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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여행 (2) : 혜목산 산자락 눈 덮인 고달사지

모산재 2006. 12. 10. 20:50

 

여주 여행 (2) :혜목산 산자락 눈 덮인 고달사터

2006. 12. 02. 토

 

 

 

김영구 가옥을 돌아본 뒤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고달사터로 향한다. 골프장이 있는 고개를 넘어서니 하얀 눈이 덮은 혜목산 산자락에 포근히 안겨 있는 고달사터가 나타난다.

 

여주 부근에는 큰 절터가 유달리 많다. 흥법사터, 법천사터, 거돈사터 등이 그런 곳인데, 예전 함께 활동했던 신선생님의 안내로 돌아본 뒤 불교 문화의 매력에 새삼 빠져들게 되었다. 폐사지, 절 자체는 사라졌어도 그 흔적만으로도 역사의 무게가 절로 다가와 묘한 감동에 젖어들게 한다. 내 고향(합천)의 영암사터를 종종 찾아보게 된 것도 그런 경험 탓일 것이다.

 

 

 

 

혜목사 산 자락 눈 덮인 고달사터

 

저 왼쪽 아래서부터 위쪽으로 차례대로 석불좌, 원종대사혜진탑 귀부와 이수, 작은 귀부가 자리잡고 있다. 뒤쪽에 눈덮인 하얀 집이 가건물로 된 고달사이고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고달사지부도와 원종대사혜진탑을 볼 수 있다. 거기서 산 능선의 중턱을 오르면 고려 무덤인 상방하원석실묘(上方下圓石室墓)가 나타난다.

 

 

 

 

764년, 통일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된 고달사는 중원 미륵사가 미륵대원이었던 것처럼 고달원(高達院)으로 큰 마을을 이루었던 큰절로서 고려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비호를 받던 사찰이었다. 그러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논밭이 되어 버린 절터만 남아 맥수지탄(麥秀之歎)을 느끼게 한다. 2002년 찾았을 때는 한창 발굴 작업 중이었는데, 지금 마무리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있다.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고달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 데에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절터 안에 남아 있는 석조물로는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석불좌(보물 제8호) 등이 있고, 이곳에 있었던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원종대사혜진탑비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옮겨져 있다. 1993년 7월 23일에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었고,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금당터를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고, 절터의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절터 곳곳에는 산수유 열매들이 여주에는 산수유 마을이 있을 정도로 산수유나무가 많다. 흰눈 속의 붉은 산수유 열매의 색채 대비가 선연히 아름답다.

 

 

 

 

 

 

●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

 

발굴된 눈 덮인 절터를 가로질러 건너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석불대좌이다. 노천에 드러난 커다란 대좌를 보며(물론 불상은 금당 건물에 모셔진 것이지만)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앉은 부처님의 자비스런 얼굴을 상상해 본다. 불상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높이 1.57m. 사각형 3단으로 만든 대좌(臺座)는 각 단을 별개의 돌로 만들었다.

 

상대석 상단에는 겹꽃의 앙련(仰蓮) 무늬가 각 면에 다섯 꽃잎씩, 모서리마다 한 잎씩 모두 24잎이 조각되었다. 거대한 석조물임에도 율동적이고 생동적인 연꽃 조각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중대석에는 모서리기둥(우주)을 새기고 큼직한 안상을 새겼다. 지대석 위의 하대석 상단은 상대석 연꽃 무늬와 중대석을 사이에 두고 대칭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하대석 하단은 각면 4개씩의 안상이 새겨져 있다.

 

석불좌의 연꽃잎 표현 수법이 고달사지부도의 하대석이나 원종대사혜진탑의 것과 비슷한 고려 초기 양식인 것으로 보아 석불좌는 1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와 이수(보물 제6호)

 

석불대좌 바로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비몸(혜목산고달선원국사원종대사지비)은 191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경복궁 근정전에 있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원종이 869년(신라 문경왕 9) 태어나서 13세에 출가하여 불도를 닦은 행적을 간략하게 적었다.

