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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만 여행

실크로드 (8) 카슈가르, 위구르인의 성지 향비묘(아팍호자의 묘)

by 모산재 2014. 7. 23.

 

08. 02. 카슈가르

 

"카슈가르에 오지 않으면 신장에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不到喀什 不算到新疆)."

 

향비묘를 가리키는 도로 안내판에 씌어 있는 글귀다. 그만큼 카스(카슈가르)는 위구르인들 삶이 짙게 배인 도시요, 위구르인들의 정신적 고향과 같은 곳이다. 신장 위구르의 성도는 우루무치이지만 우루무치는 한족이 대다수를 차지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중국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은 오아시스의 도시 카슈가르는 '옥(玉)의 도시'라는 뜻을 가졌다. 기원 전 2세기 한나라 때는 소륵국(疏勒國)이라 불렸다. 천산남로와 북로가 만나는 실트로드의 요충지로 동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곳이다. 전체 인구 중 75%가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족이다.

 

카슈가르는 위구르인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곳이다.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당의 지배를 받다 11세기 이후 투르크, 티무르왕조의 통치를 받았고 16세기에는 카슈가르 한국의 수도였다가 다시 청에 정복당한 도시. 19세기 반청(反淸)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 위구르인들의 소도시로 남았다.

 

 

 

새벽 2시 50분에 쿠처에서 출발한 기차는 정오가 다 되어갈 무렵에 카스에 도착하였다.

 

 

카스역

 

 

 

치니와크 호텔(其尼瓦克賓館)에 짐을 풀고 잠시 쉬다가 '향비(香妃) 묘'로 알려진 아파크 호자 묘로 향하였다. 카스시의 동북쪽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아파크 호자(和卓) 묘, 도로 안내판에는 '향비고원(香妃故園)'이라 적혀 있다.

 

 

 

오아시스 도시답게 하늘을 찌를 듯한 백양이 늘어선 입구를 지나 묘원 정문에 도착한다.

 

 

 

 

 

정문 왼쪽에는 열주가 늘어선 그리스 로마 신전 같은 건물이 보이는데, 고저사원(高低寺院)이라는 모스크다. 여름에는 뒤에 있는 위쪽사원을, 겨울에는 입구 쪽의 작은 사원을 예배처로 사용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늘어선 목재 기둥들이 정교한 조각과 단청이 입혀져 있어 눈길을 끈다.

 

 

 

정문을 들어서니 인도의 타지 마할을 연상시키는 모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다.

 

 

 

 

 

능묘의 네 귀퉁이에는 탑루(미나레트)가 솟아 있고 지붕은 구형의 첨탑이 솟아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녹색과 황색의 타일이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점이다. 타일은 유리로 된 것이라 한다. '녹색타일의 왕궁'이라는 뜻을 가진 카슈카르라는 도시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궁륭식 지붕은 직경이 16m, 높이 24m라고 한다. 

 

이 능묘는 아팍 호자(1622~1685)에 의해 1640년에 짓기 시작하여 1693년에 완성되었다. 능묘 주변에는 신장의 현존 최대 고묘지(古墓地)로 주변에 대예배당, 소예배당, 강경당(講經堂)이 자리잡고 있다.

 

 

 

 

 

이 묘를 아팍호자마찰(阿巴克霍加麻札)이라 부르는데, 그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5대에 걸친 72명의 가족들의 능묘이다. 호자(和卓=霍加)는 '마호메트의 후예'라는 뜻으로 이곳 사람들은 '존자(尊子)'의 의미로 사용하는 말이고 마찰'은 위구르어로 능묘라는 뜻이다.

 

아팍 호자는 17세기 신장 위구르 지역 예얼창한국(叶尔羌汗国)의 백산파 정치 및 종교 지도자이다. 향비는 아팍 호자의 손녀로 알려지고 있다. 

 

1948년 지진으로 묘실이 파괴되었지만 1974년에 다시 복구하였다.

 

 

 

 

 

아팍 호자는 수피즘(Sufism)의 지도자였던 유명한 아마드 칸사니(1461~1542)의 증손자였고, 자신도 수피즘의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수피즘은 신에 대한 직접적인 개인의 체험을 통해 신의 사랑과 지혜의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이슬람의 한 신비주의 종파이다. 

