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일> 2000년 8월 4일 금요일
불의 땅 투루판의 고성에서 만나는 위구르 춤
투루판역 → 녹주빈관(오아시스호텔) → 고창고성 → 아스타나 고분군
→ 화염산 → 포도구 → 교하고성 → 까레즈(坎兒井) → 소공탑
투르판역 도착하다
북경시 5시 30분, 일어나 세수하다. 그리고 짐들을 정리하고 챙기다. 아직은 깜깜한 어둠.
6시 20분, 투루판역에 도착하다. 출구로 나가자, 다시 현지 가이드가 마중을 나와 있다. 흑룡강성 목단강 출신이라는 25세의 길병호 씨. 상학 씨와 동향이다. 북한식 억양이 매우 강하다. 이후 안내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다.
아직도 컴컴한 시간, 하늘은 잔득 찌푸리고, 빗방울까지 몇 방울 듣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기차는 천산산맥과 화염산 사이로 서진하여 투루판 역에 닿았고, 역에서 다시 시내까지는 화염산 줄기 옆구리를 왼쪽으로 끼고 돌아 고속공로로 약 한 시간 동쪽으로 달려야 한다. 고속공로는 교통량이 적은 탓인지 흰색 중앙선으로 양방향으로 다 사용한다. 노면은 아주 양호하다.
과연 멀리 왼편(북쪽)으로 천산의 거대한 산맥들이 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풀 한 포기 없는 검은 사막의 지평선과 낮은 산들이 가물가물 보일 뿐이다. 시내로 가는 길은 계속 완만한 내리막길, 투루판 분지의 1/3이 해저 지대임을 실감한다.
시내에 이르자 날은 환히 밝았다. 먼저 눈에 띄는 풍경이 어제 양관에서 보았던 포도건조장들이다. 변두리 민가 2층 건물들은 모두 그렇다. 포도밭도 많이 보이고, 호텔로 들어서는 길은 포도나무 가로수로 터널을 이루었다. 기공체조하는 사람들도 어김없이 보인다.
40도를 넘는 가마솥 같은 투루판
숙소인 녹주빈관으로 들어서자, 종업원이 물수건과 차를 일일이 대접해 주다. 일행 모두 흐뭇해하다. '녹주'라는 말은 오아시스를 뜻한다. 아침 식사로 빵과 우유를 먹다. 뷔페식이고 제대로 된 맛이라 잘 먹다. 마침 TV에는 위구르인들의 춤과 노래공연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는데, 시선을 붙들어 맬 정도로 노래가 감미롭고 춤은 역동적이다. 호텔 벽면에는 위구르인들의 모자 등 장식물들이 정감 있게 걸려 있다. 위구르 전통복장의 줄무늬 원색을 살린 위구르인 여종원들의 모습도 선이 곱다.
식사 후 잠시 거리 구경. 호텔 앞 아이들이 끄는 당나귀 수레가 호객을 하는데, 병철 형 등 몇은 응하고, 우리는 가까운 거리를 나선다. 교통량은 거의 없어 차도로 걷는 사람들도 있다. 어제까지의 여정에선 뜨거워도 후덥지근하진 않았는데, 이곳 투르판은 후덥지근하고 땀이 끈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살수차가 물을 뿌리고 있다. 연 강수량이 16m, 증발량이 3000mm라는데, 왜 이리 후덥지근할까?
투루판의 옛 이름은 화주(火州), 과연 그 이름에 맞게 여름 기온이 43도에 이르며 40도를 넘는 날이 연간 50여 일에 이른다고 한다. 화염산의 지표 온도는 70여 도에 이른단다. 연 강수량 16mm, 연간 비오는 날이 5일을 넘지 않는다. 날씨 탓에 파리가 없단다. 분지는 동서 475km, 남북 75km, 넓이 6만여 ㎢. 시내 넓이는 22 ㎢, 남쪽 저지대 오아시스를 따라 발달했다. 천산산맥의 물을 끌어들인 까레즈는 포도를 기르는 등 생명의 젖줄이 되고 있다.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구도는 현재 우루무치이지만, 옛날 이 서역에서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곳은 동쪽의 둔황과 서쪽의 투루판이었다. 천산산맥의 보고타봉 남쪽에 펼쳐진 분지에 발달한 이 오아시스 도시는 한무제가 서역지배의 거점으로서 고창군을 설치하면서부터 역사에 등장한다. 10세기 이래 위구르 족의 중심지가 되었다. 투루판이라고 개명한 것은 1912년부터이다. 투루판이란 위구르어로 낮은 땅을 의미한다.
