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규슈 (1) 요시노가리유적, 야요이시대 최대의 환호취락과 옹관묘

모산재 2015. 2. 27. 16:56

 

10년만의 일본 여행!

 

새벽같이 일어나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7시 35분에 미팅을 하고 10시 20분에 이륙한 비행기는 11시 30분에 후쿠오카공항에 착륙하였다. 처음 타보는 티웨이(t-way)항공, 2011년 연말에 후쿠오카에 취항한 저가 항공이다. 주스 한 잔에 감자, 고구마, 당근 등 뿌리채소 건 스낵 기내식이 독특하다.

 

 

후쿠오카공항에서 입국 수속이 너무 더뎌서 짜증스런 시간이 되었다. 모든 입국자의 얼굴을 촬영하고 집게 손가락 지문을 등록하는 등 지나친 절차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게다가 이런 장면을 촬영하지 말라는 경고 팻말까지 버젓이 세워 놓고 있어 조폭스런 느낌조차 든다.

 

한 시간도 더 걸려서야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점심은 후쿠오카(하카다)의 명물 우동집이라는 미네마츠본가(峰松本家)에서 '돈멘'이라는 이름의 대야 우동을 먹는다.

 

 

 

 

 

 

지름이 32cm나 되는 커다란 검은 그릇에 담긴 돈면,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양이 많다.

 

양배추와 숙주나물 등 채소만 400g, 잘게 다진 돼지고기와 어묵, 조갯살 등이 들어 있다는 국수의 국물맛은 조금 짠 느낌이 들지만 개운하고 깊은 맛이 느껴진다.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던 양이었지만 먹다보니 어느 새 국물까지 마시고 있다. 면이 많지 않고 채소가 많은 탓에 생각보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돈멘의 값은 800엔.

 

 

 

기분 좋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역사유적지로 향한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한반도를 거쳐 전해진 벼농사 문화가 일본의 핵심 취락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일본 고대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는 야요이문화의 생생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1986년 공업단지 조성 예정지였던, 후쿠오카 남쪽 사가현(佐賀県) 동부 요시노가리 구릉에서 약 600년에 걸친 야요이시대(弥生時代)의 대규모 유적이 발견되어 세계 학계를 놀라게 했다. 야요이시대는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일본의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가리킨다.

 

 

요시노가리 유적지(역사공원) 위치[출처 : 구글맵]

 

 

 

 

 

 

우리가 들어선 곳은 동쪽 출입구.

 

>가운데 아치를 이룬 요시노가리역사공원센터를 통해 유적지로 들어선다.

 

주요 유적으로는 왕족의 주거지인 남내곽(南內郭)과 북내곽(北內郭), 그들의 무덤인 북분구묘(北墳丘墓) 등이 있다. 요시노가리 유적을 복원하고 대중들이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2001년 요시노가리역사공원(吉野ケ里 歴史公園)이라는 테마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요시노가리역사공원센터

 

 

 

 

 

 

여기서 잠시 일본의 선사시대를 살펴본다.

 

기원전 약 1만 년 전 구석기시대를 지나 새끼줄 모양의 무늬가 있는 토기를 사용한 조몬시대(縄文時代 : 기원전 1만 년경~기원전 300년경), 청동기와 철기 등 금속기가 사용되고 벼농사 등 농경생활이 널리 확대된 야요이시대(弥生時代 : 기원전 300년경~300년경), 그리고 고분이 만들어지고 정치적 통일이 시작된 고분시대(古墳時代 : 300년경~710년)로 구분한다. 고분시대의 후기는 문헌을 남긴 역사시대로의 변환기이자 원사시대(原史時代)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300년 경부터 기원후 3세기경까지 보다 간결한 토기, 뛰어난 무기 등을 포함한 청동기나 철기 제품, 그리고 계획적인 벼농사가 큰 특징인 야요이문화(弥生文化)는 일본의 최초 문명으로 원사시대, 고대시대로 이어지는 역사 발전의 기초가 되었으며 일본의 농경 중심의 생활양식의 토대가 되었다.

 

 

 

역사공원 동쪽 출입구. 다리를 건너면 요시노가리 유적지로 들어서게 된다.

