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10월 하순 고양 서오릉을 찾는다. 하늘은 투명하게 높고 푸르고, 흰 구름은 두둥실 여유롭다.
서오릉은 한양 도성의 서쪽에 있는 5릉으로 각각 경릉(敬陵), 창릉(昌陵), 명릉(明陵),익릉(翼陵), 홍릉(弘陵)을 가리킨다. 5릉 외에도 순창원(順昌園), 수경원(綏慶園)의 2원, 대빈묘(大嬪墓)의 1묘가 더 있다. 이곳에는 숙종과 그의 왕비였던 네 여인이 잠들고 있으니 서오릉은 가히 숙종 부부의 묘역이라 할 만하다.
● 명릉(明陵) :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
오른쪽 쌍릉이 19대 임금인 숙종과 둘째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의 능, 왼쪽 단릉은 정비인 인원왕후의 능이다.
인현왕후는 숙종보다 한참 먼저 세상을 떠났고, 후에 숙종도 60세를 일기로 승하하면서 그녀 옆에 묻히길 원했다고 전해진다. 숙종이 죽기 전 가장 오랜 기간 정비였던 인원왕후, 죽어서 남편과 떨어진 곳에서 인현왕후와 함께 누워 있는 남편을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다. 숙종의 묘역 옆에는 숙종이 평소 아꼈던 고양이 '금손이'가 묻혀 있다고 한다.
숙종은 첫 왕비 인경왕후와 금슬이 좋았으나 인경왕후는 20세에 천연두에 걸려 요절하였다. 인경왕후의 3년상을 잘 치르려고 했지만 서인 거두 송시열의 추천과 친모 명성왕후의 압박으로 서인 가문의 인현왕후를 맞아들이게 된다. 이 때문에 인현왕후에게는 호감을 갖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사후 숙종은 과거 명성왕후에 의해 출궁되었던 장희빈을 환궁시켜 총애하였다. 1688년 후궁 장씨아들 윤(昀)(후일의 경종)을 낳고 숙종은 원자로 정하려 했으나, 서인들이 반대하였고 이듬해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는 기사환국(1689년)으로 이어지며 인현왕후도 폐서인되었다. 5년 뒤 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는 갑술환국(1694년)이 일어나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이 된다. 1700년 중증 통풍이 발병하여 3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인원왕후는 1702년(숙종 28) 15세에 숙종의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자식은 얻지 못했다. 경종이 즉위 후에는 왕대비, 영조 즉위 후에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소론의 딸로 숙종의 사후에는 노론으로 바뀌었다.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에 큰 역할을 하였고 연잉군이 역모의 주범으로 몰리자 몸소 보호하는 등 영조가 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매사에 엄격하고 강한 결단력으로 조선 후기 궁중의 법도를 바로잡은 인물로 평가된다. 1757년 70세로 사망하였다.
숙종의 넷째 왕비로 사약을 받은 장희빈 묘소, '대빈묘'는 서오릉 서쪽 한적한 숲속에 따로 자리잡고 있다.
명릉을 지나면 바로 재실이다. 능참봉을 두어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며, 제례 사무를 관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재실 앞 은행나무 고목, 단풍이 아름답다.
● 수경원(綏慶園) : 영조 후궁, 사도세자 생모 영빈 이씨의 묘
영빈 이씨는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정조의 친할머니이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선희궁'이라 지칭되고 있다.
