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실크로드(7) 위구르왕의 쿠처왕부, 위구르 민속공연

모산재 2014. 7. 22. 21:30

 

타클라마칸 사막을 다녀온 다음 저녁식사를 위해 쿠처왕부의 찬청(餐廳)으로 향한다.

 

쿠처왕부는 쿠처대사(청진사)의 뒷골목에 자리잡고 있다. 18세기 중반 청 건륭제로부터 회왕에 봉해진 후 200여 년 12대왕까지 존속한 위구르 왕의 궁이다.

 

 

 

※ 쿠처 시내 안내 지도(구글맵 참조)

 

 

 

 

쿠처강에서 놀고 있는 꼬마들 모습

 

 

 

 

 

 

12대 위구르왕은 81세로 생존해 있다고 한다. 물론 공산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왕의 지위와 권력도 사라졌지만, 지금은 중국 정부의 협조자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찬청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사람은 우리 일행이 거의 전부다. 식사를 마칠 때쯤 위구르 민속 공연이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위구르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는 무대에 적혀 있는 한문 구절이 눈길을 끈다.

 

"비단길을 달리고, 구자국을 여행하고, 쿠처 왕부(王府)를 관람하고, 민족 가무를 보고, 왕부 가연(家宴)을 즐기고, 왕부 객잔에서 머물러라."

 

쿠처 왕부가 관광 상품의 하나가 된 듯하다. 

 

 

위구르 특유의 경쾌함과 발랄함, 그리고 우아함이 음악과 춤에 짙게 배어 있다. 춤은 가볍고 우아하며 빠른 회전과 변화무쌍한 동작을 보인다.

 

 

 

 

 

 

쿠처는 음악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 시절에는 쿠처악이 유행하였다고 하는데,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의 관현악 수준이 높다고 기록하였고, 당나라 조정에는 쿠처인들로 구성된 궁중악단이 있었다. 당현종은 쿠처의 타악기인 갈고의 명수였다고 하며, 쿠처의 악기는 고구려와 신라에도 전래되었다. 특히 현악기인 류트는 중국의 비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위구르인들은 춤과 음악을 즐겨 다양한 악기와 음악을 전하고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위구르의 전통 음악 '12무카무'는 노래, 춤, 민속과 고전음악을 포괄하고 있다. 무카무의 노래는 시, 속담, 설화, 역사의 목격담, 위구르 사회의 현대 생활 등 광범한 양식을 보여주고 다양한 악기를 사용한다.

 

그리고 두 줄로 된 현악기인 두타르(dutar)는 위구르인 집에 비치되어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하며, 손으로 치는 북인 따푸(達甫), 5현으로 된 현악기 라왑 등의 민속 악기가 전하고 있다.

 

 

 

 

 

 

공연이 끝난 다음 느닷없이 나를 불러내는 바람에 즉석으로 위구르 춤을 추게 되었다. 공연을 보면서 느꼈던 것을 갑자기 몸으로 표현하자니...  

 

 

 

 

 

 

식사를 마친 다음 쿠처 왕부를 잠시 돌아본다.

 

 

 

왕부의 청진사(이슬람사원)

 

 

 

 

 

 

쿠처왕부에는 '쿠처원세습회부친왕부(庫車原世襲回部親王府)'라 새겨 놓았다. '친왕(親王)'은 황제의 아들이나 형제를 일컫는 말이니, '청나라 황제가 쿠처 일원을 다스리게 한 세습 위구르왕'이라는 뜻이다.

 

청 건륭제 이후 12대에 걸쳐 약 190년간의 위구르왕이 재임했던 곳이다. 

 

 

 

 

 

 

 

쿠처 왕부는 1759년 위구르족이 대호자, 소호자(大小和卓)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위구르인 미자르를 치하하여 세습 왕으로 인정하면서 세운 것이다.

 

성내의 방과 성벽만 남아 있었으나 2004년 쿠처현 정부가 1,300만 위안을 투자하여 12대 위구르왕이었던 다우티 마이허쑤티의 기억을 토대로 원래의 위치에 복원하여 건축한 것이다. 2008년부터 구자박물관(龟兹博物馆)도 이곳으로 이전되었다고 하는데, 왕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존재임을 확인해 주는 듯하다.

