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둘쨋날 아침이 밝았다.
여행 일정과 코스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때문에 또 아쉬운 일이 생겼다.
이곳 가라츠(唐津)는 하룻밤 잠만 잘 뿐 바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다께오(武雄) 올레로 이동하는 것임을 몰랐다. 엊저녁 어둠에 잠긴 마츠우라(松浦) 강변을 따라 호텔로 들어오면서 멀리 아름다운 불빛으로 보였던 가라츠성(唐津城) 천수각(天守閣)이 오늘 올레 일정 속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막연히 가라츠(가라쓰)가 다께오와 가까이 있는 곳이려니 생각했던 것. 가라츠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부를 해 두었더라면 한두 시간쯤 빨리 일어나 천수각과 해변 송림을 다녀왔을 것을...
예습 없이 여행을 떠나면 이렇게 챙길 수 있는 것을 많이 놓치게 된다.
숙소, 가라츠로얄호텔 전경
자고 일어난 아침, 커튼을 열고 바라보니 호텔 앞은 강이고, 뒤쪽은 반달 같은 백사장에 솔숲이 들어선 해변이다. 강 이름은 마츠우라강(松浦江), 해변에 들어선 솦숲을 끼고 흐르는 강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보인다.
지도를 보니 북류하는 마츠우라 강물은 길게 발달한 사주에 밀려 서쪽으로 방향을 살짝 틀고 흐르다 가라츠성 앞에서 힘이 미치지 못한 사주의 머리맡으로 빠져나가 바다와 만난다. 우리 숙소는 바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히가시가라츠(東唐津)의 모래톱(사주) 해변에 자리잡고 있다.
가라츠시는 사가현 제2의 도시라고 한다.
가라츠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예로부터 중국이나 한반도로 이어지는 국제항으로 번창하였다. 특히 당나라 때에 교역이 활발했으므로 '당진(唐津)'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북단부에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 거점으로 1991년에 축성한 나고야(名護屋) 성터가 남아 있다. 1593년 중반에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가 가라츠 번을 두고 이곳을 통치하기 시작했으며, 1602년에 나고야성은 마츠우라 강 하구의 현재의 가라쓰성으로 대체되었고활기 넘치는 상업이 발달한 성시로 성장하였다.
마츠우라강(松浦江) 건너편의 가라쓰 시 전경
강의 하류 쪽으로 가라츠성(唐津城) 천수각이 보인다.
거리로 따져보니 호텔에서 1km쯤... 엊저녁에 위치나 거리를 가늠할 수 있었더라면 다녀왔을 것을...
가 보지 못한 가라츠성을 검색해 본 자료들을 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가라츠성(唐津城)은 마츠우라강 하구의 미쓰시마 산 위에 자리잡고 있다.
정상에 혼마루, 그 서쪽에 니노마루, 산노마루가 일렬로 배치된 연곽식 평산성이다. 마츠우라 강 오른쪽으로는 니지노마쓰바라(虹の松原)라 불리는 솔숲이 펼쳐져 있어 가라츠성이 두루미 머리가 되어 양쪽으로 날개를 펼치고 춤을 추는 듯한 형세여서 가라츠성을 마이츠루성(舞鶴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1591년 조선 침략의 전초 기지 히젠나고야성(肥煎 名護屋城) 건설에 봉행(奉行: 다이묘의 행정 사법 담당 관직)으로 파견되었던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는 159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이 지역에 입봉되어 부임해 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속해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에 승리를 거둠으로써 자신의 영지를 존속시킬 수 있었으며, 이에 더해 현재의 구마모토현에 있던 히고국(肥後国) 아마쿠사군 4만 석이 가증되어 도합 12만 3천 석의 도자마 다이묘(外樣大名)가 되었다.
1602년부터 미쓰시마산에 가라츠성을 축성하기 시작해 1608년 완성하였다. 축성 때 가라츠 동쪽과 육지로 이어져 있던 미쓰시마산을 육지와 분리해 마츠우라강이 가라츠만으로 흐르도록 유로를 변경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폐성되었던 히젠 나고야성의 부재를 사용했으며, 규슈의 여러 다이묘의 도움을 받아 축성했다.
2대 번주 데라자와 가타타카 대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강경책과 그 동안 계속된 노역으로 1637년 아마쿠사와 시마바라 번에서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라는 16세 소년이 이끄는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다. 천주교를 믿는 4만여 명의 농민 반란군은 4개월만에 12만 막부군에 의해 진압되지만, 가라츠 번은 막부로부터 문책되어 아마쿠사 4만 석의 영지가 몰수되었다. 1647년 2대 번주 가타타카는 아마쿠사 영지의 몰수와 심적 동요로 인해 에도 번저에서 자살하였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데라자와 가문의 영지는 몰수되었다. 가라츠 번은 잠시 막부 직할령에 편입되었다 오쿠보 가문 등 5가문이 돌아가며 번주로 역임하였다.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에 따라 폐성되어 민간에 불하되었다 6년 후 1877년 성터 주변은 마이즈루 공원으로 정비되었고, 1966년에는 천수각(天守閣)을 비롯 성문과 망루가 재건되었다. 1989년 가라츠 시청 앞의 히고 해자와 석벽을 복원하였고, 1992년~1993년에는 니노마루 터에 도키노 다이코 망루(時の太鼓)와 산노마루의 다쓰미 망루(辰巳櫓)가 복원되었다. 니노마루 어전 터에는 와세다사고중고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니노마루와 산노마루는 시가지로 조성되었다.