무덤은 원래 연세대학교 교정에 있었으나 1969년 이곳 서오릉으로 옮겼다. 당시 정자각을 옮겨오지 못했고 제향 공간도 갖추지 못해 주변 능에 비해 초라한 모습이다. 현재 연세대 묘소 자리에는 교회 건물인 루스채플이 세워졌고 정자각만이 남아 수경원 자리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영빈 이씨는 6세의 나이로 대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으며, 1726년 31세에 영조의 승은을 입어 정1품 영빈(映嬪)에 이르렀다. 다섯 옹주를 내리 낳다 1735년 아들 사도세자를 출산하였고, 첫 아들 효장세자의 죽음으로 42세가 되어 왕위를 이을 아들을 얻게 된 영조는 크게 기뻐하며 다음해에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하지만, 생후 100일만에 법도에 따라 생모와 떨어져 정비 정성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경종비 선의왕후를 모시던 궁인(한상궁, 최상궁 등)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 탓인지 영특했던 사조세자는 성장하면서 비뚤어진 성정을 드러내게 된다.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낳았는데, 막내딸 화완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자녀 모두 영빈 이씨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보내는 기구한 운명을 겪는다. 특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자 세자였던 사도세자의 비행을 스스로 영조에게 고변하여 다음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게 된 일(임오화변, 1762년)은 너무도 비극적이다.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행한 것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으로 한도 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내관을 내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 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눠주고,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근일 궁궐 후원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했으며 하인에게 머리를 풀게 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 두고 불측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영빈 이씨는 고통스러워했다.
당신이 나라를 위하여 자모로서 하지 못할 일을 하시고, 비록 선군(先君, 영조대왕)을 위하신 일이나 그 지통이야 오죽하시리요. 상시의 말씀이, "내가 못할 일을 차마 하였으니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으리라. 내 본심인즉 나라를 위하고, 임금의 몸을 위한 일이나, 생각하면 모질고 흉하니 빈궁은 내 마음을 알 것이어니와 세손 남매는 나를 알겠느냐." 하시고 밤에는 늘 잠을 못 이루시고 동편 툇마루에 나와 앉으셔서 동녘을 바라보며 상심하시고, 혹 그런 처분을 하지 않았어도 나라가 보전되지 않았을까, 내가 잘못하였는가 하시다가도 또 그렇지 않다. 여편네의 약한 소견이지 내 어찌 잘못하였으리요 생각하시곤 했다. 혼궁(魂宮)에 오시면 부르짖어 울고 서러워하셔서 심중에 병이 되어 몸을 마치시니 더욱 슬프다. - <한중록>에서
1764년 아들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나던 바로 다음날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였다.(자진하였다는 설도 있다.) 양주 연희궁(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지은 이궁) 터 대야동 언덕에 묻혔고 영빈의 시호를 따서 '의열묘(義烈墓)'로 불리다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수경원(綏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좋은 할머니였지만 정조는 살아생전 할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한다.
● 익릉(翼陵) : 숙종 정비 인경왕후의 능
수경원을 지나면 바로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안장된 익릉이 나타난다. 요절한 때문에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인원왕후가 묻힌 명릉과는 거리를 둔 곳에 자리잡게 되었다.
11세에 왕세자빈이 되고 1674년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가 되었지만 천연두에 걸려 20세에 사망한다.
계비인 인현왕후나 인원왕후와 달리 숙종과의 금슬은 매우 좋았는데, 2명의 공주는 일찍 죽고 세 번째 용종은 유산하는 등 자식복도 없이 자신도 요절하였다.
서인의 거두였던 사계 김장생의 현손녀(고손녀=손자의 손녀)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윤두수의 고손녀이자 선조의 둘째딸 정혜옹주의 손녀로, 인경왕후와 남편 숙종은 선조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10촌 관계이다. <구운몽>을 쓴 서포 김만중은 아버지의 친동생이고, 훗날 인현왕후 복위에 적극 가담한 김춘택은 친정 조카이다. 이런 인연으로 김만중이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을 모델로 썼다는 소설 <사씨남정기>는 바로 서인의 정치적 입장이 잘 반영된 소설임을 알 수 있다.
