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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여행 (3) : 봉미산 품에 안겨 여강을 굽어보는 신륵사

모산재 2006. 12. 10. 22:14

 

여주 여행 (3) : 봉미산 품에 안겨 여강을 굽어보는 신륵사

 

2006. 12. 02. 토요일

 

 

 

고달사를 돌아보고 신륵사를 찾았을 때는 오후 3시가 넘었다. 가뜩이나 짧아진 해가 구름 속에 숨어 버려 일주문으로 이르는 길은 싸늘한 여강 바람에 을씨년스럽기까지하였다.

 

입구에는 일주문을 수리하고 있었는데, 수년 전에 보았던 일주문과는 달리 작다. 동남아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원목 기둥이 아담한 절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 보기에 부담스러웠는데 다행이다. 한때는 이 길을 따라서 식용개구리를 파는 노점들이 늘어서서 또 얼마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가... 다행스럽게 지금은 제모습을 찾았다.

 

대학시절 처음 찾았던 신륵사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야트막한 봉미산(鳳尾山) 산자락에 포근히 안겨 시원스레 돌아흐르는 여강(驪江)을 굽어보는 신륵사, 우뚝 솟은 전탑과 강물을 굽어보던 전망 좋은 정자...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다시 중건하자는 내용이 담긴 <신륵사중수기>에는 신륵사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 오직 이 두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지가 이미 천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 입구에서 본 신륵사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사납게 굴어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말을 제압하였다는 뜻에서 신륵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 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裨補)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조사당(보물 제180호),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석등(보물 제231호)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락보전과  부속건물인 구룡루 ·명부전 ·시왕전 ·산신당 ·육각정 등이 있다.

 

 

 

 

● 범종각

 

범종을 달아 놓은 전각을 말한다. 당호는 절에 따라 범종루·종각·종루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단층일 경우 '각(閣)'이라 하고 중층일 경우 '루(樓)'라고 한다. 보통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법당 앞에 있거나 일주문 왼쪽에 있는데, 중층 누각의 경우는 다르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중층으로 세워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두기도 한다. 범종(梵鐘)·법고(法鼓)·운판(雲板)·목어(木魚)를 '법전사물'이라 한다. 법고는 바닥에 두고 운판과 목어는 보나 도리에 매단다.

 

 

 

 

<법고>

법고는 말 그대로 법을 전하는 북으로서, 축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을 전하는 것을 일컬어 ‘법고를 울린다’고 하는데, 이는 북소리가 널리 울려퍼지듯 불법이 전해지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또 중생들이 불법에 따라 온갖 번뇌를 이기는 것이, 마치 군사들이 북소리에 따라 적군을 무찌르는 것 같다는 비유도 있다. 법고는 불변의 진리인 법(法)을 통하여 축생과 땅에 사는 모든 중생의 마음을 울려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다. 따라서 법고를 울릴 때는 두 개의 북채로 마음심(心)자를 그리듯 두드린다.

법고의 몸체인 북통은 잘 마른 나무로 만들고, 양쪽 면은 소가죽을 사용하는데, 각 면에 암소와 수소의 가죽을 사용해야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 북통에는 일반적으로 용을 그리고, 양면 가운데에는 태극 무늬를 그리거나 진언(眞言)을 새긴다.

 

 

 

 

<목어>

목어는 나무로 만든 물고기이다. 조석 예불이나 염불·독경 때 사용하는데, 속이 빈 배의 양쪽 벽을 나무막대기로 쳐서 소리를 낸다.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밤에도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참선하는 수행자로 하여금 항상 깨어 정진하라는 뜻을 담고 있어 게으른 수행자를 질책하는 의미로도 사용한다.  목탁(木鐸)은 이것의 변용이다.

