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고구려

고구려, 백두산 순례 (3) : 집안의 환도산성,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 그리고 압록강 건너 북한 땅

모산재 2006. 12. 30. 13:38

 

고구려, 백두산 순례 (3)  집안의 환도산성,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

2006. 08. 14

 

 

 

 

고향처럼 친근한 농촌 풍경

 

 

집안을 향해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는 끝없이 들판과 농가, 그리고 산으로 이어지는 평화로운 풍경들 펼쳐진다. 푸르른 산들은 그렇게 높지도 않고 맑은 개울도 그렇게 깊지도 않게 잔잔히 흐른다. 간혹 겨르롭게 풀을 뜯 누렁이 소들도 보인다. 이곳이 압록강 너머 만주땅이 맞는가 싶고, 국내 여행 아니 고향을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저 한옥과 다름없는 농가 가옥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 듯하다.

 

 

 

 

 

 

압록강가에 자리잡은 집안

 

 

엊저녁 잠이 모자라 눈을 감고 잠시 졸았는가 싶었는데, 눈을 떠 보니 멀리 유유히 흐르는 넓은 강물이 나타난다. 압록강이다! 저 강 건너편이 북한 땅.

 

집안에 거의 다 온 모양이다. 오후 2시에 가까워진 시간이다.

 

집안은 압록강 중류, 북한의 만포시를 건너다 보며 자리잡은 인구 20만의 작은 도시이다. 청나라의 봉금 지구로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던 이곳은 일본의 밀정 사카와 중위가 호태왕릉비 탁본을 떠갔던 1882년 당시만 해도 20여호밖에 살지 않았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 봉금이 풀리면서 주민이 점차로 늘어나 현재 인구 20만을 넘는 도시로 성장하였다.

 

무엇보다도 집안은 서기 3년 추모왕(주몽)의 아들이자 2대왕인 유리왕이 천도하여 서기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0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린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도시 전체가 고구려 유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인데, 특히 75개의 군집을 이루며 1만 2천 기에 달하는 고구려 고분들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역사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들 고분 중 26기의 왕릉 급 무덤과 귀족무덤을 지난 2004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유람선 한 척이 카메라에 잡힌다. 남북 분단으로 중국 사람들이 먹고사는 현장!

 

 

 

 

 

 

 

곧 집안이 나타난다. 시내로 접어드는 곳에서 가이드가 창밖을 보라며 아파트 앞에 낮게 두르고 있는 국내성을 가리키며 설명한다. 일정에 쫓기다 보니 이동하면서 버스 속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가까이서 보지도 못하고 사진 한 장 담지 못하니 아쉬움이 크다.

 

국내성은 시내 중심가에 편입되어 거의 훼손되어 있었는데, 극히 일부가 보수되었다. 광복 때까지만 해도 7~8m 높이로 잘 보존되어 있었던 성벽이 주민들이 집을 지으면서 허물어 가져가 훼손된 것이다. 성은 네모꼴인데, 네 변의 길이가 서로 다르다. 동쪽은 556m인데 서쪽은 665m, 남쪽은 715m인데 북쪽은 715m로 총 둘레 2686m나 되는 평지의 성이다.

 

 

1930년대의 성벽과 각루

 

 

 

 

 

 

시내 거리가 제법 활기차 보인다. 돈이 제법 도는 '자본주의 개발도상국' 중국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고향촌'이라는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된장찌개가 시원하고 맛있다. 이곳을 여행하면서 편한 것이 음식이다. 우리 음식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니 별 고생없이 여행을 할 수 있다.

 

 

 

 

 

점심을 먹은 뒤 모두 압록강가로 이동한다.

 

노인장대로 보이는 꽃이 아름답다.

 

 

 

 

 

강 건너편이 평안북도 만포땅이다. 북한의 행정지명으로는 자강도 만포가 되겠다. 바로 앞에 보이는 땅은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이라는데, 이름은 벌등도라고 한다. 이곳을 압록강 풍치구라 하여 조망대도 만들고 유람선도 띄워 이곳을 찾는 '남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돈벌이한다.

 

멀리서 보는 물은 아주 맑아 보이는데, 손이라도 담그고 싶은 마음에 내려가 보니 도저히 담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물이 더럽다. 상류쪽의 오염이 심하다는 증거인데, 강 건너 북쪽 만포쪽에 커다란 굴뚝이 보이는 것들로도 미루어 짐작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집안박물관이다.

 

 

 

 

 

이곳의 전시물은 모두 11,000여 점이나 된다고 하는데, 실제로 볼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제1관에는 고구려 무덤과 벽화, 산성에 대한 자료 전시실

제2관에는 광개토대왕릉 비문 자료실

제3관에는 고구려 유물 전시실. 고구려 건국 초기의 각종 토기, 청동화살촉, 칼, 농기구 등

 

박물관에는 동북공정의 증거가 될 만한 자료들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고구려를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기록해 놓았다.