 

975년에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탑비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귀부 높이 0.91m, 길이 3.21m, 이수는 높이 1.09m, 너비 2.33m이다.

 

통일신라 말 선종이 유행하면서 승려의 행적을 남기기 위해 부도와 함께 건립된 비는 '귀부-비몸-이수'로 구성되었다. 비몸을 중심으로 귀부는 비몸을 지탱하고 이수는 비몸을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귀부와 이수의 거북과 용은 장수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이는 비의 주인공의 영혼을 천상의 세계로 인도하고 그들의 업적을 시공을 초월하여 후세로 전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 비는 지대석과 귀부가 커다란 하나의 돌덩이로 만들어졌고, 육각갑(六角甲) 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비좌(碑座)는 구름 무늬를 새긴 연화좌(蓮花座) 위에 각출(刻出)되었고, 윗면 둘레에는 복련 무늬를 조각하였다. 거북의 네 발과 발톱 끝은 사실적이고도 예리하게 조형되었으나, 용형(龍形)의 귀두에 비해 면상이 너무 크고 기이하다. 그 거대함과 사실성에서 고려 초기의 진취적인 기상을 읽을 수 있다.

 

 

 

 

뒤쪽 언덕에서 내려다 본 모습

 

 

 

 

 

바로 뒤 언덕에 있는 또 하나의 귀부, 거북머리는 떨어져 나가고 없고 비와 이수도 사라졌다.

 

 

 

 

 

가건물로 지은 고달사

 

 

 

  

 

 

길가 산수유 붉은 열매가 푸른 하늘 흰 눈 속에 선연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고달사지 부도 오르는 산길

 

갑자기 찾아온 영하의 한파에 찬바람이 거세다. 솔숲에 쌓인 엊저녁 내린 눈이 갑작스런 바람에 눈보라를 일으키며 얼굴을 쓸고 지나간다. 저기 보이는 오솔길의 끝 아늑한 솔숲에 고달사지부도가 자리잡고 있다.

 

 

 

 

솔숲 속에 있는 고갈사지 부도에서의 눈바람

 

 

 

 

 

 

●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부도로 높이는 3.4m이다. 전형적인 8각 원당형(圓堂形) 부도로 신라의 양식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고려시대 초기 부도이다. 상륜부가 없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고르게 갖춘 조형(造形)과 세련된 조각수법은 장중한 기풍을 풍기고, 또한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따르면서도 고려시대의 웅장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868년(경문왕 8)에 입적한 고려 말의 고승 원감(圓鑑)의 묘탑(墓塔)이라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원종대사혜진탑과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고, 양식적으로 거의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상륜부는 훼손되었으나 비교적 두꺼운 옥개는 전각마다 높직한 귀꽃을 새겨서 장식하였다.

 

 

 

 

옥개석 처마에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상대석에는 앙련(仰蓮)을 돌리고 날씬한 8각 탑신을 놓았으며, 각 면에 문짝(문비) 모양과 사천왕상을 새겼다.

 

 

 

 

사천왕과 창살문짝, 그리고 자물쇠를 새긴 것은 사리함을 굳게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면 될까.

 

 

 

 

중앙에 새겨져 있는 자물쇠 문양

 

 

 

 

사천왕상

 

 

 

 

하대석에는 옆면에 안상(眼象), 윗면에 복련(覆蓮)을 새겼고, 간석(竿石)에는 거북을 중심으로 하여 네 마리의 용과 구름 무늬를 조각하였는데, 그 솜씨가 웅혼하고 대담하다. 거북의 머리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부도의 기단은 여러 매의 판석으로 짜여진 8각 지대석 위에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된 괴임대를 놓고, 그 위에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얹은 모양이다.