 

카슈가르한국에서는 16세기 말부터 칸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대신 호자라는 이슬람 귀족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됐다. 17세기 초반 아팍 호자는 동투르키스탄(지금의 신장)의 강력한 지도자였으나 호자 가문이 카슈가르의 백산당(白山黨)과 야르칸트의 흑산당(黑山黨)으로 분열되어 대립하였다. 1678년 카슈가르한국의 마지막 칸인 이스마일은 카슈가르의 백산당의 우두머리였던 아팍 호자를 몰아내려 했고, 아팍 호자는 달라이 라마의 도움으로 준가르(準喝爾)의 갈단(爾丹)칸에게 원병을 요청하여 결국 1680년 카슈가르한국은 준가르의 보호령이 되었고, 아팍 호자와 그의 아들이 카슈가르의 군주가 되었다.

 

아팍 호자는 1694년에 죽었으며, 그의 아들 야흐야 호자에 의해 야르칸드 한국으로 계승되었지만 이듬해 피살되었다. 마지막 칸인 아크바쉬 칸이 즉위하여 준가르에 대항하려 했지만 1706년에 호자 가문에 의해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뒤인 1755년, 건륭제는 몽골계의 준가르가 크게 발호하자 정벌에 나선다. 당시 준가르의 지배 하에 있던 카슈카르의 큰 호자 부르한 웃딘과 작은 호자 자한이 청의 정벌에 호응하였다. 이들은 바로 아팍 호자의 증손자로 준가르가 평정되자 독립을 위해 청에 맞선다. 1958년 자한은 쿠처 부근의 전투에서 조혜(兆惠)의 청군에 대패하였고 웃딘과 자한은 파미르 산중에서 살해된다. 이 때 자한의 첩이었다고 알려진 향비가 사로잡혀 건륭제에게 보내진다. (이 때 쿠처의 위구르 우두머리 미자르가 청군을 도와 보국왕에 봉해진다.)

 

세월이 흘러 1826년, 부르한 웃딘의 손자 자한기르가 독립을 꾀하였다. 그러자 청군은 진압에 나섰는데, 자한기르 역시 파미르 산중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미자르의 후손인 이스하크가 청을 도왔다. 카스의 호자가문과 쿠처 왕부의 악연이 참 처절할 정도이다.) 

 

 

 

묘실 내부는 촬영 금지. 이 묘를 만든 호자의 묘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른쪽 구석에 향비의 묘가 있다.

 

 

 

 

 

향비에 대한 안내문은 철저히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향비의 이름을 '향기가 나는 여인'이라는 뜻의 위구르어 '이파르한'으로 소개하며, 역사상 실존 인물이고 아팍호자의 조카 손녀(great grandniece)라고 밝히고 있다. 1760년 건륭제의 애비로 들어와 35세에 용비가 되었으며 1788년 55세에 질병으로 죽었다고 하며, '서로 다른 민족의 통합과 서로에 대한 사랑에 대한 기원'을 나타내는 많은 이야기들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독일 잡지가 '위구르 여인과 황제의 사랑이 서로 다른 민족 간에 위대한 통합의 위대한 증거'라고 했다며... 

 

 

위구르인들은 과연 '통합'과 '사랑'의 상징으로 받아들일까...?

 

 

 

 

 

향비에 대한 인적 사항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容妃(1734年10月11日-1788年5月24日), 霍卓氏(又作和卓氏), 维吾尔族人. 生于雍正十三年九月十五日, 阿里和卓之女. 清高宗时为和贵人, 容嫔, 容妃. 乾隆五十三年(1788)四月十九日卒, 享年55岁. 乾隆五十三年(1788)九月二十五日入葬清东陵之裕陵妃园寝

용비(1734~1788), 호자 씨로 위구르인이다. 옹정 13년 9월에 아리 호자의 딸로 태어났다. 청고종 때 귀인, 용빈, 용비가 되었다. 1788년 4월 55세로 죽었다. 9월 동릉의 유릉비원침에 장례를 치렀다.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

   

 

 