 

 

 

 

● 환도산성

 

 

입구 주차장에서 바라본 환도산성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위치

 

 

 

 

집안시 북쪽 2.5km 지점에 자리잡은 산성으로 남쪽을 빼고는 삼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이다. 전시에는 국내성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방어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강화도나 조선의 남한산성과 같은 역할을 가진 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환도산성은 고구려 제10대왕인 산상왕 2년(198년)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10여 년 뒤인 산상왕 13년(209년)에 천도한 뒤 427년 천도하기 전까지 왕성으로 기능했다고 한다. 전체 길이 6951m에 이르고, 현재 6개의 문터 및 부분적으로 높이 5m에 이르는 성벽, 남북 길이 95.5m 동서 길이 86.5m에 이르는 궁궐터가 남아있다.

 

 

남문 옹성

 

 

 

 

 

10분쯤 걸어 올라가면 요망대가 나타난다.

 

바로 앞에는 동구(성 안에서 유적지라고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이 거의 유일하다. 왼쪽으로 압록강을 향해 흐르는 동구(통구) 강이 보이고, 저 멀리 집안과 압록강 건너 북한땅이 다 보인다. 모두들 이곳에 올라 산성 아래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발길을 되돌린다.  

 

 

요망대(전망대)

 

 

 

 

 

맞은 편에 보이는 넓은 평지가 왕궁지로 약 2천 4백 평의 대규모 왕궁 관련 유적지이다.

 

중국국가문물국 자료에 따르면 8각형 건물터 두 곳이 발굴되었으며 가장 높은 동쪽편에는 대규모 건물 기초부가 확인됐다고 한다. 또 고구려 관직명 중의 하나인 '小兄'이라는 글자를 새긴 원통형 수키와를 비롯한 기와류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왕궁지

 

 

 

 

 

뚝갈(은마타리)

 

 

 

 

 

글라디올러스

 

 

 

 

 

내려오는 길가에 까맣게 얼굴이 탄 모자가 자두 복숭아 등 몇가지 과일을 담은 바구니를 내놓고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 산성하 동구 고분군

 

 

환도산성 아래 동구(혹은 통구) 강가 넓은 평지에는 1500여기가 넘는 무덤군들이 널려 있다. 형제총이 대표적인 무덤으로 장수왕릉(장군총)의 초기 형태로 보이는 무덤이다.

 

 

 

 

 

 

● 우산 귀족묘지

 

 

국내성의 북쪽에서 동쪽으로 뻗은 우산(禹山), 그 아래에 넓게 분포된 무덤떼를 ‘우산하고분군’이라 한다. 국내성 인근의 고분군 중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곳으로 사신묘, 말구유무덤, 각저총(씨름무덤), 무용총(춤무덤) 등 벽화를 갖고 있는 무덤이 많다. 이 벽화들은 고구려인의 생활, 문화, 철학 등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어 그 가치가 높다.

 

우산하고분군에는 광개토태왕릉과 장수왕릉도 포함되는데, 이를 제외하고 관심을 끄는 무덤은 ‘오회분’, ‘사신묘’, ‘말구유무덤’ 등이다. ‘오회분’이란 '다섯 개의 무덤이 마치 투구를 엎어 놓은 듯한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오회분 4호묘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중국 당국이 벽화 보호를 위해 무덤 내부 공개를 막고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공개되고 있었다. 

 

현실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줄 서 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내부의 벽화는 물기가 엉겨 번질거렸다. 좁은 현실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도 되는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5호 무덤과 더불어 4호 무덤에서는 사신도 등 다양한 신을 형상화한 벽화와 천문도 등이 발견돼 고구려인들의 철학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사신묘’에서도 같은 그림들이 발견됐다고 한다.

 

 

4호묘의 청룡도

 

 

 

4호묘의 신선과 삼족오가 그려진 태양

 

 

 

 

 

● 광개토대왕비와 태왕릉

 

 

우산고분군의 동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391~412)으로 재위 기간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영락대왕이라 부르기도 하고, 사후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따 '호태왕'이라 일컫기도 한다.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넓혀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 영안, 동으로는 훈춘, 남으로는 임진강에 이르렀다.

 

 

광개토대왕비

 

 

 

 

 

이러한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대왕의 사후 2년째되는 414년에 그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이다. 높이는 약 6.39m, 너비 1.35m, 2.0m로 비신의 4면에 44행 1775자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의 남서쪽 300m 지점에 대왕의 능으로 짐작되는 태왕릉이 있다.

