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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선생의 발자취 (2) : 산천재, 그리고 남명기념관

모산재 2007. 1. 16. 16:48

 

남명 선생의 발자취 (2) 산천재, 그리고 남명 기념관

 

2007. 01. 04

 

 

 

 

산천재(山天齋)는 멀리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 사리마을의 끝 덕천강가에 자리잡고 있다.

 

남명 조식 선생이 벼슬에 뜻을 품지 않고 61세되던 1561년(명종 16)에 사리에 내려와 11년 뒤 돌아가실 때까지 후진 양성에 몰두하던 곳이 바로 산천재이다. 당시 남명 선생의 제자로는 임진왜란 당시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곽재우를 비롯하여 오건, 정구, 김우옹, 최영경, 조종도 등이 있었다고 한다.

 

선생이 거처했던 김해의 산해정·삼가의 뇌룡정등이 있으나 만년에 거처했던 산천재가 조식 선생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다. 산천재는 1561년(명종 16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방치되다가 1817년(순조 17년)에야 복원되었다고 한다.

 

산천재 건너편에는 남명 조식 유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넓은 터엔 남명기념관과 남명 조상이 자리잡고 있고, 언덕 위 소나무 숲 위쪽에는 남명 선생의 묘가 있다. 이 묘는 선생이 직접 자리를 잡아놓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입구 오른쪽으로 가시나무 종류로 보이는 커다란 상록수가 청청한 빛을 자랑하고 있다.

 

 

 

산천재 입구

 

 

 

 

입구 담장 곁의 가시나무

 

 

 

 

 

'山天'이란 주역의 대축괘로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데, 두류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곳에 서재를 지은 남명 선생의 정신적 지향을 잘 나타내주는 이름이다.

 

'대축'이란 크게 저축한다는 뜻이다. 대축괘는 간괘(艮卦)와 건괘(乾卦)로 구성되는데 간괘가 산(山), 건괘가 천(天)을 나타내 ‘산천(山天)’이란 용어가 생겨난다. 또한 주역에서 산은 ‘멈춘다(止)’, 천은 ‘창조적인 힘’이란 속성을 갖는다. 이 둘의 속성을 다시 합성해보면 ‘산 속에서 창조적인 학문의 힘을 키운다’는 뜻이 된다. 산천재란 바로 그와 같은 힘을 키우는 집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우리가 찾은 시간에 산천재는 보수 공사 중인지 비닐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래도 그냥 돌아서기엔 아쉬워, 살짝 잠입하여 벽화를 카메라에 담았다. (벽화조차 비닐로 가려져 있었지만...)

 

 

 

 

 

 

산천재 앞 안내판에는 이 시기에 남명이 쓴 두 편의 시를 소개해 놓았다.

 

이 시는 송(宋)대 유학자들이 즐겨 노래하던 설리시(設理詩: 유학의 이치를 시적 형태를 빌어 설명한 시)의 전형적 형태로 산림처사로서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선생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 덕산의 시냇가 정자 기둥에 부쳐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천석들이 종을 한번 보게나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도 나지 않거늘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어찌 하면 두류산(지리산)은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

 

 

  ○ 德山卜居(덕산복거) 덕산에 터를 잡고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어디엔들 향기로운 풀 없겠냐만,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오로지 하늘나라 가까운 천왕봉만을 사랑한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빈손으로 왔다 가니 먹을거리 걱정하랴?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덕천강) 십리나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는도다.

 

 

 

산천재 앞에는 매화나무 한 그루 봄을 기다리고 있다.

 

이 매화는 남명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매화나무를 '남명매'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실이라면 수령이 400년을 훨씬 넘은 셈이 되는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단속사지의 매화나무와 함께 주목할 만하다

 

 

 

 

 

 

● 산천재의 벽화

 

산천재는 단청을 하였다는 점과 벽화가 있다는 점이 여느 서원이나 서재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건물이다. 그러나 벽화는 낡고 헐어 형체를 다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이고, 단청도 모두 벗겨져 원래 단청이 없었던 건물처럼 보인다.

 

 

산천재 마루 위에 올라가 벽을 살펴보면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금방 발견하게 된다.

 

정면 벽에는 신선이 소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그림. '산천재'라는 현판 왼쪽 벽에는 농부가 소를 모는 그림, 오른쪽 벽에는 버드나무 밑에 귀를 씻는 선비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허부와 소유의 고사를 담은 이 그림들은 모두 남명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 왼쪽, 소를 모는 농부

 

 

 

 

▼ 오른쪽, 귀를 씻는 선비와 소를 모는 농부

 

 

 

 

▼ 정면, 바둑을 두는 신선

 

 

 

 

 

 

낙락장송 저 너머 구름 아래로 보이는 천왕봉

 

 

 

 

 

 

 

● 남명 조식 유지

 

산천재 맞은편에 넓은 터를 확보해 남명 선생의 조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지었다. 뒤쪽 소나무 숲 위쪽으로 선생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성성문(惺惺門)

 

 

 

 

 

마음을 밝게 깨어 있게 하려고 늘 가지고 다니던 요령 성성자(惺惺子)에서 그 이름을 따 성성문이라 하였다.