● 인성대군(仁城大君) 초장지 : 예종의 요절한 장남, 인성대군의 무덤 터
익릉 서족 언덕 작은 오솔길로 들어서면 작은 무덤 터가 나타난다. 3살의 나이로 죽은 예종의 첫 아들 인성대군이 처음 묻힌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서삼릉 왕자와 왕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인성대군은 8대 예종과 장순왕후 한씨의 첫째 아들이다. 어머니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딸이니, 인성대군은 한명회의 외손자이다. 1461년(세조 7년) 12월 31일에 태어났는데, 예종이 12세의 어린 아버지로 낳은 첫 아들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어머니 한씨는 15세였는데 인성대군을 낳고 불과 5일 뒤에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인성대군도 2년 뒤에 풍질로 요절했다.
인성대군의 이름은 '분(糞)'이다. 왕세자의 장남 이름을 '똥'이라고 짓다니! 고종의 유아명이 '개똥'이었던 것처럼, 이름을 천하게 지어야 오래 산다는 뜻으로 지은 유아명으로 보인다. KBS1 드라마〈왕과 비〉에서는 세조(임동진 분)가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고 하여 그렇게 지어줬더니 도리어 요절했다."며 분노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고개 능선을 따라 소나무 숲길을 걸어오르다 서어나무 숲길로 내려선다. 단풍과 함께 낙엽이 쌓인 숲길을 걸으며 가을이 깊어졌음을 느낀다. 이제 인성대군으 아버지 예종의 능, 창릉으로 간다.
● 창릉(昌陵) :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
8대 임금인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가 잠들어 있는 창릉. 서오릉에 들어선 첫 왕릉으로 왼쪽이 예종의 능이고 오른쪽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예종은 1450년 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황(晄), 형 의경세자(덕종 추존)가 세자로 책봉된 지 2년 만에 죽어서 세자의 자리를 물려받아 1468년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11세에 한명회의 큰딸과 혼인했는데, 한씨는 세자빈에 책봉된 이듬해에 인성대군(仁城大君)을 낳고 죽었다.
성품이 영명과단(英明果斷)하고 공검연묵(恭儉淵默)하며, 서책에 뜻을 두어 시학자(侍學者)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씩 진강(進講)하게 하고, 비록 몹시 춥거나 더울 때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는 "세자가 육례(六藝, 禮·樂·射·御·書·數)에 이미 통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라며 칭찬했다.
효성이 지극해 세조의 수라상과 약을 직접 챙기며 극진히 간호했는데, 이 때문에 본인의 건강이 나빠졌다. 한명회 등 훈신 세력과 구성군과 남이 등 종친 세력 사이에서 이들을 견제하던 예종은 왕위에 오른지 1년 2개월만에 돌연 승하하고 만다.
예종 능
안순왕후 한씨 능
안순왕후는 예종의 두 번째 부인으로 우의정 한백륜(韓伯倫)의 딸이다. 1462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된 한씨는 예종 즉위 후 안순왕후(安順王后)에 봉해졌다. 예종이 죽자 왕대비 정희왕후는 한명회와 결탁하여 원자(元子)인 제안대군은 어리다는 이유로,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로 예종의 형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인 잘산군(乽山君)을 예종과 안순왕후의 양자로 입적시켜 예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안순왕후는 선왕의 왕비이자 성종의 법모로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가 되었다. 그런데 2개월 후 의경세자가 의경왕으로 추숭되며 그의 생모 수빈 한씨(소혜왕후)도 인수왕비로 진봉되었다. 이에 인혜왕대비와 인수왕비의 서열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는데, 신숙주의 주장으로 형제의 서열대로 순위가 결정되었다.
● 홍릉(弘陵) : 영조 정비 정성왕후의 능
21대 임금 영조의 정비(正妃)인 정성왕후 서씨가 안장된 능이다. 명성황후 민씨가 묻혔다가 고종이 사망하면서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된 서울 동대문구의 홍릉(洪陵)과는 한자가 다르다.