 

 

 

 

 

 

'요시노가리(吉野ケ里)'는 '좋은 들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 작은 강을 건너 얕은 구릉 위로 펼쳐진 유적은 사방으로 좋은 들판을 거느리고 있는 명당으로 보인다.

 

 

 

 

 

 

물오리나무일까. 물이 오른 수꽃은 봄기운을 가득 머금고 꽃술을 내밀고 있다. 

 

 

 

 

 

 

대나무 잔가지를 엮어서 만든 멧돼지상이 눈길을 끈다.

 

 

 

 

 

 

목책과 함께 보이는 망루...

 

수렵채취시대의 원시 공산사회로부터 벗어나 정착 농경생활로 부를 축적한 야요이인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진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먼저 전시실에 들러 야요이인들의 문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야요이 토기

 

 

 

 

 

서민의 의복과 상류계급의 의복

 

 

 

 

 

여성 유골 양팔에 착용된 팔찌 모습

 

 

 

 

 

옹관(甕棺)

 

 

 

 

 

동검 배치도 등 무덤 유적 배치도

 

 

 

 

 

동검과 관옥이 출토된 옹관 모형

 

 

 

 

 

야요이시대 토기들

 

 

 

 

 

 

그런데 이 야요이 문명은 한반도 남부에 살던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문명이라고 한다.

 

중부 중국의 벼농사는 기원전 450년 경부터 한반도로 전해졌고, 기원전 3세기 한반도 남부로부터 규슈로 집단적으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벼농사 기술과 함께 금속기와 직물 기술도 함께 전해지고 이는 곧 일본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세토(瀨戶) 내해(內海)를 통해 긴키(近畿)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기원 원년 즈음에는 간토(關東) 지방에서 도호쿠(東北) 지방 남부로, 2~3세기에는 도호쿠 지방 북부로까지 확산되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

 

 

야요이 시대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 약 600년간 지속되었다. 일본은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 식량을 채취하는 단계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농경 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토기가 최초로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야요이(彌生) 문화라 부른다. 

 

벼농사 기술은 생산을 증대시키고 빈부와 신분의 차를 낳고 농촌 공동체를 정치집단화시키는 등 획기적인 사회변화를 야기했다. 또한 농경에 따른 신앙, 의례, 풍습 등도 널리 전파되며 이 시대에 일본문화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개간과 농업용수를 위한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어 집단화가 진행되었고 대형화된 집단 사이에서 부와 경작지, 수리권(水利権) 등을 둘러싸고 싸움이 발생하며 각지에 작은 나라가 생겼다. 작은 나라들이 다투는 가운데 3세기 중엽에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여왕 히미코가 즉위하며 소국들의 전쟁은 그치고 평화가 찾아온다.

 

 

 

전시실 앞쪽에는 4개의 망루(物見櫓)와 왕들의 집, 취사장 등 왕(또는 지배자)들의 주거 공간을 포함한 20여 동의 남내곽(南內郭)이 복원되어 있다.

 

 

 

남내곽 - 왕 또는 지배자들의 거주 공간

 

 

 

 

 

 

야요이시대 전기에는 요시노가리 구릉 일대에 분산적으로 마을이 들어서고 남쪽 일대에 환호(環濠) 취락이 출현하고, 야요이시대 중기에는 구릉 남족을 두르는 큰 환호가 만들어지고 수장을 매장하는 분구묘와 옹관묘열이 나타난다.

 

야요이시대 후기에는 대규모의 이환호가 만들어지고남내곽, 북내곽이 조성되어 망루와 제전 등 대형 건물을 갖추게 된다. 그러니까 주요 유적은 야요이시대 중기와 후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인(大人)의 집

 

 

 

 

 

망루(物見櫓)

 

 

 

 

 

※ 북내곽, 북분구묘, 중간마을

 

 

 

 

 

 

중간마을을 지나 북분구묘(北墳丘墓)로 향하는 길.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군은 각종 창고, 오른쪽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높은 건물군은 북내곽(北內郭)이다.

