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양주 천보산 회암사지, 지공· 나옹· 무학이 머물렀던 대가람

모산재 2006. 5. 7. 02:28

 

회암사지는 경기도 양주와 포천을 가로지르는 천보산 서남쪽 자락에 안겨 있는 절터이다. 회암사는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으로지공화상, 나옹선사, 무학대사로 이어지는 걸출한 선승들이 머물며 이름을 날리며 번성했던 대가람이었다.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指空)이 창건하고, 1376년(우왕 2) 지공의 제자인 나옹(懶翁)이 삼산양수지기(三山兩水之記)의 비기(秘記)에서 이곳은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와 지형이 같으므로 가람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흥한다고 하여 이 절을 중창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하는 등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 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다시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왕후가 죽은 뒤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진 후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 당간지주(향토유적 제13호)

 

절터 앞면의 왼쪽 모퉁이에 한 쌍의 거대한 당간지주가 회암사가 대가람이었음을 말해준다.

 

 

 

 

 

줄딸기

 

 

 

 

 

발굴 공사 중인 회암사터

 

 

 

 

 

 

 

■ 회암사지 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회암사터의 가장 북쪽에 서 있는 이 부도는 그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우 스님이나, 회엄사 중창에 힘쓴 처안의 부도탑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상·중·하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구름에 휩싸인 말을 생동감 있게 조각하였고, 윗받침돌은 8부신장(八部神將)과 덩굴무늬로 장식한 후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윗받침돌과 둥근 탑신의 몸돌사이에는 별도의 돌로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처마는 느린 U자형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여러 머리장식들이 포개져 있다.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작품으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화려함이 느껴져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매화말발도리

 

 

 

 

 

 

고깔제비꽃

 

 

 

 

서울제비꽃

 

 

 

 

 

옛 회암사는 폐허로 남았지만, 절터 너머 쪽에는 새로 지은 회암사가 있다.

 

 

 

 

 

졸방제비꽃

 

 

 

 

각시붓꽃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影聖閣) 등의 전각이 있다.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 지공선사 부도와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회암사를 창건한 인도인 승려 지공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많이 사용된 양식으로, 모든 부재가 8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바닥돌 위에 올려진 기단(基壇)은 3단으로 올렸는데 그 중 가운데받침돌만 배가 볼록하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탑신(塔身)은 둥근 공모양이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이 두툼하며 처마의 각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머리장식들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석등은 모든 부재가 4각으로, 3단을 이루는 받침돌 위에 등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과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화사석은 앞뒷면 2곳에만 창을 내었고, 지붕돌은 부도에서와 같이 윗면의 네 모서리선이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두 작품 모두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세운 것이다.

 

 

 

 

 

 

담배풀

 

 

 

 

 

 

■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지공선사 부도 아래쪽에 있는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후기의 승려로 본명은 혜근이다. 오대산 상두암에 머물렀고, 공민왕에게 설법을 하였다. 회암사의 주지가 된 후 절을 중창하였고, 우왕 2년(1376)에 입적하였다.

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부도는 8각을 기본형으로,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3단을 이루는 기단의 가운데받침돌은 배가 불룩한 북모양을 하고 있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조각없이 간결하다.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갔다. 지붕돌 위로는 하나의 돌로 조각한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석등은 4각을 기본형으로, 3단의 받침 위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올린 후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화사석은 앞 ·뒷면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처마는 느린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위로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있다.

 

 

 

 

 

 

■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보물 제388호)과 쌍사자 석등(보물 제389호)

 

절터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이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사리탑 둘레에는 탑을 보호하기 위한 난간이 둘러져 있다

 

 

 

 

회암사의 주지이기도 했던 무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약한 승려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의 관계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성계의 꿈을 풀이하여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이야기와 한양천도와 관련된 설화 등은 특히 유명하다.

지붕돌은 8각으로 처마부분에는 목조건축을 흉내낸 모양들이 새겨져 있다. 경사는 급하며 추녀끝은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돌 하나만 올려놓아 간소화된 형태를 보인다.

 

 

 

 

탑신은 몸돌이 둥근 모양으로 표면에 용과 구름이 가득 새겨져 시선을 모은다. 용의 머리와 몸,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있게 보이고 구름무늬가 한층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기단의 아래·윗돌은 연꽃모양의 돌이고 가운데돌은 배가 불룩한 8각의 북모양으로 각 면에는 모양이 서로 다른 꽃조각이 도드라져 있다.

 

 

 

 

 

쌍사자 석등은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하나로 붙여서 만들었으며, 그 위의 중간받침돌은 쌍사자를 두어 신라 이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쌍사자는 가슴과 배가 서로 붙어 입체감이 없고 엉덩이가 밑에 닿아 부자연스럽다.

 

윗받침돌에는 8개의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혀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2개의 석재를 좌 우에 놓아 그 간격으로 생긴 2개의 공간이 창의 구실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두꺼우며 처마밑이 반원모양으로 들려 있고, 경사면은 네 귀퉁이가 두툼하게 도드라져 뚜렷이 표현되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둥근 돌 위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있다.

기본형이 4각인 형태로 삼국시대이래 고유의 8각 석등형태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주목되며, 청룡사터의 보각국사 정혜원륭탑전사자석등(보물 제656호)과 양식이 비슷한데, 만들어진 시기도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청미래덩굴

 

 

 

 

 

병꽃나무

 

 

 

 

태백제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