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고구려

고구려, 백두산 순례 (2) : 고구려의 첫 도읍지라는 환인 흘승골성(오녀산성)

모산재 2006. 12. 30. 03:22

 

고구려, 백두산 순례 (2) / 2006. 08. 14

고구려의 첫 도읍지, 환인 흘승골성(오녀산성)

 

 

 

 

1시를 넘어서 잠들었는데 5시에 일어나야 했다. 오늘도 일정이 빡빡하여 흘승골성(오녀산성)을 다녀온 뒤에 돌아와서 아침 식사를 하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날씨가 무척 흐리다.

 

커튼을 걷고 바라본 숙소 주변 풍경이다. 혹시 저 멀리 가운데에 있는 봉우리가 홀승골성일까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니다. 흘승골성은 오른쪽인데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방향에 있었다.

 

 

 

 

 

환인은 고구려 시조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운 도읍지인 홀본, 또는 졸본의 지금 이름이다. 서기 3년, 추모왕의 아들인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옮길 때까지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홀본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옛도읍이고, 고구려의 5부족 중 계부루가 자리잡았던 곳이기도 하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왕이 엄리대수를 건너 첫도읍을 정한 곳은 홀본인데, 홀본은 비류골에 있고 서쪽 산 위에 성을 짓고 도읍을 정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처음 추모왕이 이곳에 왔을 때는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가에 간단히 집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오녀산성이 바로 흘승골성임을 알 수 있다.

 

 

밖에 나와 출발을 기다리는 시간에 숙소 주변의 풀밭을 거닐며 풀꽃들을 탐색한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우산을 받쳐 든 채...

  

 

 

수박풀 꽃

 

 

 

 

 

애기원추리

 

 

 

 

 

쇠서나물

 

 

 

 

 

 

이러는 사이 빗발은 더욱 굵어지고, 결국 비가 긋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침을 먹고 출발하기로 한다. 7시 경에 출발, 혼강(이 혼강은 무순으로 흐르는 혼하와 다른 강으로 압록강의 지류이다.)을 막아 만든 환인댐 옆을 지나 흘승골성(오녀산성) 아래에 도착했다.

 

산성 아래에 가서는 다시 전용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중국 사람들의 상술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버스 크기도 다름이 없건만...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중국이 '오녀산성'이라 부르는 흘승골성이다.

 

 

 

 

 

오녀산이란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먼 옛날 마을을 괴롭히던 검은 용이 있었는데, 도적, 탐관오리들을 응징하며 가난하여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우던 협객인 오자매가 검은 용과 싸우다 용과 함께 죽었는데, 마을을 지켜낸 다섯 자매를 기념해 오녀산(五女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민간 전설에 근거해 붙은 산 이름으로 중국 정부는 2004년 흘승골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문화유산의 역사적 근거는 분명 고구려의 '흘승골성'임에도 그런 이름으로 등록한 것만 보아도 고구려를 바라보는 중국 정부의 시각을 짐작할 수 있다.

 

 

버스를 바꿔 타고 꼬불꼬불 좁은 산길을 오른다. 산 언덕에는 노란 마타리꽃과 하얀 뚝갈(은마타리) 꽃이 지천으로 피어 내 맘을 안타깝게 한다. 느릿느릿 걸어서 오르면 얼마나 좋으랴!

 

드디어 산성 입구, 선명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크를 곁에 두고 '오녀산 산성'이라는 중국식 이름이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 산성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최초로 쌓은 성으로, 고구려의 첫 수도 흘승골성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한때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초기 도성설이 부정되기도 했으나, 1986년 도기, 철기, 동기, 자기, 옥기, 금, 은 등 고구려 유물이 발굴되고 주위에 수많은 무덤떼들이 발견되어 고구려 초기 도성설이 일반화되고 있다고 한다.

 

 

흘승골성의 남, 서, 북벽은 100여 m쯤 되는 절벽으로 자연 요새를 이루고 있어 남동쪽 일부와 동쪽에만 성벽이 쌓여 있다.

 

 

올려다 본 산성의 자연 절벽

 

 

 

 

 

입구에서부터 산성 위에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돌계단 수가 999개라는데, 어떤 여선생님은 계단 수를 세면서 오르고 있다.