인구는 위구르인이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으로 여행 오는 한국인 관광객은 작년까진 미미했는데(일본인들은 많지만), 올해부터 늘어 5300여명, 내년에는 8000명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란다.
동쪽 고속도로변 검은 들판엔 중국 석유매장량의 1/3을 차지하는 유전이 있다. 멀리 상하이까지 송유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다.
고창고성(高唱古城)
거리 구경 후 출발하다. 시내를 벗어나자 검은 사막이 펼쳐지고, 계속 동쪽으로 10여분 더 달리니 황토빛 들판이 나타난다. 새로 농토로 개발한 듯한데, 농사를 지은 흔적은 없다. 왼편으로 불꽃무늬의 화염산이 도로와 나란히 길게 이어져 있다.
화염산이 잠시 허리가 잘리는 곳(바로 이곳 오른쪽 절벽에 천불동이 있다)에 개울이 흐르고, 오른쪽으로 도로가 굽어지더니, 다시 위구르인들이 사는 민가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서는 고창고성. 거기엔 폐허만 남았다.
▲ 나귀를 타고 고창고성 들어가는 길
고성 입구엔 양피옷 가게가 즐비하다. 우리를 먼저 맞이하는 이는 구리 방울과 종을 팔려는 꼬마들. 눈빛이 해맑은 아이들은 연방 우리말 ‘십원!’을 외쳐댄다. 양피옷이 너무 싸다. 아이들에게 입힐 옷 한벌값이 30원 정도, 우리 돈으로 4200원 수준.
나귀가 끄는 수레 2대에 타고 고성 안으로 들어서다. 우리 수레엔 졸졸 따라다니던 귀여운 두 꼬마 자매가 같이 탄다. 장사하는 법을 안다.
고성으로 들어서니 폐허의 불탑 마당에서 파란 옷을 입은 위구르 여인들이 남자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아름다운 춤을 춘다.
▲ 춤추는 위구르 소녀들과 함께
오선생은 얼른 파고 들어 사진을 찍는데, 아뿔사, 5원(우리돈 700원쯤)을 내란다. 그래도, 이 풍경이 얼마나 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가! 너도 나도 서서 사진을 찍다.
이곳은 후한이 멸망한 후 번성했던 투르판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불타오르는 듯 화염산을 배경으로 폐허만 남아있다. 이곳에 쓴 벽돌은 견고하게 하기 위해 버들가지나 마른풀을 섞었는데, 멸망한 후 주위 농부들이 벽돌을 깨 비료로 쓰는 바람에 이렇게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후한 멸망 후 4세기초, 이 지역은 고창고성을 중심으로 흉노족, 티벳트족, 돌궐족(터어키족) 세력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고창국왕과 국민 대부분은 한족이었지만 정세에 따라 현명하게 대처하여 목숨을 보존했다. 제도와 풍습도 한족과 돌궐족이 섞여 버릴 정도였다. 이렇게 힘을 키워 나간 고창국은 실크로드의 패권을 잡으려다 한나라와 충돌 멸망하고 만다. 고창국의 멸망을 본 서돌궐은 긴장하여 한나라와 일전을 벌이나 650년 지금의 타슈켄트 지방에서 멸망하고 만다. 이때의 한나라 장군이 바로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었다. 이후 한나라는 이 지역을 직접 경영하기 시작한다. 고창국은 우리의 삼국시대에 번성하는데, 백제가 멸망할 때 같이 망하게 되는 것이다.