 

 

 

남명 기념관

 

 

 

 

천왕봉을 배경으로 선 남명 조상

 

 

 

 

남명 조식 선생의 삶과 사상에 대한 영상 자료 감상

 

 

 

 

 

● 성성자(惺惺子)

 

남명은 평소 성성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을 지니고 있었다. 수양 도구로 삼아 안으로는 늘 거울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과단성 있는 실천을 이룩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특히 성성자에는 ‘雷’(뇌)와 ‘天’(천)자를 새겨 항상 극기와 성찰의 도구로 삼았다.

 

 

 

 

 

● 경의검(敬義劍)

 

남명 조식은 “배운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배운 것만 못하고, 죄악을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남명은 공부를 실천을 위한 준비단계로 보았다. 그래서 경(敬)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의(義)의 상징으로 칼, 경의검을 차고 다녔다.

 

 

 

 

 

● 남명의 신명사도(神明舍圖)

 

남명의 학문 요체는 ‘경의지학(敬義之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주역의 '敬以直內 義以方外'(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남명은 경과 의를 마치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아서, 영원토록 바뀔 수 없는 것이라고 할 만큼 강조했다.

 

신명사도는 남명이 마음의 안과 밖을 잘 다스려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마음의 안과 밖을 잘 다스리기 위해선 경과 의로써 해야 하며, 그렇게 되었을 때 지극히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명(神明)은 사람의 마음이고 사(舍)는 집을 뜻한다. 곧 ‘신명사’는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집이다. 그러니까 신명사도는 사람의 마음이 머무는 집을 그린 그림이다. 신명사도에서 성곽처럼 둘러쳐진 안쪽이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 쪽은 마음 바깥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신체적 외부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남명이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표시한 것은, 신체적 외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막아야 된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마음속으로 사사로운 욕심이 들어오는 것은 전쟁에서 적이 쳐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보고, 이를 굳건히 지켜야 된다는 결연한 의지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을 좀더 자세히 보면, 성곽 안에 ‘태일군(太一君)’이 중앙에 있는데, 마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순수한 마음 그 자체인 것이다. 안으로 경(敬)을 통해 자신을 함양해 정성스런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 천덕(天德)이고, 밖으로 의를 통해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밝게 분별하는 것이 왕도(王道)이다. 천덕과 왕도는 경을 그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태일군 바로 앞에 경을, 그리고 좌우에 왕도와 천덕을 배치해 놓았다. 경앞에 ‘총재’라고 표시를 해 두었는데, 총재는 백관의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경이 마음을 다스리는데 으뜸이 된다는 뜻이다.

 

총재라는 글자앞에 ‘성성(惺惺)’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성은 혼미하지 않고 깨어 있는다는 뜻으로, 총재가 한시라도 흐릿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써 놓은 것이다.

 

일(日)과 월(月)은 마음의 해와 달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늘의 도를 통하면 마음은 환하게 밝아 그 빛이 만물을 깨뚫어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성곽 안의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은 임금이 국난을 당했을 때 사직을 위해 죽을 각오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잠시라도 경(敬)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타냈다.
성곽의 이관(耳關) 목관(目關) 구관(口關)은 인간의 신체에 있는 9가지 구멍중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마음을 어지럽히는 신체 기관이다. 마음 안과 밖의 경계인 셈이다. 이들을 굳게 단속하지 않으면, 바깥의 사특함이 마음으로 들어오게 된다.

 

구관(口關) 밑에 충신(忠信)과 수사(修辭)를 표시한 것은 말로써 마음을 드러낼 때는 충과 신으로써 그 말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곽 밖 백규(百揆)·치찰(致察)의 백규는 내정을 살피는 관직이며, 치찰은 모든 만물의 출입을 살핀다는 뜻이다. 즉 마음 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의 출입을 하나하나 살펴, 통제하며, 그 생각의 움직임을 성찰한다는 의미이다.

 

그 옆 대사구(大司寇)·극치(克治)의 뜻은, 대사구는 병권을 막는 관리이며, 극치는 사람의 사욕이 일어나는 것을 용기있게 물리치는 것을 말한다. 백규가 기미를 살펴 치찰을 하고 대사구가 사욕을 극치해서 도달하는 곳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의 경지이다. 즉 지극한 선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결국 남명의 신명사도는 남명의 학문 요체인 경의(敬義)를 기반으로해 마음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들을 사생결단의 각오로물리쳐야 한다는 맹렬한 자기 수양의 의지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남명은 신명사도의 내용을 생활화 하려고 했다. 바로 합천 삼가 뇌룡정을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다. 뇌룡정을 방문한 사람들이 뇌룡정 문이 왜 3개냐고 자주 묻는다. 바로 신명사도의 구관, 목관, 이관을 본떠 만든 것이다. 뇌룡정은 신명사도의 마음 그 자체인 것이다.

 

 

 

▼ 남명집

 

 

 

 

▼ 남명 문하의 임란 의병장

 

 

 

 

▼ 뇌룡정(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 있음) 축소 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