 

 

 

 

 

창고군

 

 

 

 

 

직물 창고

 

 

 

 

 

옹관묘열(甕棺墓列) - 일반인의 무덤 

 

 

 

 

 

역대 왕의 무덤인 북분구묘(北墳丘墓)와 사당 

 

 

 

 

 

 

무덤 앞에는 무덤길인 묘도(墓道)가 패여 있고, 사당 뒤에는 기둥=입주(立柱)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조상의 영혼이 잠든 기둥(祖先の霊が宿る柱)이다. 

 

 

 

사당(祀堂)

 

 

 

 

 

북분구묘 보존관 입구

 

 

 

 

 

 

북분구묘는 약 2100 년 전 역대 왕이나 그에 버금 가는 신분의 사람의 무덤으로, 14기의 옹관이 출토되었다. 그 중 1기에는 청동검과 유리관옥이, 7기에는 청동검이 부장되어 있었다.

 

 

 

 

 

재현한 청동검

 

 

 

 

 

옹관 매장 모형

 

 

 

 

 

 

 

마지막으로 북내곽(北內郭)...

 

요시노가리 유적 중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왕(또는 지배자)이 정사를 돌보거나 조상에 대한 제의를 거행하던 공간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동제전(東祭殿)

 

 

 

 

 

망루(物見櫓), 고상주거(高床住居)

 

 

 

 

 

주제전(主祭殿)

 

 

 

 

 

 

이렇게 바쁘게 요시노가리 유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들판 한가운데 혓바닥처럼 길게 벋어있는 아담한 구릉에 자리잡은 야요이시대의 환호 취락, 하마터면 공단이 자리잡을 뻔했던 곳에 아름다운 환경친화적인 역사공원으로 탄생된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더구나 유구 유적을 근거로 건물까지 복원하여 놓으니  친근감이 들고 2000여 년 전의 문화와 역사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벌써 4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다음 여행지인 야나가와를 향해 남쪽으로 달린다.

 

 

 

※ 덧붙임 : 이 글을 포스팅하며 자료 공부를 하다 4세기 백제 근구수왕 때 일본에 학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를 기리는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 이 바로 이요시노가리 유적 북쪽 1km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유가 없는 일정이라 미리 알았더라도 가볼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그냥 지나친 것이 아쉽다. 백제의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천자문'과 유교 경전인 '논어'를 처음으로 일본에 전하여 일본에서는 왕인박사를 학문의 신으로 모신다. 후쿠오카에는 그의 후손으로 알려진 스가하라 미찌자네(菅原道真)를 학문의 신으로 모신 다자이후천만궁이 있다.

 

 

 

 

 

※ 요시노가리 역사공원 지도

 

 

 

 

 

 

※ 요시노가리(吉野ケ里) 유적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최대의 환호(環濠) 취락과 독널무덤(甕棺墓) 유적이다. 공업단지 조성계획 일환으로 1986년부터 4년 7개월간 발굴조사 되었는데, 지금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어 역사공원으로 복원 정비되었다.

B.C. 3세기경 야요이시대 전기 초에 구릉 남단에 조성된 환호는 폭 2~3m, 깊이 2m의 단면 V자형으로 남~북 200m, 동~서 120~160m의 크기를 갖고 있다. 야요이 중기에는 총연장 1㎞ 이상, 최대 폭 6.5m, 깊이 3m의 환호와 목책으로 둘러싸인 대규모 환호취락이 조성되었다. 후기로 오면 앞서의 호를 외호(外濠)로 삼아 그 안쪽 거의 중앙부 구릉 정상에 남~북 150m, 동~서 70~80m의 내호(內濠)가 만들어져서 취락의 중심부를 형성하였다.

또한 내호 안 북서쪽에 별도의 구(溝)로 둘러싸인 10,000㎡의 남내곽(南內郭) 구역 안에는 신분 높은 사람이 거주하는 움집자리(竪穴住居址)와 고상(高床) 굴립주건물지(掘立住居址)가 조사되었다. 그러한 내호의 한쪽으로 특히 조망하기 좋은 돌출부와 입구 가까이에는 별도의 고상 굴립주건물터가 확인되어 삼국지(三國志) 왜인전(倭人傳)에 나오는 ‘루관(樓觀)’이라는 이름의 망루를 연상시킨다.