 

 

 

 

<운판>

운판은 청동이나 쇠로 만든 구름 모양의 넓은 판으로, 화판(火版) 또는 장판(長版)이라고도 한다. 그 소리는 날아다니는 조류와 허공을 떠도는 영혼을 구제한다고 하며, 본래 대중에게 공양 시간을 알리기 위해 사용하였다. 비를 머금은 구름 모양에 주술적인 의미를 담아 선종(禪宗) 계통의 사찰에서는 화재를 막는 의미로 부엌 앞에 걸어두기도 한다

 

 

 

 

<범종>

범종은 사찰에서 대중을 모이게 하거나 때를 알리기 위해 치는 큰 종을 말한다. 이것은 신성한 불음(佛音)을 내서 고통받는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게 해주며, 지옥에 있는 중생의 영혼까지도 제도한다고 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글로 표현하면 불경이 되고,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하면 불상이 되며, 부처의 깨닫음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만다라가 되고, 범종의 소리는 곧 부처의 음성이다. 범종은 사물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28호)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모신 사찰의 중심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으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과 함께 중생들의 수명장수와 안락을 도와주시는 분이다. 영릉의 원찰로서의 의미가 배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전면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경내 중심에 위치하고 정남향을 한 현재 이 극락보전의 건물은 정조21(1797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것이다.

 

 

 

 

법당 천정은 우물 천정이며 불단 위에는 정교하게 짜여진 닫집이 있고, 불단을 받치는 수미단의 단청은 안상 형식의 창 속에 학, 연꽃, 코끼리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극락보전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千秋萬歲>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고 하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왕실의 원찰답게 단층 문양이 섬세하고 화려한데, 다포계 건물이라 화려함이 더욱 배가되었다.

 

 

 

 

 

이 보조 기둥을 멀대라고 한다.

 

 

 

 

웬 말벌집이...

 

 

 

 

 

● 신륵사다층석탑(보물 225호)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서로 다른 모양의 2층 기단 위에 여러 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 방법은 전혀 다르다.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2층 기단 >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새겼다.

 

 

 

 

 

 

<1층 기단>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 500살 먹은 향나무

 

조사당, 명부전 앞마당에 있다. 무학대사가 스승인 나옹을 추모하여 심은 나무라 전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의 역사를 쭉 지켜 봐온 나무...

 

 

 

 

 

 

● 부도

 

 

 

 

● 조사당(보물 180호)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가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 내부에 기둥 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조선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양식면에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중앙 나옹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스님의 독존(獨尊)을 안치했다.

 

 

 

적묵당의 편안하고 아름다운 굴뚝

 

 

 

 

 

 

● 신륵사보제존자석종(보물 228)

 

신륵사 뒤 봉미산 숲속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공민왕의 왕사로 있던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통도사와 금산사와 같이 계단탑 형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시대 종모양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이 되고 있다.

 

 

 

 

 

●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보물 231호)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 부도를 장엄하게 밝히기 위한 공양구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은 납석(곱돌)을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반룡문을 세긴 원형 기둥과 화창, 비천, 창방, 평방 등을 가득 조각하였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하대석과 상대석의 연꽃무늬가 마주하고 있으며, 간주석은 연주문으로 구획을 나누고 그 안에 안상을 배치하였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조선시대 무덤 앞에 놓이는 장명등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된다.

 

 

 

 

 

●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보물 229호)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230호)

 

대장각기비는 고려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 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이숭인이 지은 비문은 탑신에 깨어진 부분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아쉽게도 비를 세운 연대 역시 탈락이 되어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대체로 보제존자석종비 제작4년 후인 홍무16년(1383년)으로 추정된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 률, 론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금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층전탑 위쪽으로 이 비만 남아 있다.

 

 

 

 

 

● 신륵사다층전탑(보물 226호)

 

아래로 호수처럼 넓은 여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넓은 들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 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다층전탑에서 바라본 경내 풍경

 

 

 

 

남한강의 상류 여강의 저녁 빛

 

 

 

 

 

● 강월헌(江月軒)

 

다층 전탑 아래 강으로 절벽을 이룬 너럭바위 위에 세워졌다. 나옹선사의 당호인 '강월'을 따서 이름으로 나옹화상을 이곳에서 다비한 것을 추모하여 문도들이 삼층석탑과 함께 세운 정자이다.

