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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신세동 전탑, 봉감리모전석탑, 영양 서석지, 현이동 모전오층석탑

모산재 2005. 12. 27. 16:09

 

신세동 전탑, 봉감리 모전탑, 영양 서석지, 현동 모전석탑

2005. 01. 04

 

 

 

 

늘 함께해 오던 사람들과 봉고차를 빌려 타고 여정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여행을 출발하였다. 하지만 병철 형은 이미 여행 계획을 머리속에 가지고 있었던 모양. 안동역에서 전탑 하나를 구경하더니 이내 신세동 전탑으로, 그리고 봉감리와 현이동 모전석탑 등으로 우리를 끌었다. 결국 경북의 전탑과 모전석탑을 돌아보는 주제 여행이 된 셈이다.

 

 

 ■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 = 신세동 칠층전탑 (국보  제16호)

 

안동댐 주변, 낙동강 건너 민속박물관을 바라보며 중앙선 철도 굴다리 안쪽으로 들어서면 철로 아래에 육중한 위용을 자랑하는 전탑(흙벽돌탑)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국보로 지정된 신세동 칠층전탑이다. 

 

그러나 대단한 위엄을 가진 탑은 안타깝게도 철길 방음벽에 바짝 붙어 있어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답답하고 처량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기단부조차 콘크리트로 보강되어 있는 상처입은 모습이다. 잘 생긴 최성기의 탑이라는 안동역의 동부동 전탑도 철길에 가위눌리고 있지 않은가...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을 향하도록 하였다. 진한 회색의 무늬 없는 벽돌로 쌓아 올린 탑신은 1층 몸돌에 감실을 마련하였고,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기와를 얹었던 흔적이 있다. 이는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상륜부 노반()만 남아 있는데 원래는 금동제 상륜이 있었다고 한다.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다. 

 

 

팔부중상이 새겨진 기단부

(문화재청 사진)

 

 

 

 

 

▼ 기단 남쪽면 계단(문화재청 사진)

 

 

 

 

 

법흥동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탑 주위로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봉감 모전오층석탑 (국보 제187호)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반변천 강가의 밭 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강 건너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으로 솟은 탑의 위용이 아름답다.  이 마을을 '봉감(鳳甘)'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봉감탑'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석탑 주변의 논밭에 기와조각과 청자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탑은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흙과 돌을 섞어 낮게 바닥을 깔고, 10여 개의 길고 큰 돌을 짜서 쌓았다. 그 위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 모두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았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두었는데, 감실 양쪽에 둔 2개의 화강암 기둥과 이맛돌의 섬세한 조각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독특하게도 중간정도의 높이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의 양식에 따라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으며, 처마의 너비는 좁아져 있다.

 

 

1단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균형과 정연한 축조방식을 갖추고 있으며,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 영양 서석지(瑞石池) (중요민속문화재  제108호)

 

봉감에서 남이포를 지나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연당마을에 이른다.

 

연당마을에는 조선시대 민가의 대표적인 연못으로 한국 정원의 백미라 할 만한 서석지가 있다. 아담한 흙돌담과 경내를 다 덮을 듯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 있는 풍경이 시선을 끈다.

 

수백 년 세월을 묵묵히 지켜왔을 은행나무로 미루어 이곳이 선비들의 강학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행단은 공자가 곡부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강학 장소이다. 실제로 이 은행나무 아래엔 행단(杏壇)이라고 새긴 표석이 있었다고 한다.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는 선비가의 정원으로 들어서면 서석지가 나타난다. 

 

 

 

서석지는 조선 광해군 5년(1613년)에 정영방 선생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영방은 1605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나라가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병자호란 후에 넷째아들인 제()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학문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양산 남쪽 기슭 서쪽 구릉 아래에 연못을 파서 서석지라 이름하고 양 옆에 정자를 세웠는데 동쪽에 서재인 주일재(), 북쪽에  손님을 맞이하고 글을 가르치는 경정()을 두었다.

 

 

 

경정(敬亭)은 넓은 대청과 방 2개로 되어있는 큰 정자로 손님을 맞이하고 글을 가르치기 위한 곳이다.

 

 

▼ 경정과 서석지

 

 

 

서석지라는 이름은 연못 속의 바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모진 연못안에 물위에 보이는 60여 개의 바위, 물속에 있는 것이 30여 개가 된다. 주인은 이들 바위마다 은거 생활을 하는 자신의 인생관이나 사상을 나타내는 심오한 뜻을 가진 이름을 붙여 상징화하였다. 예를 들면 '탁영반'은 '갓끈을 씻는다'는 뜻이니, 혼탁한 세상에서 물러너 은둔하면서 고답의 세계에 머물려는 선생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바위에 붙여진 이름은 선유석, 통진교, 난가암, 상경석, 옥계척, 탁영반, 하예석, 희접암, 와룡암, 어상석, 봉운석, 상운석, 낙성석, 분수석, 기평석, 관란석, 조천족, 수륜석, 쇄설강 등이다.

 

 

 

 

 

 

경정 난간 저쪽으로 작은 서재인 주일재(主一齋)가 보인다. 손님을 맞이하고 글을 가르치는 경정은 크게 않히고 주인의 사적 공간인 서재를 작게 지어 놓은 것으로, 겸허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고 유흥준 선생은 말하고 있다.

 

 

 

주일재 앞에는 맑고 곧고 그윽한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를 심어 만든 사우단(四友壇)이 있다. 

 

연못은 자연스럽게 석축을 쌓았고, 연못 북쪽에 네모난 단을 만들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하였다. 연못의 동북쪽에서 물이 들어오고 서남쪽으로 물이 나간다. 연못 안에는 연꽃을 심어 8월이면 맑고 향기로운 연향에 취한다.

 

연못은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으로 되어 있다.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만들었고, 반대편의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만들었다.

 

 

 

 

 

■ 현이동 모전오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

 

경북 영양읍 현2리에 서 있는 5층 석탑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이다. 

 

 

 

 

커다란 암반 위에 높이 3.2m의 바위를 기단으로 하여 전(벽돌) 모양의 흑회색 점판암을 쌓아서 만든 높이 6.98m의 5층전탑으로 기단 위에 나직한 받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제1탑신을 쌓아올렸다.

 

 

 

 

 

 

탑신의 1층 몸돌 동쪽면에는 감실을 설치하였고, 그 입구 양 문기둥돌에는 특이하게 금강역사가 아닌 덩굴무늬(당초문)를 장식하였다. 탑신의 2층까지만 남아 있던 것을 새로이 복원해 놓은 것으로,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얹혀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흑회색의 점판암 재질과 둔탁한 겉모습이 어우러져 육중한 느낌을 자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