 

 

 

 

 

 

쿠처 왕부가 위구르인들에게는 썩 유쾌한 존재는 아닐 듯하다. 쿠처왕부는 청나라와 중국과는 늘 협조의 관계 속에서 명맥을 이어 왔으니까...

 

1755년 건륭제는 몽골계의 준가르가 크게 발호하자 정벌에 나선다. 당시 준가르의 지배 하에 있던 카슈카르의 큰 호자 부르한 웃딘과 작은 호자 자한이 청의 정벌에 호응하였다(호자는 원래 '귀인'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로 마호메드의 후예와 교학자를 가리키는 말). 그러나 준가르가 평정되자 이들은 청에 맞선다. 1758년 자한은 쿠처 부근의 전투에서 조혜(兆惠)의 청군에 대패하였는데, 이 때 위구르의 우두머리인 미자르가 청군을 도운다(이 때 자한의 첩이었다고 알려진 향비가 사로잡혀 건룽제에게 보내진다). 이에 청은 공로를 인정해 미자르를 보국공으로 봉하고 쿠처·악수·배성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그 지위를 세습하게 하였다. 

 

세월이 흘러 1826년, 부르한 웃딘의 손자 자한기르가 독립을 꾀하였다. 그러자 청군은 즉각 진압에 나섰는데, 이때 미자르의 후손인 이스하크가 청을 도왔다.(호자 가문과 쿠처 왕부의 악연... 쿠처 왕부는 결국 위구르를 배반한 왕부가 아닌가.) 청 도광제는 이스하크를 군왕으로 봉하고 1828년 이슬람 양식의 왕부를 짓게 하였다.

 

그렇게 쿠처 왕부는 명맥을 이어왔고, 신해혁명 후 국민당 정부는 10대 군왕 메흐메트를 친왕(親王)으로 인정하였고, 11대 군왕 메흐푸즈는 위구르, 중국, 러시아 양식을 혼합한 왕부를 재건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강의 군벌 성세재에 의해 구금되었고, 메흐푸즈 사후 그의 조카 다우티(達吾提)가 뒤를 이었지만 공산당 정권 수립으로 쿠처 왕부는 끝났다. 이후 다우티는 중국 정부의 협조자로 쿠차현 정협 부주석 겸 인민대표회의 대표로 활약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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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구르의 역사

 

658년 당은 쿠처에 안서도호부를 두었지만, 남쪽의 토번과 북쪽의 돌궐이 이에 대항했다. 8세기 중엽부터 중국은 명목상의 권한만 갖게 되었으며, 790년에는 그것마저도 잃어버렸다. 9세기에 위구르 제국이 붕괴된 뒤 위구르족은 투루판 지역에 정권을 세웠는데, 이 나라가 결국 쿠처를 지배하게 되었다. 중세에 쿠처는 위구리스탄의 일부였다. 중국이 이곳을 다시 지배하게 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위구르인은 불교를 믿다가 다른 튀르크계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11세기 경부터 이슬람교로 개종하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 이르면 현재의 동투르키스탄 전체가 이슬람화하게 된다. 그로부터 호자라는 가문이 신정일체의 체제를 유지하게 되는데, 17세기에 들어오면서 호자 가문에 분열이 일어나 백산당과 흑산당으로 나뉘어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권력 투쟁헤서 패한 백산당의 거두인 아팍 호자는 티벳으로 망명해서 달라이 라마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준가르의 갈단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게 된다. 갈단은 1680년 아팍 호자를 앞세우고 천산산맥 남쪽으로 넘어오게 되고 위구르는 그로부터 70년간 몽골 지배에 놓이게 된다.

아팍 호자의 후손들의 통치가 계속되던 중, 1759년, 만주족의 중국 정복 왕조인 청나라의 건륭제는 동투르키스탄에 대한 정벌을 단행했고, 이후 동투르키스탄은 청의 영토가 되었다. 청은 일단 동투르키스탄의 통치를 확립한 뒤에, 이 지역을 신강(新疆)이라고 이름 붙이고, 지역의 부족장을 벡(伯克)으로 임명하여 이슬람 주민을 통제하였다.