 

예전 <태조 이성계>라는 드라마에서였던가, 이곳에서 목은 이색이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죽음을 당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신륵사는 나옹화상과 교유하던 목은 이색 선생이 생을 마감한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여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신선이 된 느낌이 든다. 절이 아니라 신선세계에 온 듯하다.

 

가슴을 탁트이게 하는 품 넓은 여강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나는 격동의 80년대 이 절의 주지를 지낸 원경스님을 떠올린다. 원경스님이 누구인가? 바로 이 땅에서는 '남로당 빨갱이의 괴수이었고 북녘에서는 '미제의 앞잡이'로 몰려 처형된 실패한 혁명가 박헌영의 아들이다.

 

'박병삼'이 본명인 원경스님은 1980년대에 이곳 신륵사 주지로 있었다고 한다. 6.25 동란 직전 그를 돌보던 김삼룡, 이주하 등이 체포되고 난 이후 그는 절집을 떠돌게 되고, 전쟁이 터지면서 지리산 빨치산과 산사람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결국 출가를 하였다고 한다. 여주 서래암, 안성 청룡사, 여주 흥왕사를 거쳐 신륵사 주지를 하게 된 분이다. (현재는 평택 만기사 주지로 있다고 한다.) 특히 흥왕사와 신륵사 주지로 있던 70~80년대 중반 엄혹하던 시절 권력과 맞서던 문인, 학생들이 많이 찾기도 했던 모양이다.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한파 속에서 청둥오리떼들은 제철을 만난 듯하다.

 

 

 

 

되돌아본 풍경

 

 

 

 

 

앞에서 본 신륵사 전경

 

 

 

 

무슨 나무일까...

 

 

 

 

 

 

해는 구름 속으로 숨은 채 지는 모양이고 바람은 점점 차가워진다.

몇 년만에 찾은 여주, 고즈넉한 신륵사의 분위기를 맘껏 즐기고 다시 남한강을 따라 서울로 향한다.

 

 

 

 

※ 신륵사 안내도

 

 

 

 

 

 

 

 

더보기

 

※ 신륵사와 인연이 있는 인물

 

나옹 혜근(1320-1376)

 

나옹 혜근은 서천 지공스님과 절강 평산스님에게서 법을 이어받아 승풍을 크게 떨쳤던 고려말의 고승이다. 스님은 중국으로부터 보우와 함께 새로운 임제의 선풍을 도입하여 한국 불교의 초석을 세운 분으로 유학하는 20여년 동안 강남지방의 간화선(看話禪)을 깊이 공부하고 귀국하여 간화선을 널리 선양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속명은 원혜(元惠), 법호는 나옹(懶翁)이며 당호(堂號)는 강월헌(江月軒), 시호는 선각(禪覺)이라고 하며, 1320년 1월 15일 지금의 경북 영덕군 영일면에서 태어났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에 있는 요연선사를 찾아가 출가한 뒤 전국의 이름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밤낮으로 정진하여 1344년(충혜왕5) 양주 천보산 회암사에서 크게 깨달았다.

 

1347년 (충목왕3)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화상을 친견하고 정진하여 그의 법을 전수받은 후 1358년(공민왕7)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에 은신, 이후 신광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홍건족의 침입을 법력으로 막아 신광사를 수호하기도 하였다.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지에서 수도 정진한 후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사찰 중창에 전력하였으며 1371년 공민왕으로부터 금란가사의 내외법복, 바리를 하사 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다시 왕사로 추대되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낙성식날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가지고 유학자들이 탄핵함에 따라 밀양 영원사로 옮기던 중 1376년 5월 15일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니 나이 57세 법랍 38세였다.

 

제자로는 무학 등 2,000여명이 있으며, <나옹화상어록>과 <가송歌頌>으로 스님의 사상이 전해지고 있다. 신륵사와 관련된 나옹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은 <보제사리석종기>와 김수온의 <보은사기>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륵사는 나옹이 도를 펼쳤던 곳으로 목은 이색과 함께 이곳에 머물며 교유하므로 인해 신륵사가 경기도의 유명 사찰이 되었다 한다.