중전으로 33년, 조선 왕조 최장수 왕비였지만 자식이 없었다. 1757년 67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능이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우허제'라고 하여 영조가 정성왕후 곁에 쌍릉으로 묻히기 위해 자리를 비워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왕대비(王大妃)였던 정순왕후를 의식하여 현재의 동구릉에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하였고, 정성왕후는 옆자리를 비워 둔 채 홀로 잠들게 되었다.
혼인 첫날 밤 연잉군이 그의 손을 보고는 왜 이리 곱냐고 물어보자 고생을 안 한 덕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 그리하였다고 대답하니 연잉군이 무수리 출신인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깔본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찾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으며 정빈 이씨 소생인 효장세자와 영빈 이씨 소생인 사도세자를 친아들처럼 아꼈다고 한다.
특기할 점은 그녀의 시호! 1740년(영조 16) '혜경(惠敬)'이라는 존호가 올려진 뒤 생전에 '장신(莊愼)'·'강선(康宣)' 등이 덧붙여졌고, 죽은 뒤 1772년 '공익(恭翼)'이 추존되고, '인휘(仁徽)'·'소헌(昭獻)'이 더해져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이라는 존호를 가지게 되었으며, 1778년(정조 2)에 휘호로 '단목장화(端穆章和)'가 올려졌다. 그래서 정성왕후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라는 역대급의 시호를 가진 왕후로 기억된다.
● 대빈묘(大嬪墓) : 숙종 비, 경종 친모 장희빈의 묘
경릉 서쪽으로 오르는 언덕길에 자리잡고 있다. 그늘진 숲속 좁은 공간에 조성된 묘지라 이끼가 두텁게 자랐다.
처음에는 양주 인장리(仁章里,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일대)에 조성되었으나 자리가 불길하다 하여 광주 진해촌(眞海村,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문형동)으로 천정되었다.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던 묘소는 도로 건설로 1969년 남편 숙종과 3왕비가 있는 서오릉(西五陵)으로 천장하였다. 볕 잘 드는 동쪽 묘역 명릉과 익릉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인동 장씨로 아버지는 역관 출신이다. 입궁 시기와 동기는 불분명하다.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를 모시고 각별한 사랑을 받다 1680년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 사후 숙종을 모시게 되고 총애를 받는다. 하지만 모후에 의해 같은 해 출궁 당한다. 이듬해 간택령에 의해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추천으로 인현왕후가 책봉되었다. 인현왕후 민씨의 배경 세력이었던 노론의 강력한 적으로 규정되었다. 모후의 사망 후 1685년 무렵 재입궁, 1701년(숙종 36년) 숙빈 최씨의 발고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는 저주굿을 한 혐의를 받고 숙종에게 자진을 명받았다.
아들 경종이 즉위하며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절기마다 제사를 받게 되었다. 정비가 아니지만 국왕이 되는 원자를 생산한 후궁은 통상적으로 묘소의 칭호가 '원'이 되어야 하나, 정쟁에 휘말려 사약을 마시고 죽은 희빈 장씨는 본래의 대우를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묘'란 이름을 쓰게 되었다. 숙종의 후궁이면서 희빈과는 경쟁 관계이기도 했던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홀로 떨어져 있다. 숙빈의 무덤에는 '소령원(昭寧園)'이라는 묘호가 붙었다.
● 경릉(敬陵) :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능
7대 임금인 세조의 세자이자 9대 임금 성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덕종(의경세자)과 세자빈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가 잠들어 있다.
● 순창원(順昌園) : 순회세자와 공회빈 묘
13대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는 7세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3세에 요절한다. 그의 부인 공회빈 윤씨는 왕비가 되지 못하였는데 1592년 세상을 떠났는데 임진왜란으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신주를 만들어 이 묘소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다시 은행나무
○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앵봉산 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매봉의 동쪽은 은평구 갈현동 및 구산동이다. 사적 제198호 고양 서오릉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왕릉들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서오릉 안내 지도(출처 : 다음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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