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맑은 햇살에 이끌려 정오도 되기 전에 후딱 점심을 먹어 치우고 집을 나선다. 세계야구대회 일본과의
준결승전이 막 시작되어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지만 내 마음을 붙들지는 못한다. 지난해 가을부터 시간만 나면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버릇이, 이젠 중독이라 할 정도가 되었다. 계절이 순환하며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는 생명 세계에 대한 한없는 집착,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은지 나는 모른다. 광신도에게 어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설득도 소용없듯, 생명이 만드는 세계에 흠뻑 빠진 내게 어떤 유혹도 산과 들의 유혹을 넘어서지 못한다. 집을 나서자마자 기대하지도 않은 곳에서 꽃을 만난다. 바로 이웃하고 있는 아파트 화단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진달래꽃을 본 것이다! 집을 나서자마자 바로 꽃을 만났으니, 너무 신나 셔터부터 누르고 본다. 생각해보니, 저 남쪽 내 고향에서도 4월에 들어서서야 진달래꽃이 폈는데, 이제 3월 중순 끝무렵 꽃이 피었으니, 일러도 많이 이른 편이다. 아파트 단지가 따뜻한 탓도 있겠지만 지구 온난화의 한 징표인 듯해 마냥 반가워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이영도 시조, 한태근 곡) 4·19 혁명을 20여년간 질식시켜왔던 유신 독재, 최루탄이 폭죽처럼 터지던 교정, 끌려가던 학우들, 그리고 그 자리에 피었다 지던 진달래꽃….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대모산을 넘어간다. 지리적으로도 서울의 가장 남쪽이지만, 제아무리 봄이라도 품 넓고 따뜻한 대모산을 비켜서는 서울에 입성할 수는 없으리라. 수서역에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생강나무 노란 꽃들이 군데군데 산 속을 환히 밝히고 있다. 아직 다른 나무들은 겨울잠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듯한데, 생강나무 노란 꽃과 귀룽나무로 보이는 푸른 새싹이 숲속을 봄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산등성이 군데군데 심어진 오리나무가 수꽃들을 탐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다. 누에처럼 통통하게 늘어진 황금빛 이삭이 수꽃이고, 바로 위에 아주 작은 고동색으로 뾰족이 달린 것이 암꽃이다. 나무 노래에서도 '십리 절반 오리나무'라고 했는데, 산림녹화용으로 오리 간격으로 심어 붙여진 이름이라지만 믿거나 말거나인 듯하다. 땔나무로는 소나무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었지만 화력도 약하고 다른 면으로도 그다지 쓸모가 없어 대접을 받은 나무는 아니었다.
묏등 언덕 아래엔 양지꽃이 활짝 피었다. 지난 일요일엔 한두 송이 핀 것도 보기 어려웠는데, 벌써 꽃잎을 땅에 떨어뜨린 녀석도 있다. 볕 잘 드는 산기슭이나 언덕, 밭두렁 등에 잘 자라는, 이름 그대로 양지를 좋아하는 꽃이다.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뽕구지꽃이라는 귀여운 별칭도 가지고 있다.
"제발 아이들 좀 놀게 내버려둡시다!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입시 지옥에 끌어넣어야만 직성이 풀릴까요?" 바구니엔 냉이와 돌나물이 가득하다. 바구니엔 담긴 게 어디 나물뿐이겠는가! 맑은 바람과 따스한 햇살, 그리고 생명의 경이로움은? 돌나물을 뿌리채 캐 담는 것이 보여 줄기만 뜯어 담는 것이라며 시범을 보여줬더니 발그레한 볼에 방긋 미소를 띤다. 쑥이 많이 자란 곳을 알려줬더니 저렇게 쪼그리고 앉아 쑥을 또 캐려고 한다. 다시 줄기에서 잘라내는 법을 알려 준다.
짙푸른 언덕 아래를 지나가자니 냉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줄기도 쑥쑥 자라올라 한 자 남짓이나 되어 보인다. 가장 흔한 꽃, 그래서 민중들에게 가장 가까웠던 꽃, 그러면서도 꽃 이상의 삶으로 다가서는 생명이 냉이였다.
며칠 전 대기업 노조 활동을 끊임없이 감시당하다 해고되어 옥살이까지 한 한 노동자 부인의 고통스런 삶을 기록한 기사를 읽으며, 비바람 속에 피어나는 야생화의 생명력에 이끌리기보다는 사진으로 나타날 꽃의 아름다움만 좇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래서 내 삶이 터무니없이 사치스런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봄꽃 소식을 전하는 내 기사에 유일하게 단 그의 댓글 "예쁜 꽃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라는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봄을 온통 나 혼자 다 차지하는 듯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른 잎 사이로 쑥쑥 올라온 비비추가 참 이쁘네요. 생강나무꽃을 실제로는 본 적이 없는데 향기도 맡고 싶고…. 노랑이, 분홍이, 초록이의 고운 꽃 색깔처럼 예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예쁜 꽃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항상 방글이가 되겠지요?^^ 이 분에게, 아니 아직도 험난한 생존의 땅 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민들레처럼>이란 노래를 들려드리며 위로하고 싶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당하게 피어나는 민들레 뜨거운 가슴으로, 온몸 부딪치며 해방의 봄을 마침내 맞이하길 빌면서…. 1. 민들레꽃처럼 살아야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 대도 민들레처럼. 2. 모질고 모진 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치며 살아야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 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글/박노해, 가락/조민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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