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일기

이렇게 가슴 설레게 하는 할미가 있던가요

모산재 2006. 3. 23. 19:54
일원동에서 오르는 대모산 자락엔 자연학습원이 있다. 종이 그렇게 다양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철 따라 볼 만한 야생화가 핀다. 오늘은 까치무릇(산자고라고도 한다)과 현호색이 피었을까 싶어 자연학습원을 찾는다.

자연학습원 산책로 주변에 지천으로 자생했던 이 풀꽃들도 사람들의 간섭으로 점차로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다.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그러나, 아직 때가 일러서인지 까치무릇은 흔적도 보이지 않고, 현호색도 이제 어린잎만 쏘옥 내밀고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응달이라 꽃이 늦는 듯하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자연 학습원을 돌아보기로 한다.

꽃 핀 녀석이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바위취 밭에 노루귀 몇 포기가 앙증맞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워낙 작은 꽃이라 봐주는 사람조차 없는데, 푸른 잎들 무성한 바위취 속에서 꽃을 피웠으니, 눈길을 준 사람들도 바위취 꽃이겠거니 생각하기 십상이겠다.

▲ 앙증맞게 핀 노루귀. 아래의 푸른 잎은 바위취이다.
ⓒ 김희년
돌단풍도 바위에 기대에 아직도 붉은 빛의 잎과 꽃을 가만히 내밀고 있다. 알에서 갓 부화한 어린 새의 부리처럼 귀엽다. 계곡 바위 틈에 뿌리를 서리고 다 자란 잎의 모습이 단풍과 쏙 빼닮아 돌단풍이란 이름을 얻었다. 단풍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잎의 모양뿐 아니라 가을에 물드는 단풍마저도 곱다. 돌나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 돌단풍. 다 자란 잎은 단풍을 쏙 빼닮았다. 꽃대가 보이지요?
ⓒ 김희년
꽃망울이 한창 부풀어 오르고 있는 산괴불주머니는, 아직은 피기 일러 보였다. 그런데 한 녀석만 노란 꽃잎을 내밀고 있다. 현호색과로 두해살이를 하는데, 줄기 윗부분에 촘촘히 모여 피는 노란 꽃이 앞부분은 입술 모양을 하고, 뒷부분은 기다란 꿀주머니를 달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 산괴불주머니. 꽃이 아이들 노리개, 괴불주머니를 닮았을까?
ⓒ 김희년
'괴불주머니'의 뜻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괴불주머니는 원래 오색의 비단 헝겊을 이용하여 여러 모양의 수를 놓아 만든 부녀자나 아이들의 노리개인데, 색 헝겊을 세모나게 접어 속에 솜을 통통하게 넣고, 양 꼭지에 술을 달아 주머니 끈 끝에 차고 다녔다는 것이다. 옛사람들의 눈에는 이 꽃이 아이들의 노리개처럼 보였나 보다.

작년 4월 초순에 피었던 복수초가 생각나 그 자리를 찾았더니 두 포기만 쏘옥 자라 올라 봉오리만 달렸고, 아직 꽃은 벙글지 않았다.

▲ 복수초. 아직 꽃잎이 열리지 않았다. '얼음새꽃'이란 이름으로 부르면 또 어떨까?
ⓒ 김희년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서 복수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일본에서는 건강과 복을 기원하는 원단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 히말라야 고산지대에도 복수초가 자생하는지, 등짐을 져 나르는 고산족들에게 예로부터 사고나 불행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꽃이 무슨 일인지 '슬픈 추억'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아직 채 녹지 않은 이른 봄, 눈 사이로 피어나는 꽃이래서 '얼음새꽃'이라는 정겨운 토종 이름도 갖고 있지만 아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복수초를 끝으로 더 이상의 꽃은 보이지 않아, 야생화의 보물창고인 일원동의 양지바른 언덕으로 발길을 옮긴다. 90년대 초만 하여도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일원동. 겨울날 비료포대를 깔고 산등성이로부터 마을길까지 내리 썰매를 타던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 양지바른 무덤의 언덕 앞에는 대모산을 가리고 선 고층 아파트들로 가득 들어찼다.

무덤의 봉분들이 따스한 볕바라기를 하며 옹기종기 앉은 이 언덕은 양지를 좋아하는 들꽃들의 천국이다. 하도 따뜻한 곳이어선지 양지꽃은 이미 노란 꽃잎을 땅 위에 떨어뜨리고 있는데, 그 많던 제비꽃은 웬일인지 흔적이 없다. 제비꽃조차 없다면 다른 꽃들 보기엔 글렀구나고 포기하려는데, 아 무덤 위에 무더기를 이룬 꽃이 보인다. 아, 할미꽃! 주변을 둘러보니 군데군데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다. 바람에 하얀 솜털 맡긴 채 부끄럽게 붉은 입술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 할미꽃. 누가 '할미'라는 이름을 붙였을꼬?
ⓒ 김희년
누가 '할미'라는 이름을 붙였을꼬? 이렇게 가슴 설레게 아름다운 꽃에다…. 게다가 다음과 같은 노래는…?

뒷동산에 할미꽃 / 꼬부라진 할미꽃
젊어서도 할미꽃 / 늙어서도 할미꽃
하하하하 우습다 / 졸고 있는 할미꽃
아지랑이 속에서 / 무슨 꿈을 꾸실까


붉은 빛과 검은 빛이 조화를 이룬 이처럼 완벽한 빛깔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가! 저렇게 무엇인지 부끄러워 볼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할미를 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저 눈부시게 보송보송한 저 하얀 솜털은 또 어쩌고….