또한 야요이시대 후기 말에 북쪽에 치우쳐 2중환호로 둘러싸인 3,000㎡ 범위의 북내곽(北內郭)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3×3칸의 12.5×12.5m의 대형 굴립주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직경 40~50㎝ 정도의 굵은 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이 건물은 일종의 거관(居館)으로 추정되는 바, 이 건물이 들어선 북내곽은 요시노가리 전체 취락의 중추부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인다.

원형(圓形), 방형(方形)의 돌출부가 있는 2중호의 여러 지점에 망루로 보이는 굴립주건물터가 확인되고, 입구 통로는 열쇠모양으로 책렬(柵列)이 보강되어 경계 방어시설이 더욱 강화된 것임에 더욱 그러하다. 한편 외호 서쪽 다소 낮은 곳에는 고상 창고터가 21기 조사되었는데 거의가 1×2칸의 여섯 기둥건물로 이루어졌으며, 이 고상 창고터에서 취락 내부로 들어가는 외호의 지점에 육교가 놓이고 문기둥터가 확인되었다. 남쪽 환호 끄트머리 부근에서는 청동기 주조와 관련된 직경 8m 정도의 대형 토광이 조사되었는데, 그 주변에서는 동검(銅劍), 동꺾창(銅戈), 파형동기(巴形銅器) 등의 거푸집(鎔范)이 주석덩어리와 함께 발견되어 이곳에 공방(工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은 외호(外濠) 북쪽과 남쪽의 안쪽 가장자리에 2기의 분구묘(墳丘墓)가 있는데, 2,000여 기의 거대한 독널열(甕棺列) 매장유적과는 떨어진 위치에 있어 지배층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남쪽 분구묘는 거의 파괴되고 잘 남아 있는 북쪽 분구묘를 살피면 남~북 약 40m, 동~서 26m이상으로 평면 장방형(長方形)에 근접한 것이다. 분구는 판축기법으로 성토(盛土)하여 원래 4.5m 이상의 높이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14기의 성인용 독널(甕棺)이 조사되었는데, 그 중 8기의 독널에서는 동검 각 1점씩이 부장되어 있어 일반 독널무덤과 차별되고 있다. 분구묘 주위에는 제사용토기를 매납한 대규모 제사유구가 수 개소 확인되었다.

이처럼 요시노가리 유적은 40㏊에 걸친 면적에 외호와 내호가 조성되고, 그 안에 별도의 수장층 구역이 있으며, 주변으로 망루, 고상창고(高床倉庫) 등이 있어 국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전의 중심 읍락, 혹은 도시의 출현을 고고학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한국계의 청동기와 무문토기가 나와 한국의 세형동검집단의 일본으로의 진출과정을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환호(環濠)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환호마을로는 울산 검단리 유적, 울산 천상리 유적, 창원 서상동(남산) 유적, 부여 송국리 유적, 대구 동천동 유적, 진주 대평리 옥방1지구 환호마을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환호에는 토루(土壘)와 더불어 목책(木柵)도 함께 사용되기도 하는데 진주 대평리 옥방1지구 환호마을 유적이 그 예이다. 그리고 환호 안에 망루의 기둥구멍〔柱穴〕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확인되기도 하는데 청동기시대의 창원 서상동 유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환호에 대해서 주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하기 위한 기능을 가졌다는 견해, 뱀이나 야생동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라는 견해, 환호가 둘러싼 마을을 그 외부와 구분하는 심리적·상징적 경계선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환호는 본래 이러한 기능을 모두 수행했다고 여겨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러한 기능 중 일부만 수행했었을 수도 있다.

농경의 본격화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와 잉여생산물의 출현, 대규모 고인돌군과 차별화된 묘역과 무덤의 축조, 청동기를 포함한 차별화된 위세품(威勢品)의 사용 등으로 특징되는 청동기시대에는 점차 지역별로 영향력 있는 수장(首長)의 등장이 암시된다. 이와 동시에 구릉성 및 고지성 마을의 등장, 돌화살촉〔石鏃〕과 돌검〔石劍〕 등 무기류의 등장 등은 당시 일정한 사회적 긴장상태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따라서 환호는 농경의 본격화와 심화 등을 경제적 토대로 하면서 사회분화가 진행되고 그 과정에서의 각종 사회적 긴장관계의 출현 속에서 만들어진 유구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