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동에서 오르는 대모산 자락엔 자연학습원이 있다. 종이 그렇게 다양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철 따라 볼 만한
야생화가 핀다. 오늘은 까치무릇(산자고라고도 한다)과 현호색이 피었을까 싶어 자연학습원을 찾는다. 자연학습원 산책로 주변에 지천으로 자생했던 이 풀꽃들도 사람들의 간섭으로 점차로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그러나, 아직 때가 일러서인지 까치무릇은 흔적도 보이지 않고, 현호색도 이제 어린잎만 쏘옥 내밀고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응달이라 꽃이 늦는 듯하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자연 학습원을 돌아보기로 한다. 꽃 핀 녀석이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바위취 밭에 노루귀 몇 포기가 앙증맞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워낙 작은 꽃이라 봐주는 사람조차 없는데, 푸른 잎들 무성한 바위취 속에서 꽃을 피웠으니, 눈길을 준 사람들도 바위취 꽃이겠거니 생각하기 십상이겠다.
작년 4월 초순에 피었던 복수초가 생각나 그 자리를 찾았더니 두 포기만 쏘옥 자라 올라 봉오리만 달렸고, 아직 꽃은 벙글지 않았다.
복수초를 끝으로 더 이상의 꽃은 보이지 않아, 야생화의 보물창고인 일원동의 양지바른 언덕으로 발길을 옮긴다. 90년대 초만 하여도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일원동. 겨울날 비료포대를 깔고 산등성이로부터 마을길까지 내리 썰매를 타던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 양지바른 무덤의 언덕 앞에는 대모산을 가리고 선 고층 아파트들로 가득 들어찼다. 무덤의 봉분들이 따스한 볕바라기를 하며 옹기종기 앉은 이 언덕은 양지를 좋아하는 들꽃들의 천국이다. 하도 따뜻한 곳이어선지 양지꽃은 이미 노란 꽃잎을 땅 위에 떨어뜨리고 있는데, 그 많던 제비꽃은 웬일인지 흔적이 없다. 제비꽃조차 없다면 다른 꽃들 보기엔 글렀구나고 포기하려는데, 아 무덤 위에 무더기를 이룬 꽃이 보인다. 아, 할미꽃! 주변을 둘러보니 군데군데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다. 바람에 하얀 솜털 맡긴 채 부끄럽게 붉은 입술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뒷동산에 할미꽃 / 꼬부라진 할미꽃 젊어서도 할미꽃 / 늙어서도 할미꽃 하하하하 우습다 / 졸고 있는 할미꽃 아지랑이 속에서 / 무슨 꿈을 꾸실까 붉은 빛과 검은 빛이 조화를 이룬 이처럼 완벽한 빛깔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가! 저렇게 무엇인지 부끄러워 볼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할미를 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저 눈부시게 보송보송한 저 하얀 솜털은 또 어쩌고….
할미꽃을 다룬 이야기로 가장 오래된 것에 설총의 <화왕계(花王戒)>가 있다. <화왕계>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신문왕에게 설총이 들려준 이야기인데, 신문왕에게 간신과 미색을 멀리하고 충직한 신하를 가까이하라는 설총의 정책 권고라고나 할까? 옛날 꽃나라를 다스리는 화왕(花王, 모란꽃)에게 여러 꽃들이 인사를 하러 온다. 화왕은 이들 가운데 장미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뒤이어 온 백두옹(할미꽃)의 충직함을 보고 고민에 빠진다. 결국 화왕은 할미꽃에 감동하고 할미꽃을 택한다.
한쪽은 며느리를 겨냥하고 한쪽은 딸들을 겨냥하지만, 가난과 가부장제도라는 가족제도 때문에 겪는 여성의 삶의 고통을 잘 드러내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이야기이다.
어쨌건 할미꽃을 원없이 바라본 포만감에 언덕을 내려가는데, 솜나물 씨방을 달고 있는 마른 줄기가 보여 무심코 들여다본다. 아, 이런 횡재가 없다. 풀섶에 숨어 줄기 아랫도리에서 앙증맞은 꽃이 갓 피어나고 있다.
솜나물은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인데, 볕이 아주 잘 드는 곳에 잘 자란다. 꽃은 어린 봉우리 때는 분홍빛이 진했다가 점차 옅어지는데, 주로 흰색이지만 연한 분홍빛이 돌기도 한다.
대모산(大母山)은 정상의 높이가 292m 정도이니 높은 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품처럼 오지랍이 넓은 산이다. 육산이라 지하수맥이 풍부하여 골짜기마다 시원한 샘터가 자리잡고 있다. 성지 약수터는 거의 정상 가까운 곳인데도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이다. 이런 산이니 야생 생명들이 살기에 얼마나 좋은 곳일까! 십여 년 전만 하여도 산 속은 한산했는데, 지금은 평일에도 거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원래 있던 등산로를 벗어나 자꾸만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는 점이다. 밟혀서 사라지는 생명도 생명이지만, 사람이 다니는 길은 바람길이 되고 숲의 습기를 빼앗아 버린다. 야생 풀나무들에겐 생존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등산로 바로 옆 풀섶에도 지천이었던 은방울꽃, 족도리풀, 둥글레 등은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전에 보였던 하늘나리, 참나리 군락지도 자꾸 사라져 마음 아프게 한다. |
----------------------------------------------------------------------------------------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 06. 03. 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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