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31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보물 제166호) / 국립중앙박물관

홍제동 사현사의 옛터에 있던 탑으로, 시가지 확장을 하면서 1970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는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원래 탑은 자연적인 바위 위에 세워져 있던 것이어서 기단이 따로 없다. 그래서 맨 땅 위에 세워진 모습이 안정감이 없어 다소 어색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중후하면서 경쾌함과 안정성을 겸하고 있다 현재 높이는 3.51m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각 층의 몸돌은 전체적으로 위가 좁고 아래는 넓어 목조 건축을 모방하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1층 몸돌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2층 이상은 기둥 모양을 새겨 한 면을 둘로 나누고 그곳에 문짝으로 보이는 네모난 액자형을 표시하였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나 육중해 보이고,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수평으로 펼쳐..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려시대 석불입상 둘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두 석불상은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정보 외에는 언제 어디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다. 두 석불 모두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인데, 가슴에 올린 수인(手印)이 낯선 모습이다. 왼쪽에 있는 석불상은 두광과 하나인 광배가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은 모습인데 왼손은 복부 위쪽 가운데에 오른손은 오른쪽 가슴 위에 얹고 있다. 눈썹은 없이 살구씨 모양의 눈을 새겼는데, 얼굴 표현이 다소 둔한데 비하여 손과 옷주름 표현은 사실적이다. 팔에서 늘어뜨린 옷자락이 두껍게 표현되었다. 발 부분은 훼손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있는 석불상은 신체 대지 두상이 지나치게 크고 귀가 과장되게 길지만 지그시 감은 눈에 코와 입 등의 표현이 사실적..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 석탑과 쌍사자석등 기타 석조유물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전시관 건물 앞뜰에 일렬로 전시된 사리탑과 석등 외에도 동편에 아늑하게 조성된 정원 곳곳에 배치해 놓은 석탑과 장명등, 석불, 문인석, 장명등 등 여러 가지 석조유물이 있다. 옛 보신각 동종 건물 뒤편 동산길로 들어서면 차례대로 감상할 수 있다. 국보로 지정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탑 2기, 쌍사자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고달사지 석등 등이 특히 눈여겨 볼 만한 문화재이다. ■ 개성 남계원칠층석탑 국보 제100호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남계원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

나옹화상의 세 사리탑, 석탑 형식의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무학대사의 스승으로 조선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나옹화상 혜근(惠勤, 1320~1376)의 사리탑은 세 곳에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나옹화상이 입적한 여주 신륵사에, 또 하나는 나옹화상이 오래도록 머물며 주지로 있었던 회암사 터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나옹화상의 제자에 의해 세워진 원주 영전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혜근(1320∼1376) 스님의 호는 나옹이고 법호는 보제존자(普濟尊者)다.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경북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了然)에게서 득도하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 돌아다녔다.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하였으며 원나라에 가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 처림(..

웅장한 고려시대 사각석등, 개성 현화사지 석등 / 국립중앙박물관

높이 4.2m로 탑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형 석등으로, 현화사 창건 뒤인 1020년(현종 11)에 건립되었다. 개성 현화사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옛 박물관 자리이던 덕수궁으로 옮겼다. 그 뒤 다시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이건하였으나 해체되어 박물관 유물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다시 세운 것이다. 헌화사지 석등은 전형적인 팔각석등 양식에서 벗어난 사각석등이라는 독특한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고려시대 개성 일대에 유행했던 양식이다. 화창(火窓)을 낸 화사석(火舍石)이라는 닫힌 형식이 아니라 네 기둥만 세워진 열린 형식이다. 화사석은 하나의 돌이 아닌 4개의 원형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기둥은 석등의 간주석을 축소해 놓은 것과도 같은 고복형 기둥임이 특징이다..

나주 서문 석등(보물 제364호) / 국립중앙박물관

전라남도 나주읍성 터 서문 안 절터에 파손된 채로 남아 있던 것을 1929년 옮겨온 것이다. 석등의 기둥 돌에는 읍성의 안녕과 부귀를 빌며 삼세불께 공양하고자 석등을 세운 내력과 함께 석등이 세워진 시기가 기록되어 있다. 석등의 본체인 화사석(불밝이집)은 파손되어 조선총독부 시절 옛 모습대로 만들었으며, 맨 꼭대기의 꽃봉오리 모양의 보주는 부서진 것을 옛 모양대로 새로 만든 것이다. 지붕은 처마 밑에 드림 장식을 하고 처마와 추녀 끝에는 귀꽃 장식을 하여 고려시대 중엽에 새로이 드러내는 매우 장식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위에는 현재 작고 아담한 덧지붕이 놓여 있다. 정사각형 지대석 위에 8각의 연화대인 하대석이 놓였다. 상대석은 간주넉을 사이에 두고 하대석과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연꽃이 새겨져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보물 제190호) / 국립중앙박물관

거돈사터에 있던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의 사리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인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있다. (거돈사지에는 이곳 원공국사탑을 재현한 탑을 세워 놓았다.) 원공국사(930∼1018) 지종>(智宗)>은 17세에 계를 받고 고려 광종 초기 승과에 급제한 뒤, 중국에 유학하여 법안종(法眼宗)을 배웠다. 당시 남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법안종은 선종 계통이면서도 교선일치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당시 전제왕권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혁정치를 펴던 광종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지종은 광종의 비호를 받으면서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자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좌절되면서 법안종 세력은..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보물 제361호) /국립중앙박물관

■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보물 제361호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대경대사의 탑비로, 보리사터에서 발견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있다. 대경대사(大鏡大師)는 9세에 출가하여 교종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선(禪)을 연구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존중하여 보리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다. 69세에 이 절에서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대경’, 탑 이름을 ‘현기’라고 내렸다. 비는 거대한 비머리돌(이수)에 비해 받침돌인 돌거북(귀부)가 작고 납작해서 조화와 균형을 잃은 모습이다.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공적 등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의 문장가였던 최언위가 글을 짓고, 이환추가 글씨를 썼으며, 제자인 최문윤이 글..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함(보물 제365호) / 국립중앙박물관

■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보물 제365호 강원도 원주의 흥법사터에 있던 것을 1931년 경복궁으로 가져왔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옮겨 놓았다. 진공대사 충담(忠湛)의 속성은 김씨. 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신라 왕족의 후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출가하여 장순선사(長純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889년(진성여왕 3) 무주 영신사(靈神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법상부(法相部)를 배우고 율장(律藏)을 연구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 가서 정원(淨圓)을 만나고 효공왕 때 귀국하여 왕사(王師)가 되었는데, 신라가 망한 뒤에도 고려 태조의 왕사로 있었다. 죽은 뒤 원주 흥법사(興法寺)에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짓고 당태종의 글씨를 새긴 탑비를 세웠다. 진공대사 사리탑 곁에는 석관을 연상시키는 석함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