 

 

● 다솔사와 김동리의 <등신불>

 

다솔사는 일제 강점기에 불교중심 민족운동 비밀결사대의 근거지로,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기구인 백산상회의 연락처로 이용되었다고 하며, 만해 한용운이 수도하던 곳으로, 또 이곳에 머물던 김동리가 소설 '등신불'의 착상을 얻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시 만해 한용운, 김동리의 맏형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주지) 등이 이곳에서 교유했던 모양이다.

 

경주가 고향인 김동리는 김범부가 일본 경찰에 쫒겨 더 이상 서울 생활이 어렵자 그를 따라 1935년 다솔사에서 두 달 간, 해인사에서 6개월 간 같이 머문다. 이어 1937년 3월 다솔사의 재정으로 절에서 4㎞ 떨어진 봉계리 원전에 '광명학원'이 설립되자 43년 10월 폐교될 때까지 강사로 학동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시절 우연히 이곳에서 만해 한용운, 다솔사 주지 최범술, 친형인 김범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등신불>을 착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등신불>을 쓰게 된 동기는 1937년 가을인가, 38년의 봄인가, 그 무렵 만해(卍海) 한용운씨가 다솔사(多率寺)에 왔을 때의 일이다. 나는 다솔사에서 10리 남짓 떨어진 원전(院田)이란 곳에서 야학 선생(夜學先生)(광명학원.光明學院)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연락을 받고 다솔사로 달려갔던 것이다. 절 큰 방에는 만해와 내 백씨(伯氏-凡父)와 그 절의 지주인 석란사(石蘭師)가 앉아 있었다. 석란사는 엽차를 끓여서 모두에게 대접했다.

차를 마실 때 만해가 무슨 이야기 끝에, "범부, 우리 나라 승려 중에서 분신공양한 분이 있소?" 하고 내 백씨에게 물었다.
"형님이 못 보신 걸 난들 어떻게 알겠소." 백씨의 대답이었다.
"분신공양이 뭡니까?" 내가 물었다.
석란사가 설명해 주었다.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일찍부터 충격 받은 이야기는 작품으로 멍을 푸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랄까.

 

 

분신공양 이야기에 '심한 충격'을 받은 동리는 20여 년이 지난 뒤인 1961년 11월에 ‘만적’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등신불>을 탈고하게 된다. 물론 내용은 모두 허구, 동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김동리의 다른 작품들, '황토기', '불화' 3부작, '극락조', '저승새', '찔레꽃', '눈내리는 저녁에' 등의 작품 등도 이곳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씌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다솔사 가람 배치도

 

 

 

 

 

 

 

※ <등신불>에 대한 작가의 변

 

나의 대표작으로 많이 거론되는 작품이라면 단편에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까치소리>, <늪> 등이요, 장편은 <사반의 십자가>, <을화> 등이다.

나더러 한 편을 택해야 한다면 <을화>를 들겠으나, 이 작품은 그동안 영화 TV 등으로 줄거리가 많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단편 중에서 한 편, <등신불>을 취하기로 한다.

<등신불>을 쓰게 된 동기는 1937년 가을인가, 38년의 봄인가, 그 무렵 만해(卍海) 한용운씨가 다솔사(多率寺)에 왔을 때의 일이다. 나는 다솔사에서 10리 남짓 떨어진 원전(院田)이란 곳에서 야학 선생(夜學先生)(광명학원.光明學院)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연락을 받고 다솔사로 달려갔던 것이다. 절 큰 방에는 만해와 내 백씨(伯氏-凡父)와 그 절의 지주인 석란사(石蘭師)가 앉아 있었다. 석란사는 엽차를 끓여서 모두에게 대접했다.

차를 마실 때 만해가 무슨 이야기 끝에,“범부, 우리 나라 승려 중에서 분신공양한 분이 있소?”하고 내 백씨에게 물었다.“형님이 못 보신 걸 난들 어떻게 알겠소.”백씨의 대답이었다.“분신공양이 뭡니까?”내가 물었다. 석란사가 설명해 주었다.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일찍부터 충격 받은 이야기는 작품으로 멍을 푸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랄까.