그리고 청에 의해 준가르를 비롯한 몽골 국가들이 무너지자 위구르인들은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려고 한다. 하지만 이어 쳐들어온 청군에 단결하여 싸우지 못하고 분열하여 모두 몰락하고 만다. 아팍 호자의 증손자이자 '호자 형제'라는 별명을 가진 부르한 웃딘 호자와 칸 호자 형제는 위구르군을 이끌고 청군에 맞서 싸우지만 패배하여 서쪽의 카슈가르와 옐켄까지 밀린다. 1759년 여름, 마지막 근거지인 카슈가르에서 도주한 호자 형제는 인도로 도망가기 위해 무리 4,000명을 이끌고 파미르 산중으로 도망갔다가 청군에 잡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청의 지배시기 동안 위구르인들은 무려 42차례의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1820년에는 '호자 형제' 부르한 웃딘 호자의 손자인 자한기르 호자가 파미르를 넘어 진격하였다. 1826년, 자항기르는 그를 따르는 백산당의 무리를 이끌고 카슈가르를 함락하고 옐켄, 호탄 등의 도시를 정복했지만, 청의 대규모 지원군에 패배하고 이듬해 파미르 산중에서 붙잡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19세기 중반, 청이 혼란에 빠지면서 위구르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저항했으며, 카슈가르로 넘어간 자한기르 호자의 일족은 청을 상대로 한 성전을 부르짖었다. 1864년 동투르키스탄 각지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통해 위구르인들은 동투르키스탄에서 청의 관료들을 몰아낸다. 그리고 청은 이 지역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독립 이후 동투르키스탄은 반란 세력 사이의 주도권 다툼으로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서쪽 중앙아시아의 코칸드 칸국에서 넘어 온 야쿠브 벡이 아팍 호자의 후예를 군주로 세워 카슈가르를 근거지로 다른 세력들을 평정하고 일곱 도시의 나라라는 뜻의 예티샤르(카슈가리아 왕국)를 세운다. 예티샤르는 카슈가르, 옐켄, 호탄, 아커쑤, 쿠차, 쿠얼러, 투르판 등을 아우르는 위구르의 통일국가였다. 1872년에는 러시아 제국, 1873년에는 오스만 제국, 1874년에는 영국에게 독립 국가임을 인정받았다.

이에 청은 좌종당에게 군사를 주어 예티샤르로 진격하게 했다. 주변국들은 당시 위구르가 서양에서 지원받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야쿠브 벡은 지나친 이슬람화 정책으로 당시 현지에서 신망을 잃고 있었다. 터키계국가들은 현재도 그렇지만, 이슬람교 근본주의에 알레르기를 보이는데, 야쿱벡은 탈레반식 정책을 밀어붙였고, 민심은 청나라측에 기운다. 야쿱벡은 패배하여 중앙아시아 깊숙히 갔다가 야쿠브 벡은 급사하고, 예티샤르는 청군에게 정복당했다(1876년). 야쿱벡의 미성년자 아들들은 청나라에 잡혀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조정 자체가 붕괴하면서 위구르는 1930년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임시정부(제1차)를 세우고 다시 독립을 선언했으나, 후에 국민당 소속의 한족 군벌인 성세재가 이를 진압하고 이곳에 진주하였다. 중국 내에서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4년 위구르는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한다. 하지만 공산당의 승리가 확정된 1949년, 위구르 내부에 이견이 생기게 되면서 공화국의 주석은 중국과의 연합을 선언하고 부주석은 터키로 망명을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이곳은 중화민국의 영역이 된다.

 

 

 

 

쿠처왕부를 돌아보고 난 다음 호텔로 돌아와 씻은 뒤 휴식 시간을 가진다.

 

 

오늘 밤은 밤새 기차를 타고 카스로 가게 된다. 11시 50분 호텔에서 나와 가까운 금교초시(金桥超市) 앞 광장 야시장으로 간다. 양꼬치를 안주로 신장 맥주를 마시며 기차를 탈 시간까지 두어 시간을 보낸다.

 

 

 

 

 

 

새벽 2시 50분, 카스행 기차는 출발하였다. 쌍층경와(双层硬卧).

 

출발 후 도사님과 식당 칸에서 오이볶음, 삶은 땅콩 주문하여 준비한 술(바이주) 마신다. 나중 현옥, 강리, 현삼 합류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기차 여행의 무료함을 달랜다.

 

 

5시경 잠들었다 8시 반경 일어난다. 카스역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