 

1880년경 청나라 농부가 발견하여 비의 탁본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됨으로써 고구려비로서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882년 만주를 여행중이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정인 사카와 중위에 의해 비문의 일부가 변조되기에 이르렀고, 1899년부터 일, 청 양국에서 비문 변조를 합리화하거나 선명한 탁본을 위해 비면에 석회칠을 하여 원형을 훼손하였다.

 

   비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1.추모왕의 건국신화오 대주류왕(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의 세계, 비의 건립 경위

     2. 대왕의 정복 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 기사를 연대순으로 기술

     3.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 지침, 수묘인 관리 규정 기술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비의 남서쪽 300m 거리에 있다.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보는 게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태왕릉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기단부 대부분이 무너져 내렸고, 위층의 방단부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990년 이래 중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결과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단의 한 변은 약 63m이며 높이는 16m 정도이다. 너비 약 1.75m, 높이 6m가량의 대형 석재 5개가 받치고 있다. 기단 위의 각 방단 내부는 막돌과 장돌로 채워졌다.

 

분구 정상부에서 명문전과 와당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원래의 분구 위에 작은 사당이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명문전 중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이라는 돋을새김된 문장이 있어 '태왕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위에는 자갈이 깔리고 그 바깥으로는 무덤구역을 알리는 흙담이 둘러져 있다. 무덤의 남방 180m 지점에서 기와·전돌과 함께 건물의 초석이 발견되어 무덤의 피장자를 위해 제사지내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에는 '신묘년 호대왕 무(?)조령 구십륙(辛卯年 好大王 巫(?)造鈴 九十六)'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 청동방울이 출토됐다. '서기 391년에 호태왕의 무녀가 96번째(또는 96개의) 방울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으로, 명문전의 내용, 무덤의 규모, 근처의 건물터, 광개토왕릉비 등을 근거로 광개토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던 상황에서 태왕릉이 곧 호태왕=광개토왕릉이라는 설을 굳히는 증거물이 되었다.

 

그러나 고국원왕이나 고국양왕의 능이라는 설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뒤에 지시됨)

 

 

능의 언덕에 핀 들꽃들

 

 

기린초

 

 

 

 

 

 

기린초 꽃 너머로 보이는 집안과 강 건너 북한 땅

 

 

 

 

대청부채꽃

 

 

 

 

층층이꽃

 

 

 

 

   

 

● 장수왕릉(장군총)

 

'장군총'이란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현지 사람들이 어느 장수의 무덤일 것이라 생각하고 불러온 이름인데, 지금은 장수왕릉이란 이름으로 굳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 무덤이 광개토대왕의 능이라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중국 학계에서는 장군총이 장수왕의 능으로 보는 견해가 거의 정설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평양으로 천도하여 평양에서 죽은 장수왕의 시신이 여기에 묻혀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이 강력한데, 장수왕릉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고구려 왕들은 왕위에 오르면서 무덤을 준비한다는 반박을 하기도 한다.

 

장군총의 기단 한 변의 길이가 31.58m, 높이는 13.1m로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려지고, 또 중국에서는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뒤쪽 계단을 통해 널방(돌방, 석실, 무덤방)이 있는 5층까지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큰 널방에는 널받침 두 개가 놓여 있어 왕과 왕비의 합장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후, 나중에 다른 한 사람이 죽으면 다시 널방의 문을 열고 시신을 합장할 수 있게 된 것이 고구려 무덤의 특징으로, 이 구조 때문에 쉽게 도굴 당하였다.

 

장군총 주변에는 딸린무덤(배총)이 모두 5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 왕의 후궁의 무덤이 아닐까 추측할 뿐 확실한 증거는 없다.

 

 

 

※ 태왕릉, 장군총의 주인공을 둘러싼 논란

한ㆍ중ㆍ일 3국에서 거의 정설로 굳어가는 태왕릉을 광개토왕릉,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는 일반적인 학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설도 있다.

 

< 설 1 >

 

태왕릉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되는 청동방울의 ‘호대왕’ 명문이 광개토대왕 이전 미천왕 때부터 왕에 쓰던 일반 명칭으로, 미천왕, 문자명왕, 양원왕에게 똑같이 ‘호왕(好王)’이라는 칭호를 썼고, 1900년대 초 프랑스, 일본 학자들이 장군총을 조사할 때도 무덤 내에서 ‘호태왕’이라는 위패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또 글자체가 너무 치졸하고 출토 지점도 사람에 따라 따르게 말하는 점이 진위를 의심케 한다는 것이다. 또,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비에서 300여m 떨어져 왕릉급 무덤으로는 가장 가깝지만, 비석이 무덤의 뒤쪽에 있다는 점 때문에 국내와 일본에서 광개토대왕릉이 아닐 가능성이 제기돼왔다. 태왕릉이 장군총에 비해 4배나 큰 데도 관이 있는 현실은 장군총의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어 체격이 큰 광개토대왕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왕릉이 백제군과 싸우다 전사해 시신을 건지지 못한 고국원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며, 정작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광개토대왕비와 두번째로 가까운 대형 무덤으로 비석 방향으로 무덤 정면이 나있는 장군총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장군총이 태왕릉보다 후대의 양식이며 관대의 길이가 3.2㎙에 이르는 점, 광개토대왕비에 광개토대왕의 무덤을 고지에 있는 ‘산릉’이라고 설명한 점, 장군총 내에서 ‘호태왕’ 위패가 발견된 점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리고 고국원왕릉 가까이 광개토대왕비를 배치한 것은 백제를 정벌한 광개토대왕이 할아버지의 원한을 갚았다는 것을 천명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한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 설 2 >