이파르한, 향비는 카스의 아팍 호자의 5대 손녀로, 야르칸트 지방을 지배하던 자한의 처였다. 건륭제가 준가르 정복을 위해 장군 조혜(兆惠)를 출정시키면서 절세미인인 그녀를 데려오도록 명했고, 조혜는 그녀를 사로잡아 건륭제에게 헌상하였다고 한다. 건륭제는 그녀를 후궁으로 삼고 총애하여 용비(容妃)로 칭했다. 그러나 항상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고 해서 향비(香妃)라 부른다. 이 향긋한 냄새는 그녀가 향기로운 사막대추 꽃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랍 기포드(Rob Gifford)의 <차이나 로드>에 따르면 향비는 은색 잎에 열매가 금색인 나무를 늘 그리워했다고 하는데, 건륭은 카슈가르에 사람을 보내 보리수나무 또는 은색 잎 모래 대추나무로 알려진 그 식물을 가져오도록 명했고 이에 향비는 만족해 했다고 한다. (이 나무는 보리수나무 종류로 대추는 아니나 열매가 매우 크며 대추 맛이 난다. 나중 카라쿨 호수로 가는 길에 만나기도 하였다. 학명은 Elaeagnus angustifolia. 흔히 '사막대추(沙枣)'라 부른다.)

 


향비를 위해 건륭제는 자금성 안에 이슬람식 궁궐을 지어 거처하도록 했고, 위구르 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주도록 했으며 위구르 전통 복장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도 하였다.

 

건륭제는 이탈리아 선교사로 화가인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에게 향비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는데, 그 중 서양복장을 한 모습, 무장한 모습 등 2개의 그림을 궁궐 벽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투구를 쓰고 무장을 한 여성을 그린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향비는 위구르의 왕비로 자색이 뛰어난 인물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내가 나, 그 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향비라 불렀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북경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위구르 지역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신장 위구르을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

 

 

그녀의 궁정 생활이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궁정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그리워했고, 두고 온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황제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정절을 지키려 늘 단도를 몸에 품고 다녔다고 한다. 이는 '니시풍아시사(你是風我是沙 : 당신은 모래, 나는 바람)'이라는 테마곡과 함께 위구르 청년 몽단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황제의 딸'이라는 드라마로도 그려졌다.

 

결국 그녀는 자금성 안에서 29세의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녀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황제가 궁궐을 비웠을 때, 황태후가 향비를 불러 소원을 묻자 죽는 것 뿐이라고 말해서 자살을 명했다고도 하고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 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 속의 향비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정복자에 대한 위구르인들의 저항 정신을 담고 있다.


게다가 향비가 죽은 뒤 124명의 카슈가르인들이 3년 반이나 걸려 북경에서 카슈가르까지 향비의 시체를 운구하여 왔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면 향비에 투영된 위구르인의 민족적 자존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향비묘는 맨 뒤 붉은 천에 노란 끈으로 장식한 것. 'Yiparhan'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

<출처 :http://www.dailian.co.kr/news/view/142080>

 

 

향비 시신을 운구했다고 전해지는 가마

 

 

하지만 중국의 기록에는 용비(容妃)가 하북성 유릉비원침(裕陵妃園寢)속에 잠들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릉비원침에는 36명에 이르는 건륭제의 여러 여인들과 함께 잠들어 있는데 향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위의 이야기와는 달리 향비는 궁궐에 들어온 후 황제와 태후의 총애를 받아 용비에까지 이르렀다. 1758년 카슈가르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삼촌과 오빠가 반란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그 공을 인정해 보국공으로 관직을 하사받하고 향비는 귀인으로 격상되었으며 1768년에는 용비(容妃)라는칭호를 부여받았다. 그녀는 황제가 지방 순시할 때 동행할 정도로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황실 생활도 위구르족의 전통 옷을 입고 이슬람 전통에 따라 생활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29세에 죽어 카슈가르에 가서 묻혔다는 이야기와 달리 58세에 병으로 죽어 하북성 동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향비묘 정원에 피어 있던 풀꽃

 

 

 

아팍 호자의 묘 뒤쪽 정원은 위구르인들의 묘들이 가득 차 있다. 그 무덤 중에는 파헤쳐진 무덤이 하나 있는데 청나라군이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불태웠다고 한다. 위구르 사람들은 그 무덤을 야쿱 벡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9120>

 

 

야쿱 벡은 1864년부터 1876년까지 10년 남짓한 기간 청나라에 반기를 들고 위구르 독립 정권을 세운 인물이다. 청나라가 정벌에 나섰지만 주변 열강들도 우수한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야쿱 벡이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전역을 휩쓸 정도로 강력한 힘을 자랑했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인 이슬람화 정책으로 민심이 돌아서고 야쿱 벡이 급사하면서 청군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야쿱 벡의 자손들은 거세당해 환관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