현재 천수각은 고고학 자료, 유물, 미술품, 가라츠 도기 등이 전시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수각은 가라츠 시민이 자주 찾는 가라츠시의 상징으로 전망대에서는 아름다운 도시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다.
※ 데라자와 히로타카(寺沢広高 1563~1633)
센고쿠 시대 무장 및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처음 아버지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임진왜란에 즈음하여 히젠 나고야 성의 건축을 담당했고, 그 공으로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되어 출세했다. 또, 무역통제와 조선에 있는 일본군의 보급과 병력 수송 등의 임무를 맡았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소위 무단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가라츠 번내 황무지를 개간할 때 소나무 방풍림을 조성했다. 이 방풍림은 니지노마쓰바라로 일본 3대 송림(松林) 중 한 곳이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접근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했다. 전후, 그 공으로 아마쿠사 4만석으로 가증되었다. 이후 버려진 히젠 나고야 성의 부재를 활용해 가라쓰 성을 축성하고, 가라쓰 번 12만석을 영지로 한 다이묘가 되었다. 영지 내의 가라츠와 아마쿠사의 호족을 탄압한 결과, 영내는 안정을 되찾고 번영했지만, 그가 죽은 후 아마쿠사에서는 시마바라 봉기가 발생한다. 이에 막부는 2대 번주 데라자와 가타타카에게 실정의 책임을 물어 아마쿠사의 영지를 몰수했다. 그 후 아들 가타타카는 자살하고 대를 이을 아이가 없어 가문은 단절된다.
묘비는 가라쓰시 가가미의 가가미 신사 경내에 있으며, 지역민들은 시마님(志摩様)으로 숭상되어 매년 봄 묘소를 찾는다.
가라츠 호텔 9층 식당에서 바라본 가라츠만, 현해탄이 펼쳐진다.
가라츠만의 전경
호텔의 동쪽 무지개 모양의 해변으로 펼쳐지는 울창한 송림, 니지노마츠바라(虹の松原)
'무지개송림'이라는 뜻의 니지노마츠바라(虹の松原)는 가라츠만(唐津湾) 해변에 펼쳐진 소나무 숲이다. 이 솔숲은 시즈오카현의 미호노마츠바라(三保の松原), 후쿠이현의 게이노마츠바라(気比の松原)와 함께 일본의 3대 솔숲의 하나로 특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겐카이국정공원(玄海国定公園)의 일부이며 일본의 자연 100선, 일본의 명승 100선, 일본의 길 100선 등에 선정되었다.
폭 400~700m, 길이 약 4㎞, 총 면적 약 240헥타르 규모로 약 100만 그루의 해송(海松=곰솔, 흑송)이 숲을 이룬다. 에도시대 초기 번주(藩主) 데라자와히로타카(寺沢広高)가 황무지를 논으로 개간하기 위해 방풍, 방사, 방조림으로 조성한 것이다. 숲은 엄격하게 관리되어 땔감은 물론 낙엽 채취도 제한되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국유림으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카가미야마(鏡山) 정상(284m)서 바라보는가라츠만과 무지개솔숲의 전경
출처 : 위키백과
임진왜란의 전초 기지, 히젠나고야성(肥煎 名護屋城)은 규슈올레 가라츠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이번 여행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
출처 : http://www.welcome-saga.kr/main.do
당시 가라츠는 1500명 정도 살던 작은 도시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고야성을 축조하고 머무르자 전국에서 160명의 다이묘가 몰려오고 상인들마저 몰려들며 30만 명의 대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다이묘들이 모두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가면서 나고야성은 폐허가 되고 가라츠는 조용한 곳이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로 원래 마쓰라토의 필두인 하타 가문의 친지로 있는 나고야씨의 거성 가키조에성(垣添城)을 개수하여 축성했다.
가토 기요마사,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축성을 담당했다. 규슈의 20여 명의 다이묘를 중심으로 인부를 동원하고, 공사를 강행해 불과 8개월만인 1592년 음력 3월에 완성했다. 당시 오사카 성 다음가는 규모였다.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야마자토 구루와 등을 배치하고, 혼마루 북서쪽에 5중7계의 천수를 축성했다. 성곽의 주변에는 각 다이묘의 숙소가 배치되었다. 전쟁을 위해 갖추어진 성이었지만 금박으로 입힌 기와가 출토될 정도로 화려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음력 3월 교토를 출발 나고야성에 도착했다. 다음달 음력 4월 1일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가 이끄는 총 15만 8천 명의 제1진이 조선으로 출발했다. 1597년 음력 2월 14만 군으로 조선을 재침략하면서 반도 남부에 왜성을 쌓을 것을 명령했다. 나고야성은 이를 위한 보급 거점이었다. 1598년 음력 8월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이 물러나면서 나고야성은 그 역할이 끝났다. 전쟁 중 히데요시가 나고야 성에 머문 건 1년 2개월이었다.
