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삼척 무릉계곡, 그리고 운무 속 삼화사 풍경

모산재 2006. 8. 29. 23:19

 

 

2박3일의 여행을 끝나고 돌아가야 하는 날.

 

엊저녁을 삼척항 부근 민박집에서 보내고, 아침은 몇 년 전 두 번 들른 적이 있는 식당에서 곰치해장국으로 전날 밤의 주독을 푼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아쉬운 발길은 결국 무릉계곡으로 향한다. 몇은 비옷을 입고 또 몇은 우산을 들고 공원 계곡을 들어서니, 오히려 호젓한 기분에 내 낀 산 풍경이 새롭다.

 

20년 전 1986년에 처음으로 찾은 적이 있는 이곳,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계곡의 그 어떤 곳도 다 낯설기만 한데, 맑게 흐르는 골짜기의 물은 찌든 정신을 세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 무릉계곡 안내도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무릉계곡은 호암소로부터 시작하여 약 4km 상류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를 말한다. 너럭바위와 바위 사이를 흘러서 모인 넓은 연못이 볼 만한 무릉계곡은 수백명이 앉을 만한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계곡미가 두드러지며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숨막히게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무릉도원이라 불리우는 이 곳은 고려 시대에 동안거사 이승휴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 서인과의 대립으로 삼척부사로 밀려 나 있던 동인의 영수 김효원(1542-1590)이 '무릉계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전에는 '두타계곡', '삼화계곡'이라고도 불리었는데, 기암괴석이 즐비하게 절경을 이루고 있어 마치 선경에 이른 듯한 느낌을 준다.

 

 

 

관리소를 지나 다리를 건넌다. 이슬비 속에 깊은 골짜기는 운무로 덮여 신비감을 더해 준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무릉도원임을 알리는 양사언의 글귀가 큰 글씨로 석각되어 있다.

 

무릉계곡의 의미를 절묘하게 정의하여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12자로 표현했다. 풀이하자면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 너럭바위와 샘솟는 물, 두타행으로 번뇌를 씻는 골짜기' 정도일까? 산 이름도 두타산과 청옥산이니 이 골짜기에 며칠 머물면 세속에 찌든 정신 저 물처럼 맑게 되찾을 수 있으리라.

 

 

 

 

 

※ '두타(頭陀)'란 무엇인가

산스크리트 '두타(dhuta)'의 음역으로 '버린다, 떨어버린다, 씻는다, 닦는다' 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두타행(頭陀行)에는 모두 12조항이 있어서 이를 '12두타행'이라고 부르는데 석가모니 당시부터 행하여졌다. 12두타행은 다음과 같다.

① 인가와 떨어진 조용한 숲 속에 머문다.(在阿蘭若處)
② 항상 걸식을 한다.(常行乞食)
③ 걸식할 때는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次第乞食)
④ 하루에 한번만 먹는다.(受一食法)
⑤ 과식하지 않는다.(節量食)
⑥ 점심 이후에는 과실즙이나 꿀 등도 먹지 않는다.(中後不得飮漿)
⑦ 헌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着弊衲衣)
⑧ 내의, 상의, 중의 삼의(三衣)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但三衣)
⑨ 무상관에 도움이 되도록 무덤 곁에 머문다.(塚間住)
⑩ 나무 밑에 거주한다.(樹下止)
⑪ 지붕이 없는 곳에 앉는다.(露止坐)
⑫ 단정하게 앉고 눕지 않는다.(但坐不臥)

두타행을 할 때 비구는 18가지 지물을 반드시 지녀야 하는데, 이를 '두타 18지물'이라고 한다. 또 삼의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두타대(頭陀垈)'라는 자루를 목에 걸고 다닌다. 불교 초기에는 12두타행이나 두타 18지물이 지켜졌으나 나중에는 산이나 들, 세상을 편력하며 고행하고 수행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부처의 십대제자 중 가섭이 '두타제일'로 칭송받았다.