 

여기도 어김없이 까맣게 얼굴이 탄 가마꾼들이 기다리고 있어 호객을 한다. 마음이 불편해서 도저히 탈 수 없을 듯한데, '있어 보이는' 육덕 좋은 한 중국인 젊은 여자는 가마에 비스듬이 누워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오르고 있다. 아무리 남자지만 두 가마꾼의 힘들어하는 표정과 대조되는 이 모습이 보기 싫어 숲그늘의 풀꽃들로 얼굴을 돌린다.

 

 

영아자(미나지) 꽃

 

 

 

 

 

쐐기풀

 

 

 

 

 

 

마지막 돌계단, 일선천(一線天)

 

이 곳을 통과해야만 성 안에 이를 수 있으니, 군사적으로는 난공불락의 요새일 수밖에 없으리라. 남문쪽으로 오르는 돌계단은 더욱 좁아서 두 바위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실처럼 보일 정도로 좁다고 하여 이 두 바위 틈을  ‘일선천(一線天)’이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정상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는 이 성벽은 견치석을 이용해 촘촘히 쌓은 것이 특징이다. 성문이 있었던 곳은 성벽이 항아리처럼 안쪽으로 움푹 들어온 ‘옹성(甕城)’ 구조인데, 이는 고구려의 성문 형태로 많이 발견되는 특징적인 양식이다.

 

산성에는 동문, 남문, 서문 등 3개의 문이 있는데, 완만한 지형에 있는 동문과 남문은 중턱에 있다.  

 

 

 

서문

 

 

 

 

 

해발 820m의 꼭대기인 성 안은 남북 1000m, 동서 300m의 넓은 평지로 되어 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서는 한 일(一)자로 된 산 정상을 가리켜 임금을 낳을 수 있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의 명당으로 본다는데, 그 당시에야 풍수지리설이 없었을 터이지만 흥미거리는 되겠다.

 

 

왕줄나비? 흰줄과 노란 줄 사이에 붉은 줄이 선명한 것이 다르다.

 

 

 

 

등갈퀴나물<

 

 

 

 

노랑물봉선

 

 

 

 

 

 

중국에서 궁궐터라고 말하는 곳.

 

안내판에는 "길이 13.5m 너비 5m의  건물 규모로 보아 궁지로 추정된다."고 써 놓았다. 지금은 6개의 주춧돌과 1개의 기둥 조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추모왕(주몽)이 거처했던 궁궐이란 말일까. 철기문화가 갓 들어오던, 2000 년 전이란 역사적 시간을 고려해 본다면 일면 수긍되기도 하면서도 왠지 궁궐로 보기에는 터무니없이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상시의 방어용 궁궐, 일종의 행궁이라면 몰라도...  

 

 

 

 

 

 

고구려의 첫도읍지를 졸본(홀본)으로 알고 있는 내게, 수도가 산 꼭대기에 있다는 사실이 참 낯설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료를 찾다 보니 이곳이 도읍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오녀산성'을 고구려의 도읍지로 정설화하고, 여기에서 발굴된 건물터를 궁궐터와 그에 딸린 주거시설로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가 한 지방의 작은 나라임을 기정사실화하고자 하는 중국의 의도야 뻔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왕궁 유적으로 보기엔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고구려를 포함한 한민족의 전통적인 궁성 양식, 평상시의 생활공간인 평지성과 전시의 항전을 위한 산성이라는 두 개의 성 개념을 적용하여, 이 '오녀산성'은 외적 침입에 대비한 산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 건물터가 도교사원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근거로 이 산이 중국 도교에서 10대 명산으로 삼아 왔고, 또 이 산 정상에는 일찍이 중국식 신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만든 도관(道館·도교 사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곳이 산성이라면 수도로서의 평지성이 따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궁궐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오녀산 주위에 고구려 시대의 수많은 무덤떼들이 발견되었는데, 1970년 산성 바로 아래에는 혼강을 막고 담수할 때 수백기의 무덤이 수몰됐다고 한다. 평지에 있었던 고구려 최초의 도성이 물 속에 가라앉았는지도 모른다.