 

백승옥 함안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청동방울이야말로 태왕릉이 광개토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아가 여러가지 정황으로 봐서 태왕릉은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호태왕이라는 명칭이 광개토왕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구려왕들에게 붙인 범칭이며, 양원왕이나 평원왕 등 다수의 왕들도 '호왕(好王)' 또는 '호태왕(好太旺)'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역대 왕의 계보를 참조할 때 태왕이란 명칭은 살아있을 때 사용하는 존호가 아니라 죽은 다음에 붙이는 시호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평강상에 묻힌 평원왕)'이란 이름에서 보듯 '○○호태왕(○○好太王)'은 시호이기 때문에 '호대왕'이라고 적힌 유물이 수습됐다고 해서 광개토왕의 능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무리라는 논리다.
이어 청동방울이 만들어진 서기 391년은 고국양왕이 죽고 광개토왕이 즉위한 시기이기 때문에 '태왕릉=광개토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더욱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언급한다. 방울은 왕릉에 부장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해에 무덤에 넣을 방울을 만든다는 것은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유물에 새겨진 명문은 생전에 왕을 모시던 무녀가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청동방울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게 자연스러우며 이에 맞는 왕은 고국양왕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 광개토왕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백 학예사는 평양에서 죽은 장수왕의 시신을 지안으로 가지고 와 매장했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 그동안 장수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군총이 사실은 광개토왕릉이라고 주장했다.

 

 

 

후궁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장군총의 딸린무덤(배총)

 

장수왕릉의 동쪽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데, 도굴된 채 널방이 휑하니 드러나 있다. 

 

 

 

 

 

 

장군총 오르는 길에도 어김없이 자두복숭아(자두와 복숭아의 교배종이라고 한다)와 사과를 파는 과일 장수들이 따라와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다닌 길 주변엔 유달리 과실수가 많았다. 별 맛이 있어 보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둠이 깃들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안스러워 값을 물어 본다. 인민폐 10원에 거의 반 대야나 되는 자두복숭아를 봉지에 담아 준다.

 

도사님과 함께 모두 씻어 버스에 타고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맛을 보니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1달러를 주고 산 것이 미안해 죽을 지경으로... 이곳의 과일이 유명하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다.

 

 

 

집안을 떠나 퉁화를 향해

 

장군총을 마지막으로 집안에서의 고구려 유적지 순례는 모두 끝났다.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버스는 집안을 출발, 퉁화를 향해 달린다. 퉁화에서 밤기차를 타고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까지 가야한다. 혼강을 끼고 우산의 기슭을 거슬러 오르며 난 도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혼강과 골짜기의 풍경이 너무나 매혹적이다. 아, 이곳이 멀지만 않다면 또 찾아보았으면 좋으련만...

 

무덤과 성벽의 석재를 가져왔을 고구려 채석장 방문이 일정에는 나와 있지만, 혼강에서 멀어지며 우산을 거슬러 오르는 곳에서 위치만 확인하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 바쁜 일정 때문에 주마간산격의 여행이 되는 것 같아 몹시 아쉽다.

 

 

 

8시 반 혼강을 건너 통화시에 도착하다. 인구 250만이나 되는 큰 도시로 도시 전체가 제약업에 의존한다고 할 정도인데,  제약사가 무려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산머루주와, 오미자주도 유명하다고 가이드가 강조한다.

 

'아리랑'이라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잠시 시간을 내어 혼자서 혼강으로 나와 본다. 강 건너 멀리 불을 밝힌 건물이 보이는 곳이 공원일까. 밤풍경이 아름답다. 더위를 피해 다리 위로 나와 바람을 쐬고 있는 연인들과 가족들도 눈에 띈다. 

 

 

 

 

 

10시 반, 이도백하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6인 1실의 객실에서 도사님과 나, 그리고 수현 형 4가족이 한 방을 차지했다. 도사님과 나는 술을 챙기기 시작했고, 백두산을 만날 설레임으로 술자리는 기분 좋게 무르익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