 

 

더 많은 잉여를 위해 목숨 걸고 살아가는 자본주의 세상 중생에게 '두타'가 다 무어란 말인가? 그저 이 길을 지나가며 잠깐 근원에 대해 환기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오르니 오른쪽 계곡으로 무릉 반석 풍경들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삼화사 바로 아래 계곡에 넓게 펼쳐진 1500여 평의 너럭바위 지대로 시인 묵객들이 새긴 글발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조선 전기 4대 명필가의 한 분인 봉래 양사언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의 시도 새겨져 있다. 이곳에 앉아 풍류를 즐기던 한량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한쪽 등산로와의 사이에 '금란정'이라는 정자를 두어 운치를 살리고 있다.

 

 

 

금란정 쪽에서 삼화사를 향해 바라본 무릉반석 풍경

 

 

 

 

삼화사 앞 다리에서 내려다 본 무릉반석 풍경

 

 

 

 

삼화사 앞 다리 위쪽 계곡 풍경

 

 

 

 

 

 

운무 속 고즈넉한 삼화사 풍경

 

 

20년 전에는 조그마한 절이었는데, 지금 만나는 삼화사는 터가 넓어지고 전각 규모가 많이 커졌다. 그 때의 기억이 어렴풋하긴 하지만 위치도, 분위기도 많이 낯설게 느껴진다.

 

 

 

 

삼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로 신라시대인 642년(선덕여왕 11) 자장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라 하였고, 864년 범일국사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이라 하였다가,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고 개칭하였으며, 많은 부속 암자를 지었다.

 

고려말인 1369년 절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중건하였으며, 1905년에 삼척지방 의병들의 거점으로 이용 되었으며, 1906년에 일본은 의병의 거점 파괴라는 이유를 붙여 대웅전, 선당 등 200여 칸에 이르는 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듬해 중건하였다.

 

이 사찰은 본래 동쪽 약 1.3km의 반릉 부근에 있었던 것을 1977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의 채광지로 들어가자 중대사(中臺寺) 옛터인 무릉계곡의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약사전을 비롯하여, 문화재로 신라시대의 철불, 3층 석탑 및 대사들의 비와 부도가 있다.

 

 

 

 

 

 

 

 

용추폭포를 향해 오르는 계곡 옆 숲길은 풀꽃들은 보이지 않고 비에 흠뻑 젖은 땅에서 버섯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광대버섯

 

 

 

 

 

관음폭포와 학소대

 

 

 

 

 

 

옥류동 계곡

 

 

 

 

 

 

장군바위와 병풍바위

 

 

 

 

 

선녀탕. 장군바위를 지나 쌍폭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쌍폭. 왼쪽은 두타산에서, 오른쪽은 청옥산에서 흘러내려 폭포로 만났다.

 

 

 

 

 

쌍폭을 지나자 바로 용추폭포가 나타난다.

 

용추폭포는 상 중 하 3연으로 되어 있는데, 폭포수 주변의 기암 절벽이 수려하고, 사람을 빨아들일 듯한 물줄기가 신비롭다. 상중담은 항아리 모양으로 되어 있고, 하담은 둘레가 30m인데 깊이는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중연에서 절벽으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는 흰 명주천에 구슬을 단 것처럼 아름다운데 폭은 2m, 높이는 10m 정도이다.

 

 

 

 

 

용추폭포를 끝으로 발길을 돌려 계곡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에는 계곡 건너편 샛길을 선택한다.

 

계곡 중간에는 흔적만 겨우 남아 있는 거제사터가 자리잡고 있다.

 

 

 

 

노란달걀버섯

 

 

 

 

 

 

다시 운무 속 삼화사 풍경

 

비가 개고 난 뒤 안개구름이 피어오르는 산사의 풍경이 더욱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두류산(지리산)을 두고 노래한 것이긴 하지만, 무릉계곡을 뒤에 두고 돌아오는 내 마음 속엔 남명 선생의 시조가 절로 떠오른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오, 나난 옌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