현장법사가 인도로 갈 때 이곳의 왕은 국문태로, 이 왕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서 설법을 했다 한다. 현장이 인도로 간 사이 국문태는 당나라 땅인 이오를 돌궐과 연합하여 치자, 당 태종이 소정방 등을 보내 고창국을 멸망시키고(657년) 왕을 장안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현장이 돌아오는 길에 들렀을 때는 고창국은 이미 망하고 없었단다.
☞ 현장(顯獎 603-664)
그가 쓴 《大唐西域記》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큰 가치가 있으며, 16세기에 출판된 《西游記》의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다.
현장은 629년 장안을 출발하여 먼저 돈황에 도착하여 혼자서 800리 이상 되는 사막을 통과하여 투루판에 도착하였다. 투루판의 고창(高昌)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고창에 남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여행할 것을 굽히지 않자 고창왕은 그에게 동행인과 양식을 주고 서역의 왕국에 소개 편지를 써주었다.
그는 투루판을 떠나 엔치(焉耆), 쿠처, 바이청(拜城)에 도달하여 북쪽으로 가서 천산을 넘어 이식쿨호(키르키즈스탄)지역을 지나 초하(楚河)를 따라 탈라스를 지나 타슈겐트를 경유해서 사마르칸트에 도착하였다. 다시 서행하여 카라코람사막을 통과하여 후어라사 지역에서 남서쪽으로 전환하여 대하(大夏)의 도읍인 헤라트를 지나 阿姆河의 상류인 昆都士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고창왕의 서신을 보여주었을 때 고창국과 친척관계인 대하(大夏)의 왕은 매우 기뻐하고 환대였다. 그는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의 북부고원을 넘어 마침내 인도에 도착하였다. 인도에서 몇 년을 머무른 후 다시 육로를 통해 645년 시안으로 돌아왔다.
뒷편 불탑은 복원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 건물들은 폐허의 흔적만 남았을 뿐이다.
돌아나오는 길, 귀여운 소녀들의 구리 방울을 사고, 오정훈 선생은 조카 준다고 양피옷을산다.
아스타나 고분
투루판 동쪽 약 40km 지점, 고창고성 북쪽 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넓이는 약 10㎢나 된다. 진, 당 시기 고창국 귀족의 묘이다. 아스타나는 위구르 어로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다. 3-8세기에 겊쳐 조성된 약 500기의 묘는 건조도가 높아 보존 상태가 좋다. 발굴 작업 중에 대량의 투루판 문서와 면, 견직물 기마용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물은 위구르 자치구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풀 하나 없는 평지, 무덤은 땅 속으로 비스듬히 뚫어 조성되었다. 부부 합장묘, 가족 묘지가 많다고 하는데,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홍콩인이 발굴했다는 안내문이 있는, 부부와 아이의 미라가 있는 3200여 년 전의 무덤, 장건의 가족묘라고 알려진 4인 현실과 벽화가 있는 무덤 등 4군데였다.
화염산(火焰山)
고창고성, 아스타나고분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화염산을들르다. 도로변에 관람할 수 있도록 공터를 넓게 조성해 놓았다.
위구르인은 이 산을 '구즈로다고'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붉은산’이라고 한다. 천산의 억센 힘줄이 불끈 솟아 이루어진 이 산은 불길이 치솟는 듯이 보여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불을 껐다는 그 화염산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붐빈다. 길병호 씨는 화염산의 길이가 120km에 이르며, 너비는 8km, 높이는 약 500m라고 설명한다(그런데 내가 다른 자료에서 확인한 바로는 높이가 851m인데 어느 것이 맞는지…?).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불길을 껐다는 바로 그 산이다. 산 아래 신천(神泉)이라는 샘이 있다는 데 보지는 못하다. 낙타를 타고 사진 찍는 사람들.
우리도 폼 잡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최성수 선생의 농담 한마디에 폭소가 터졌다.
"오 선생, 노 선생은 고향에 온 것 같지 않아?"
"왜?"
"저팔개, 사오정이잖아!"
좀 넓은 몸집을 가진 오, 농담도 엉뚱하게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노, 두 사람을 빗댄 농담이다.