 

 

무학 자초(1327-1405)

 

고려말 조선초 불교가 위축된 상황 속에서 사회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여 낡은 체제의 개혁과 더 나아가 새 나라 건설에 참여한 조선 초기의 고승이다. 성은 박씨이고 호는 무학(無學)으로 1327년 삼기(三岐:경남 합천 대병)에서 태어났다. 1344년(충혜왕5) 18세에 소지선사의 문하로 출가, 혜명국사로부터 불법을 전해 받았다.

1353년(공민왕2) 원나라 연도로 가서 인도승 지공을 만나 도를 인정받은 후 나옹을 찾아가 그의 전법제자가 되었다. 나옹이 입적한 후, 다시 천하를 주유하던 무학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후 태조의 왕사가 되었고, 그 건국사업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393년 9월에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하였고, 나옹의 진영을 모시는 불사를 광명사에서 베풀었다. 1402년(태종2) 왕명을 받아 회암사로 옮겼다가, 금강산 진불암으로, 다시 1405년 금장암으로 옮겨 이곳에서 나이 79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후에 조선 태종이 사리를 회암사 부도에 모시게 하였다.

 

스승 나옹이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고, 그 제자 무학이 신륵사 옆 고달사에서 은신하였던 것은 신륵사의 불교사상적 위치를 한층 고양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여말과 선초의 두 고승이 맺게 된 인연으로 그의 영정이 지금 신륵사 조사당에 모셔져 있다.

 

 

지공 화상

 

지공은 인도 승려로 법명 제납박타(提納薄陀)라 하며 선현(禪賢)이라 번역하고 지공은 호이다. 인도 왕족으로 태어나 여덟 살 때 출가, 나알란사의 강사 계현(戒賢)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열아홉 살 때 남인도의 랑타아국 길상산(吉祥山) 정음암(頂音庵)에 가서 보명(普明)스님께 사사하고 그의 인가를 얻어 지공이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원나라 황제의 후대를 받으며 법을 펼치는 동안 많은 고려의 유학승과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고려의 금강산법기도량을 참배하고자 하는 염원과 고려스님들과 접촉을 통해서 얻은 고려에 대한 관심 등으로 충숙왕 3년(1326년) 고려를 방문, 1년만에 원나라로 돌아갔다.

 

지공은 고려말 승려들의 사상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특히 나옹에게 있어서는 사상적인 원류로 평가되고 있다.

 

 

목은 이색(1328-1396)

 

이색은 고려말의 유명한 삼은(三隱 :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 중 한 사람이다. 1328년(충숙왕15) 영덕군 영해 읍에서 가정 이곡(李穀)의 아들로 태어났다. 1341년(충혜왕 복위2) 성균관시에 합격한 이후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의 발전을 꾀하였다. 1377년에는 우왕의 사부가 되었으나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배되고 이후 석방된 후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절하고 1396년 신륵사에서 죽었다.

 

신륵사와 이색의 관련된 기록은 아버지 이곡이 발원하여 조성하려 했던 대장경을 1380년부터 3년에 걸쳐 완성하여 2층의 장경각을 지어 절에 봉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나옹은 한때 신륵사에서 교류하기도 하였으며 왕명으로 나옹선사의 비문을 지어 신륵사에 세웠다.

 

문하에서 권근, 김종직, 변계량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고, 저서에 <목은문고>와 <목은시고>등이 있다.

 

 

원경스님

 

남로당 당수 박헌영(1900~1956)의 아들. 1941년 박헌영(朴憲永)과 두 번째 부인 정순년(鄭順年) 사이에서 출생. 본명 박병삼(朴秉三). 1950년 3월 김삼룡, 이주하의 체포 뒤 한산 스님과 함께 과천, 구례, 동해, 단양, 담양, 무주 등을 전전하다 덕유산에서 ‘이현상 부대’와 만나 1952년 말까지 지리산에서 ‘산사람’들과 2년여 생활하였다.  

 

1960년 인천 용화사에서 송담(松潭)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여주 서래암, 안성 청룡사, 여주 흥왕사, 신륵사 주지 역임하고 1995년 이후 평택의 만기사 주지로 있다.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참여하였고, 2004년 4월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를 출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