전쟁이 끝이 난 후, 이 지역은 데라자와 히로타카가 번주로 부임하였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후, 1602년 히로타카는 나고야성을 해체하여 가라쓰 성을 축성한다. 정문인 오오테문(大手門)은 센다이성(仙台城)으로 이건되었고, 성을 두 번 다시 못 쓰게 석벽의 네 모서리를 부수었다. 본격적으로 성이 파괴 된 것은 시마바라의 난 이후이다. 현재는 당시의 석벽을 복원했다.
1985년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의 현지 촬영지 중 하나로 선정되어 영화 촬영을 했다. 2006년 일본 100대 명성에 선정되었다.
※ 나고야성 배치도
출처 : http://homepage2.nifty.com/yogo1394/kyushu/karatungy.htm
※ 나고야성도
이상 출처 : http://blogs.yahoo.co.jp/kirishima_no_bebu/36716346.html
※ 나고야성 유적
나고야성터를 마주보는 곳에 나고야성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 박물관은 1993년 사가현이 주도해 처음 세워졌다.
나고야성박물관
출처 : 위키백과
나고야성박물관은 임진왜란을 '잘못된 침략 전쟁'으로 명확하게 밝히는 몇 안 되는 일본의 전시 시설이다. 박물관의 성격도 '불행한 역사의 증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 안내문에는 "임진·정유왜란의 반성 위에 양국의 교류와 우호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는 구절이 씌어 있다.
특히 이 박물관은 한국에 관한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일본과 한국의 문화 교류를 주제로 한 상설 전시회를 열고 있다. 각 전시물마다 한글 설명이 붙어 있고 박물관 홈페이지도 한국어 설명을 따로 갖추고 있다. 한국인 안내원이 상주하며 박물관 해설을 해 준다. 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을 주제로 다양한 형태의 특별 전시회를 개최한다. 2005년부터 한국의 국립 진주 박물관과 학술 교류 협정을 체결했다. 또 박물관 안에 한국어 강좌를 별도로 운영하며 지역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대상으로 한국에 관한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한·일 양국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만든 거북선과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군선 아타케부네(安宅船)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수많은 한국의 도공들이 끌려온 곳이 가라츠였다.
이들은 경사로 된 가마를 짓고 많은 도자기를 구웠다고 한다. 연방식 경사 가마는 입구에 불을 때면 열기가 맨 뒤쪽 방까지 유지되고 그런 만큼 연료도 절약되며 한 번에 많은 양을 한 번에 구워낼 수 있다. 이 기술이 가라쓰에서부터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현재도 가라츠에서 만든 모든 도자기에는 '조선당진(朝鮮唐津)'이라는 이름이 붙는다고 한다.
가라츠에는 '가라츠군치'라는 축제를 11월에 연다고 하는데, 가라츠 시내에선 물고기, 용, 무사 등의 형태로 만든 14개의 거대한 가마들이 사흘간 거리를 활보한다. 축제 기간이 되면 일본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학교도 사흘간 휴교한다고 한다. 타지에 사는 사람들도 축제 기간엔 모두 돌아온다고 한다. 군치(くんち)는 마쯔리 축제의 가라츠 지역 방언이라고 한다. '군치'는 한국어 '큰 잔치'에서 유래한 말이라 한다.
그리고 가라츠 북쪽 앞바다에는 무령왕의 탄생지 가카라섬(加唐島)이 있다.
오징어와 한치로 유명한 요부코(呼子) 항에서 배를 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섬 가카라시마에는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462~523)의 탄생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가카라시마는 한국에서 버려진 쓰레기가 조류를 타고 밀려와 쌓일 정도로 한반도와 가까운 섬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무령왕의 탄생기가 등장한다. '461년 개로왕(蓋鹵王)은 동생 곤지(昆支)를 일본에 파견한다. 이 때 곤지는 임신 중이었던 개로왕의 부인과 동행하게 해 줄 것을 요청한다. 개로왕은 출산이 임박했던 그의 아내를 동행시킨다. 항해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 산기를 느끼자 일행은 가카라시마에 도착해 아들을 낳게 된다. 무령왕의 어머니가 가카라 섬의 해식동굴에서 무령왕을 낳고, 가까운 우물 오비야우라에서 목욕시켰다고 한다. 이 왕자는 사마왕(斯麻王)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에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斯麻王)'이라고 새겨져 있다. '삼국사기' 역시 무령왕을 '왕의 휘(諱)는 사마(斯摩)'라고 전한다.
가라츠에는 오징어와 한치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맛이라도 보고 갔으면 좋으련만... 호텔 9층 식당에서 쌀죽과 미역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다케오 올레를 위해 8시 30분 호텔을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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