 

 

 

 

 

고달사지부도를 지나 고려의 무덤인 상방하원석실묘를 보기 위해 산 능선으로 난 길을 오른다. 뒤따라 오던 이 선생님이 소리쳐 돌아보니 뱀허물 같은 게 낙엽 위에 떨어져 있다. 뱀허물쌍살벌 벌집.

 

 

 

 

생명이라곤 보이지 않는 눈덮인 숲길에 빠알간 '망개'(청미래덩굴의 경상도 사투리) 열매가 반긴다.

 

 

 

 

 

● 상방하원석실묘(향토유적 제13호)

 

이곳을 처음 찾았던 십 수년 전에는 '고려장터'라는 안내판이 있었는데, 그 뒤에 오니 슬그머니 그 명칭이 사라져 있었다.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인데, 아래의 석실이 원형인데 윗부분은 방형의 2중 기단으로 된 특이한 구조라 '상방하원석실묘'란 이름이 붙었다.

 

발굴 전에는 기단부가 완전히 흙 속에 묻혀 있었고 기단 2층과 석실 입구의 돌만이 드러나 있었다고 한다. 1983년 한양대박물관 발굴단에 의해 발굴되었다. 지상 구조는 2층의 제단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동서 442cm 남북 280cm 높이 46cm의 장방형, 2층은 동서 322cm 남북 280cm 높이 50cm. 원형의 현실 바닥 평균 직경은 163cm 현실 천장은 커다랗고 평평한 돌 2개로 덮었는데, 방형 기단이 불탑을 연상시키는 점이 고달사지와 연관하여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돌아나오는 길, 나뭇가지에 또 낯익은 나방의 고치집이 눈에 뜨인다. 유리산누에나방 고치(팔마구리 고치).

 

 

 

 

 

 

다시 되내려와 고달사지부도 왼쪽 아래 골짜기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으로 향한다.

 

 

 

● 원종대사혜진탑(보물7호)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광종 때까지 활동한 원종대사의 묘탑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조각이 있어 고려시대 부도의 조각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8각 원당(圓堂)의 형식을 따르면서 부분적으로 시대적인 특징이 나타나 있는 탑이다.

 

 

 

 

 

넉장으로 짜여진 넓은 사각형 지대석 위에는 1면에 다섯 잎 씩, 각 귀퉁이에 한잎 씩, 모두 24잎의 홑잎 연꽃무늬가 얹혀 있다.

상대석은 8잎의 커다란 홑잎앙련(仰蓮:위로 향한 연꽃)이 있는데, 바닥면에는 잘룩한 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탑신받침의 몰딩이 있다. 8각 탑신은 4면에 문짝(門扉) 모양이,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이 조각되었다. 옥개도 8각이며 추녀는 수평이나 전각(轉角)에 이르러 위로 뻗었고, 그 위에 뚜렷한 귀꽃의 일부가 손상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꽃무늬로 조각한 복발(覆鉢) 위에 귀꽃이 달린 작은 보개(寶蓋)를 얹고, 보륜(寶輪) ·보주(寶珠)를 올렸다. 탑비가 975년(광종 26)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석탑도 그 무렵에 건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 처마의 비천상이 고달사지부도의 비천상에 비해 새김이 희미하고 많이 어설픈 느낌이 든다.

 

 

 

 

 

 

 

 

귀부의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측면이 보이게 표현했는데, 정면을 보고 있는 고달사지부도와 대비된다. 

 

 

 

 

측면 용의 모습도 머리와 상체 부분은 뚜렷이 표현했으나 나머지 부분은 마치 얼버무린 듯이 표현되었다.

 

 

 

 

4각 지대석이 고달사지부도의 8각 지대석과 다르다.

 

 

 

 

 

 

입구에 서 있는 장승 하나

 

 

돌아나오는 길 입구 눈밭에 버려진 듯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장승이 고달사터 석조물의 근엄한 분위기를 사람 사는 분위기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입을 쩌억 벌린 저 헤픈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더욱 매서워지는 바람 속으로 신륵사를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