▲ 할미꽃. 이렇게 가슴 설레게 하는 할미도 있던가!
ⓒ 김희년
고개 숙인 모습이 허리 꼬부라진 할미를 닮았고, 꽃 지고난 뒤 암술의 날개가 하얗게 부풀어 오르면 할미의 백발을 닮았다. 그래서 할미꽃을 옛 사람들은 백두옹(白頭翁)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할미꽃을 다룬 이야기로 가장 오래된 것에 설총의 <화왕계(花王戒)>가 있다. <화왕계>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신문왕에게 설총이 들려준 이야기인데, 신문왕에게 간신과 미색을 멀리하고 충직한 신하를 가까이하라는 설총의 정책 권고라고나 할까?

옛날 꽃나라를 다스리는 화왕(花王, 모란꽃)에게 여러 꽃들이 인사를 하러 온다. 화왕은 이들 가운데 장미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뒤이어 온 백두옹(할미꽃)의 충직함을 보고 고민에 빠진다. 결국 화왕은 할미꽃에 감동하고 할미꽃을 택한다.

▲ 할미꽃. 설총에겐 충직함을 상징하기도 했던 꽃이다.
ⓒ 김희년
할미꽃에 얽힌 이야기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시어머니를 구박하던 며느리에게 아들이 과거를 보러 간 사이 함박눈 쏟아지는 날 그릇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쫓겨난 시어머니가 얼어 죽은 언덕에서 피어난 꽃이 할미꽃이라는 전래동화도 있고, 홀로 된 어머니가 딸 셋을 키워 모두 시집을 보낸 후 딸집을 찾았다가 세 딸 모두에게 냉대 받고 산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보다 죽은 자리에서 피어난 꽃이 할미꽃이라는 설화도 있다.

한쪽은 며느리를 겨냥하고 한쪽은 딸들을 겨냥하지만, 가난과 가부장제도라는 가족제도 때문에 겪는 여성의 삶의 고통을 잘 드러내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이야기이다.

▲ 할미꽃. 가부장제도 속에서 불행했던 여성의 전설을 담은 꽃이기도 하다.
ⓒ 김희년
대모산의 할미꽃 하면 잊을 수 없는 게 노랑할미꽃이다. 일원동을 개발하기 전에만 해도 산자락 묏등엔 노랑할미꽃이 심심찮게 보였는데, 그 묏등들이 삼성병원이나, 모학교 건물 부지로 들어간 다음에는 본 적이 없다.

어쨌건 할미꽃을 원없이 바라본 포만감에 언덕을 내려가는데, 솜나물 씨방을 달고 있는 마른 줄기가 보여 무심코 들여다본다. 아, 이런 횡재가 없다. 풀섶에 숨어 줄기 아랫도리에서 앙증맞은 꽃이 갓 피어나고 있다.

▲ 솜나물. 풀잎을 말려 부싯깃 솜으로 쓰여 '부싯깃나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 김희년
갓 싹이 터 자라난 온몸에 흰 섬유질이 솜처럼 덮여 있어 '솜나물'이라 하였다. 솜다리, 솜방망이, 솜대, 솜분취, 솜양지꽃 등 '솜'이라는 말이 붙은 식물들은 식물체에 흰 털이나 섬유질 같은 것들이 붙어 있다. 솜이 귀할 때에 이 풀의 잎을 말려서 부싯깃 솜으로 쓰여 '부싯깃나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솜나물은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인데, 볕이 아주 잘 드는 곳에 잘 자란다. 꽃은 어린 봉우리 때는 분홍빛이 진했다가 점차 옅어지는데, 주로 흰색이지만 연한 분홍빛이 돌기도 한다.

▲ 솜나물. 봄에도 피지만 가을에 또 한번 더 꽃을 피운다.
ⓒ 김희년
솜나물은 지금과 같은 봄에도 꽃이 피지만, 가을에 또 한번의 꽃을 피운다. 가을에 피는 꽃들은 키가 한자는 될 만큼 높이 자라는데, 짧은 시간에 열매를 맺으려는지 꽃이 닫힌 상태에서 자가 수분한다. 할미꽃과 솜나물을 본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풍년이다. 얼마 있지 않아 이 언덕엔 봄꽃들로 가득하리라.

대모산(大母山)은 정상의 높이가 292m 정도이니 높은 산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품처럼 오지랍이 넓은 산이다. 육산이라 지하수맥이 풍부하여 골짜기마다 시원한 샘터가 자리잡고 있다. 성지 약수터는 거의 정상 가까운 곳인데도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이다. 이런 산이니 야생 생명들이 살기에 얼마나 좋은 곳일까!

십여 년 전만 하여도 산 속은 한산했는데, 지금은 평일에도 거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원래 있던 등산로를 벗어나 자꾸만 새로운 길을 만들고 있는 점이다. 밟혀서 사라지는 생명도 생명이지만, 사람이 다니는 길은 바람길이 되고 숲의 습기를 빼앗아 버린다. 야생 풀나무들에겐 생존의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등산로 바로 옆 풀섶에도 지천이었던 은방울꽃, 족도리풀, 둥글레 등은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전에 보였던 하늘나리, 참나리 군락지도 자꾸 사라져 마음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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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 06. 0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