이 화염산의 동쪽 강줄기에 의해 절개된 절벽에 고창국의 석굴사원인 ‘베제크릭栢孜克里克’(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뜻) 천불동이 있고, 건너편 산 남쪽 사면에 또 하나의 천불동이 있다. 위구르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서양 탐험대가 벽화를 도려내가기도 한 이곳은 공사 중이라 가 볼 수 없었다.
포도구(葡萄泃)
시내에 가까워진 지점에서 남쪽으로 우회전, 화염산이 서쪽으로 달리다 잠시 끊긴 지점에 넓은 골짜기와 들판이 형성되고 대단위 포도 농장이 만들어졌다. 골짜기의 길이는 8km. ‘葡萄泃遊樂園 THE GEAPE VALLEY'라고 적힌 간판이 안내하고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규모다. 국가 소유 농장으로 천산산맥의 물이 힘차게 중앙 수로를 흘러내리고 있다.
▲ 포도나무 덩굴들로 덮인 터널 속이라 사진이 어둡게 나왔다.
들어가는 길 양편엔 양피옷, 옥 장신구, 위구르 칼, 건포도 등 갖가지 선물 가게들이 진을 치고 앉았다. 화염산 오르는 기슭엔 포도처녀상이 서 있고. 민속관 앞에선 아름다운 위구르 아가씨가 붉은 치마를 입고 춤을 추고 있다. 포도는 페르시아 원산이라는데, 이곳을 거쳐 장건에 의해 장안으로 전래되었다고 한다.
한 가게에서 많은 이들이 건포도를 대량으로 구입하다. 캘리포니아 건포도에 식상해서 시큰둥했었는데, 먹어 보니 맛이 정말 달고 신선하다. 다들 파느라 정신없는 주인 틈타 냉큼 냉큼 잘도 집어먹었다. 이곳은 건조지대라 병충해가 없어 농약이 필요 없다 한다. 그래선지 맛이 너무나 맑고 개운하다. 이 포도로 담은 포도주는 세계 최고급, 특히 누란포도주가 유명하다.
교하고성(交河古城)
호텔로 돌아오는 길, 사다리 타기로 방을 정하다. 내 룸메이트는 김용식 선생. 짐을 방으로 들인 뒤 점심 식사를 하다. 식사 마칠 무렵 비가 젖을 만큼 잠시 내리다. 일 년 내리는 비의 1/3(5mm)은 온 듯하다.
교하고성은 시내에서 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동서로, 두 갈래 하천이 흘러 만나면서 그 사이에 형성된 떡버들잎 지형 위에 건설된 성이다. 물의 흐름이 만든, 양쪽 30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자연 절벽으로 요새화해 있다. 개천을 따라 백양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곁에는 포도밭이 푸르게 펼쳐져 있다.
▲ 교하고성 입구에서
기원 전 1세기 경에는 고창고성과 함께 투르판 지역의 중심지였다.
처음에는 이란계 사람이 살았다. 전한시대에는 차사국으로 불렸는데, 한서에 의하면 700가구에 인구 6050명, 병사 865명의 조그마한 왕국이었다. 차사국은 교통의 요지에서 한나라와 흉노족에 시달리다 급기야는 왕이 한나라로 망명하기도 하는데 한무제가 흉노족을 완전히 몰아내자 이곳에도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그 후 중심지가 고창고성으로 옮겨질 때까지 이곳은 투루판 지역의 중심지였다.
▲ 자연 절벽을 이룬 교하고성 아래는 물이 흐르는 녹지를 이루고...
건축물을 벽돌로 쌓지 않고 위에서 파내려 가며 지은 탓에 지층의 표시가 보이는 것이다. 고창고성은 벽돌로 쌓아 만들었기에 세월이 가며 페허처럼 부서져 버렸지만, 이 성은 바로 이런 건축방식 덕에 이토록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었다.
물이 만나는 쪽이 입구 남문인데, 이 길로 고창고성으로 실크로드가 이어졌다한다. 과거에는 이 성이 오아시스 지대로 성안 곳곳에 우물터가 있다. 우물은 50m 이상의 깊이로 파서 만들었다 한다. 길을 중심으로 왼쪽은 주민, 병사 주거지역(민가는 땅을 파서 만들고 위층은 병사용 주거), 오른쪽은 수공업과 관청, 사찰지구로 구분된다.