 

다만 고려대 최종택 교수는, 혼강을 따라 10킬로미터 가량 남쪽에 하고성자고성이 위치해 있는데, 오녀산성과는 달리 강변의 평지에 축조되어 있어 평상시 왕이 기거하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성의 형태는 장방인데 동벽은 유실되었으나 600여 미터의 토성이 남아 있다고 한다.

  

 

 

별박이세줄나비

 

 

 

 

산형과의 풀

 

 

 

 

 

태극 모양의 비류수(혼강)를 굽어보는 전망대

 

 

 

 

 

환인댐으로 호수가 된 혼강.

 

추모왕(주몽)도 이 곳에서 비류수(혼강)를 굽어보며 건국의 기초를 닦을 여러 상념에 잠겼을 것이다. 이 호수는 일제가 막은 댐으로 생겼는데, '환용호(桓龍湖)'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곳에는 유람선을 타고 나가 '오녀산성'(홀승골성이 아니라)을 감상하는 관광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호수의 오른쪽 끝이 댐이 있는 곳이고, 댐 아래쪽에 환인(고구려의 졸본)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이건 뭘까...

 

 

 

 

 

마르는 일이 없다고 하는 천지. 저 위쪽에 샘터도 있다고 한다.

 

 

 

 

말털이슬

 

 

 

 

멸가치

 

 

 

 

취나물?

 

 

 

 

참나물

 

 

 

 

꽃며느리밥풀

 

 

 

 

초롱꽃과로 보이는 풀... 

 

 

 

 

긴담배풀

 

 

 

 

 

주거지 터

 

 

 

 

참취

 

 

 

 

며느리밥풀꽃

 

 

 

 

 

점장대(點將臺)

 

산성의 남쪽 맨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다. 군사를 지휘한 장대로 멀리 혼강과 환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이곳에서 추모왕(주몽)은 건국 초기에 나라의 토대를 굳건히 쌓기 위해 군사들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을 것이다.

 

 

 

 

 

점장대에서 내려다 본, 호수가 된 비류수

 

 

 

 

큰꿩의비름

 

 

 

 

모싯대

 

 

 

 

두메부추

 

 

 

 

애기일엽초와 구실사리

 

 

 

 

 

대형 집터

 

 

 

 

자주꽃방망이

 

 

 

 

산박하

 

 

 

 

 

다시 서문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산성 순례는 끝난다.

 

 

 

 

 

 

내려가는 길에 만난 풀꽃들

 

 

진범 

 

 

 

 

물레나물

 

 

 

 

차풀

 

 

 

 

땅빈대

 

 

 

 

 

다시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산길에서 뒤돌아본 흘승골성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만난 풀꽃들

 

 

어저귀

 

 

 

 

털여뀌

 

 

 

 

가시상추

 

 

 

 

매듭풀

 

 

 

 

 

 

여기서 다시 우리의 전용 버스를 타고 환인을 지나 국내성이 있는 집안(지안)을 향한다.

 

 

예전의 비류수, 혼강 너머로 바라보는 흘승골성

 

 

 

 

 

 

 

환인의 오녀상

 

고구려의 흔적을 덮어 버리는(또는 희석시키는) 또 하나의 상징물인 오녀상이 환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우뚝 솟아 있다. 성의 이름이 '오녀산성'이라고 증언하는 듯...

 

 

 

 

 

 

여행을 다녀 온 뒤인 지난 10월, 중국에서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을 이 지역 포도주 홍보 마크로 활용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 아이스 와인으로 이미 중국에서는 '포도주의 마오타이'로 불릴 만큼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오녀산' 포도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까지 추가되어 있었다.

 

야생 산포도가 절로 술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다섯 자매가 이를 기뻐해 하늘에 절을 했고, 이후 해마다 가을에 포도를 수확해 술로 만들어 마시니 병사들의 몸이 건강해지고 사기가 충천해 적군을 물리쳤다.

 

'오녀산'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의 흔적을 지우는 일은 상업적으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환인 시내 거리 풍경

 

 

 

 

 

 

오전 10시 반, 환인에서 버스로 3시간이 더 지난 오후 2시 무렵에야 집안(지안)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