《 ‘등
신불(等身佛)’은 중국의 양자강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金佛閣) 속에 안치된 불상이었다. ‘등신불’ 또는 그냥 금불(金佛)이라고도 불렀다.

작중 인물 ‘내’가 정원사를 찾은 것은 1943년의 일이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 중이었는데,‘나’는 학도병으로 끌려 나가 있었다. 그 무렵, 내가 소속된 부대는 서주(徐州)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나갈 것이라 했다. 나는 결심하고 탈출했다. 나는 마침 불교학과에 재학 중이었으므로, 중국 승려로서 일본에 와서 유학하고 돌아간 사람의 명단을 미리 조사해 가지고 있었다. 그 명단 가운데 진기수(陳奇修)란 이름을 발견하고 첩공암(捷空庵)으로 그를 찾았다. 그는 처음 내가 일본군 복장을 입었으므로 경계하는 표정이었으나, 「원면 살생 귀의 불심」(願免殺生 歸依佛恩)이란 나의 혈서를 보고 나를 본사(本寺)인 정원사로 보내 주었던 것이다.

정원사에는 원혜대사(圓慧大師)라는 노승이 있었다. 진기수씨의 법사(法師)였다. 나는 원혜대사의 보호 아래 그 절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원혜대사의 시봉인 혜운(慧雲)의 안내로 이 절의 모든 건물 속을 모두 다 돌아보았으나, 금불각만은 내부 구경을 시켜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간곡한 부탁으로 드디어 금불각을 구경하게 되었다. 거기 등신불이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머리 위에 향로를 이고 두 손을 합장한, 고개와 등이 앞으로 좀 수그러진, 입도 조금 헤벌어진, 그것은 불상이라고도 할 수 없는, 형편없이 초라한, 그러면서도 무언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사무치게 애절한 느낌을 주는 등신대(等身大)의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이었다.

나는 처음 저항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불상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었다.“나도 처음엔 이상했어. 허지만, 이 절에선 영검이 젤 많은 부처님이라오.”혜운의 말이었다. 혜운의 설명을 들으면, 당 나라 때의 스님인데 분신 공양(焚身供養)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자 하도 영검이 많아 불에 탄 몸에다 도금을 입혀 금불(金佛)을 만들고 크기가 본디 사람과 같으므로 ‘등신불(等身佛)’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납득되지 않는 점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보다도 성불이 되었으면 부처님의 상호(相好)가 되어야 할 터인데 그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얼굴에서는 괴로움 많은 인간을 느낄지언정 원만한 부처님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의 가슴 속에 뭉클하게 뭉친 충격의 덩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나의 이러한 심정을 살핀 원혜대사는 금불각 담당자에게 지시하여 지금까지 엄비(嚴秘)로 되어 있던 이에 대한 기록을 보여 주게 했다. 그것은 「萬寂禪師 燒身成佛記」(만적선사 소신성불기)라고 씌어진 작은 첩자(帖子)였다.

만적은 법명이요, 속명은 기(耆), 성은 조씨(曺氏)다. 금릉서 났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어머니 장씨는 사구(謝仇)라는 사람에게 개가를 했는데, 사구에겐 전처의 소생인 아들이 있어 이름을 신(信)이라 했다. 나이는 기(耆)와 같은 또래로 여남은 살씩 되었었다. 하루는 어미 장씨가 두 아이에게 밥을 주는데, 신의 밥에 독약을 넣었다.