▲ 교하고성의 주거지
뒤편에는 최대사원인 ‘대불사(大佛寺)’가 있는데, 그 넓이는 5100㎡. 원래 16m 높이였던 불탑이 윗부분이 훼손된 채로 있는데, 감실에 부조된 불상은 두부가 파괴된 채 흔적을 남기고 있다.
마당엔 왼쪽으로 고루(鼓樓)와 오른쪽으로 종루(鐘樓) 터가 있고, 대전 앞엔 깊이 120m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터에는 당나라 현장법사가 숙박했다는 기록도 있다.
▲ 교하고성의 우물
전성기 인구가 30만이었다는데, 고창국에 소속되기도 했다 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문 앞에 문물진열관(1997년 세움)이 있다
칸얼징(坎兒井), 또는 카레즈
교하고성과 포도구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칸얼징(혹은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물을 끌어들인 지하 수로를 가리킨다.
포도밭 한 가운데 있는데, 너비 1m, 앉은 키 높이로 무려 5000km로 뚫어 연결하고 있다. 쪼그려 앉아 세월과 맞서 작업하는 인부의 상의 보며, 이런 무모한 시도가 중국적인 것인가 혀를 내두르게 된다.
▲ 카레즈를 파는 모습을 재현한 그림
수로의 물은 너무도 맑고 힘차게, 그리고 시원스럽게 흘러내려 투르판의 모든 생명들을 적셔 준다. 관람객들로 온통 북적대고, 수로 입구에서 물을 담는 사람들로 붐빈다. 포도 양방(凉房)의 내부를 보게 되었는데, 나무 기둥에 걸쇠를 만들어 포도를 송이째 주렁주렁 걸어 말리고 있다.
▲ 양방(凉房)의 내부 청포도 건조대 모습
소공탑(蘇公塔)
칸얼즈를 관람한 후 '화교주보성(華僑珠寶城)'이란 곳에서 쇼핑을 하다. 조선족 점원들이 많은, 옥공예 전시 가게였는데, 양은 많았지만 조야하고 비싼 느낌이다. 오히려 ‘종용’이란 술이 더 맛있어, 몇몇이 누란포도주와 함께 구입하다.
바로 근처에 있는 소공탑으로 이동했는데, 213년 전 건축된 이슬람사원이다. 술레이만(소공) 2세가 투르판 지역 통일에 공을 세운 아버지 어하민을 기념해 세웠는데, 일명 ‘투르판탑’, 혹은 ‘어하민탑’이라고도 불린다. 밑 직경이 약 10m, 높이는 약 47m 원뿔기둥형이다.
위구르인들의 춤과 노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호텔 옆마당 포도원 무대에서 위구르인들의 민속공연을 보다.
할아버지와 청장년이 함께 연주하는 민속 음악이 아주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아름다운 위구르 아가씨와 씩씩한 사나이가 사랑을 고백하는 역동적인 춤과 맑고 고운 노래는 독특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중국문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그래서 우린 중국이 아니야, 라고 외치는 듯 느껴지게 하는 그런….
특히 사나이들의 눈썹을 찡긋거리는 표정 연기는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
저녁 늦은 시간, 야시장을 구경하러 나갈까 하다, 상학 씨와 김홍식 씨만 나가고, 호텔 앞마당 뜰에서 양꼬치구이와 함께 맥주를 마시다.
강은미 선생은 호텔 냉방이 너무 찬 탓인지 감기가 걸리고. 양꼬치구이 향신료 문제와 내일 파오 숙박 시 양을 잡아먹을 것인가 여부를 둘러싸고 이야기하면서,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사람들이 예민한 반응을 많이 드러내다. 일주일이나 강행군한 여행의 피로가 많이 쌓인 탓 같다.
♣투루판 관광 안내도♣
▲ 여러 정보를 바탕으로 필자가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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