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여주 여행 (1) : 여주 김영구 가옥, 두 개의 부엌과 두 개의 사랑채

모산재 2006. 12. 10. 02:18

 

여주 여행 (1) : 여주 김영구 가옥

 

2006. 12. 02

 

 

 

 

여주의 남한강 바람이나 쐬자는 이 선생님의 제안에 군말없이 좋다고 따라 나섰다.

 

대학 시절 한글날을 기념해서 영릉과 신륵사를 돌아본 것이 여주와의 첫 인연이었고, 10여 년 전 동료 교사들과 역사 기행을 하면서 그 곳 외에도 명성황후 생가, 고달사지, 목아박물관 등을 두루 돌아 보면서 여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 이후론 기회가 될 때마다 틈틈이 들렀고, 소풍날이면 따로 계획을 세워 아이들을 전세버스에 태워 이곳으로 역사 문화 체험학습을 떠나기도 했다.

 

 

 

구리로 해서 팔당으로 접어드는데 검단산, 예봉산 등 주변의 산봉우리들엔 하얀 눈이 쌓였다. 언제 눈이 왔길래 저런가 했는데, 양평 쪽으로 들어서니 온 세상이 하얗다. 엊저녁에 눈이 제법 많이 오신 모양이다. 산과 이어지는 도로변의 관목 덤불에는 눈꽃조차 화려하다.

 

이포나루를 지나자마자 천서리, 그곳의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막국수 한 그릇을 시원스레 비우고 여주로 향하는 길, 이 선생님이 김영구 가옥을 들렀다 가자고 한다. 내게는 생소한 곳인데, 이 뜻밖의 제안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저 바람이나 쐬자는 걸로 생각했는데 이건 문화 기행이 아닌가.

 

 

 

 

대신면 보통마을에서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서 눈 쌓인 야트막한 구릉을 넘어서자 김영구 가옥이 나타난다. 중요민속자료 제126호로 지정된 가옥이다.

 

뒷산을 배경으로 정남향을 하고 앞으로는 한강이 멀리 내다보이고 있는 이 집은 1753년(영조 29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폐쇄적인 공간 구조가 경기지역에 드문 양식이라고 하는데, 석재가 잘 다듬어져 있고, 목부재들이 세련되게 손질되었으며 추녀가 시원스레 뻗어있는 모습 등이 빼어난 경장(京匠)의 솜씨로 지어진 건물임을 짐작케 한다.

 

원래 대문은 집의 앞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집의 오른쪽에 나 있는 이 문이 방문객에게는 대문처럼 생각된다.

 

 

 

 

 

이 집은 조선 후기 여주를 대표하는 명문거족인 창녕 조씨 문중의 조명준(曺命峻, 1728~1796)이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아들 이조판서 조윤대를 비롯하여 이조판서 조봉진, 문정공 조석우, 독립운동가 조성환(曺成煥, 1875~1948) 등의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였는데, 조성환의 부친인 진사 조병희(曺秉憙, 1855~1938)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재산을 처분하면서 타인의 수중으로 넘어가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같은 역사를 지닌 집이므로 명칭도 '독립운동가 조성환 가옥'으로 바꾸는 것이 옳다고 하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 밭이 된 행랑채 자리

 

이 집은 안채·사랑채·작은사랑채·곳간채가 모여 □자를 이루고 있으며, 원래 대문은 바깥행랑채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깥행랑채가 헐려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눈 덮인 밭으로 되어 있는 이곳이 행랑채 자리였으리라.

 

 

 

 

 

 

● 사랑채

 

사랑채는 큰사랑·큰사랑대청·사랑방·머리대청을 一자로 배치하고 앞쪽에 길게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큰사랑 앞에는 마당쪽으로 높은 누마루를 만들었다. 집의 뒤뜰에는 一자형의 광채가 길게 놓여있다. 안방과 대청, 사랑방과 사랑대청에는 각각 분합문을 달아서 여름에는 열어 놓아 시원하게 공간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격자 문살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목재를 다룬 솜씨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마당 쪽으로 나온 누마루는 두 개의 높은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목재는 비바람에 풍화되지 않고 아름다운 결과 빛깔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서까래 하나하나에도 장인의 섬세한 솜씨를 읽을 수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의 나뭇결, 자연미가 절로 느껴진다.

 

 

 

 

 

 

● 안채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대문의 오른쪽에 一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안마당을 들어서면 안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하는 ㄷ자형의 안채가 자리한다. 안방의 왼쪽으로 부엌이 꺾여 자리잡았고 그 아래로 찬광·찬모방·마루가 있다.

 

대청의 오른쪽에는 마루방·건넌방·부엌이 있는데, 부엌 옆에는 방 2칸과 마루가 있는 작은 사랑채가 돌출하여 있다. 작은 사랑채는 더러 있기는 하지만 아주 드문 것이어서 이 집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안채의 양쪽에 각각 부엌이 있는 쌍부엌방 또한 특징적인 점이다.

 

 

 

 

안마당의 중앙에는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어 사랑채와 안채와의 직접적인 시선을 막고 있다.

 

 

 

 

1970년 가옥주가 집을 매입한 후에 대청은 입식 부엌으로, 건넌방의 윗방은 개량식 화장실로 개축하였다. 툇간에 면한 입식 부엌 전면에는 알루미늄 샷시를 달아놓아 기존의 들어열개문은 항상 열어놓고 있다.

 

 

 

 

 

 

● 안마당에 있는 해시계 (경기도 민속자료 제2호)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별 장식이 없다. 조선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태양의 일주운동을 이용하여 그림자의 방향으로 시각을 재었던 기기이다.

 

 

 

 

 

사랑채 뒤로 보이는 나무들. 뒤뜰은 각종 나무가 울창한 뒷산과 연결되어 산의 아름다움을 집안으로 유도하고 있으며 동쪽 둔덕의 소나무는 고색창연한 집의 운치를 더해준다.

 

 

 

 

 

김영구 가옥은 사랑채 우측에 안사랑채를 둔 것과 사랑채의 좌측 끝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진입하는 등, 배치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앞에서 잠깐 소개한 대로 안채의 부엌이 두 개인 점도 독특한 형식이다.

 

<한국주거사>(홍향옥 저, 민음사)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가족 가계 계승 방법을 동남형, 서부형, 제주형, 함경도형의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 중에서 서부형이 쌍부엌집과 관련이 있는 유형으로, 전북 정읍의 김동수 가옥, 남원의 몽심재, 충남 논산의 윤증 고택, 예산의 평원정 등이 이러한 형태인데, 부모 생전에 안방이나 살림 권한을 자식이나 며느리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특색이 있다. 실제로 논산 윤증 고택의 경우 지금도 팔순의 시어머니가 안방에 기거하고 있으며, 경제권은 아직도 시어머니에게 있다. 이들 지역의 안채를 보면 ㄷ자형의 완전 대칭인 경우가 많은데, 정읍의 김동수 가옥의 경우 안방과 건넌방의 크기가 같으며, 안방과 건넌방의 부엌의 크기도 같다. 오랜 세월을 건넌방에서 살아야 하는 맏며느리에 대한 배려의 결과이다.

 

화성의 정용채 가옥도 안채의 부엌이 두 개인데, 이러한 쌍부엌집을 백제 문화권의 가옥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