기(耆)가 우연히 이것을 엿보게 되었는데 혼자 생각하기를 이는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전실 자식인 신(信)을 없애려고 하는 짓이라 생각하였다. 기(耆)가 슬픈 마음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신(信)의 밥을 제가 먹으려 했다. 어머니가 보고 크게 놀라며 그것을 뺏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너의 밥이 아니다. 어째서 신(信)의 밥을 먹으려느냐.“ 했다. 신(信)과 기(耆)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며칠 뒤 신이 자기 집을 나가서 자취를 감추었다. 기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나갔으니 내가 반드시 찾아 데리고 오리라 하고 곧 몸을 감추어 중이 되고 이름을 만적(萬寂)이라 고쳤다. (中略)

만적이 출가한 지 십년만에 금릉 근방에서 옛날의 사신(謝信)을 우연히 만났다. 그러나 다시 만난 사신은 문둥병에 걸려 있었다. 아, 착하고 어질던 사신이 어쩌면 하늘의 형벌을 받는단 말인가. 만적은 가슴 속에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자기의 염주를 벗어 신(信)의 목에 걸어 주고 정원사로 돌아왔다. 절에 돌아온 만적은 소신 공양할 결심을 굳혔다. 이월 초하루에서 삼월 초하루까지 한달 동안 화식(火食)을 끊고 깨만 날로 먹었다. 삼월 초하루 대공양(大供養)-소신공양(燒身供養)-은 오시(午時)부터 집행되었다. 단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만적의 머리 위에 벌겋게 달은 향로를 씌웠다. 들기름에 절은 만적의 육신이 연기로 화해 나가는 시간은 길었다.

그러나 오백 대중(僧侶)은 움직이지 않고 아미타불을 읊었다. 신시(申時) 말에 비가 내렸으나, 만적의 머리 위에 얹어진 향로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대중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만적의 머리 뒤에는 보름달 같은 후광이 씌워졌다. 이것을 바라보던 대중들은 신병을 고치게 되고 이때부터 새전(賽錢)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이날까지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거기 와 빌면 누구나 소원 성취를 한다고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라 하였다.

기록과 원혜대사의 보충설명을 듣고 난 나는 등신불에 대한 경악과 충격이 차츰 가셔지기 시작했다. 그 뒤 내가 원혜대사를 찾아가 뵈었을 때 갑자기,“자네 바른손 식지를 들어보게.”했다. 그때 남경 진기수씨를 찾아가 혈서를 쓸 때 살이 떨어져 나가고 아직도 상처가 그냥 남아 있는 그 손가락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대사께서는 다른 말이 없었다. 절에서는 정오를 아뢰는 큰북 소리와 목어(木魚) 소리가 어우러져 으르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이 작품은 발표되던 당시부터 오늘까지 계속 문의가 온다.

첫째 중국에 정원사라는 절이 있느냐, 금불각이 있느냐, ‘만적선사소신공양기’는 문헌에 있느냐, (작품 속에는 원문이라 하여 한문 문장이 부기되어 있다), 작가가 남경에 간 일이 있느냐 하는 등등의 문의다. 위에서도 말한 대로 다솔사에서 몇 마디 소신공양 이야기를 들은 것뿐이고 작품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1백% 허구이다. 만적이 주인공이냐, ‘내’가 주인공이냐.이 질문엔 대답하기가 어렵다. ‘내’가 그냥 나레이터로 그치지 않고 중요한 행동과 심정이 그려지고 있기 떄문이다. 뿐만 아니라 참고서(고교 교과서의)에서는 ‘내’가 주인공으로 나와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작가 자신이 유권적 해석을 내줄 수는 없다. 작자도 독자의 한 사람이란 자격으로 자기의 견해를 말하라면 나는 만적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다. 아무리 ‘내’ 이야기가 많고 만적의 이야기는 짧다 하지만, ‘나’는 만적의 이야기를 위해 설정된 인물일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에 가서 손가락을 들게 하고 말이 없다 함은 무엇이냐. 이것은 대사가 ‘나’에게 수행(參禪)의 계기를 주기 위해 일종의 화두를 걸어온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한 해답(참고서)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나왔다 하는데, 이것은 그렇게 대답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 김동리 : ‘나의 대표작’ 조선일보 198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