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실크로드(2) 쿠처, 키질석굴(커쯔얼천불동)

모산재 2014. 7. 17. 16:14

 

7월 31일, 7월의 마지막날. 

 

 

 

 

오늘 일정은 쿠처의 서쪽 70km 지점에 있는 키질석굴(克孜尔石窟)과 북쪽에 있는 천산신비대협곡, 그리고 쿠처 외곽에 있는 키질가하봉수대(克孜尔尕哈烽燧)를 돌아보는 것이다.

 

 

 

호텔 앞 정원 연못에 핀 하얀 연꽃이 피었다.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에서 아름다운 연꽃을 만나니 마음조차 환해진다. 오늘 키질 천불동 부처님 만나러 가는 것을 미리 환영받는 느낌이다.

 

 

 

 

 

 

 

 

9시 반 호텔에서 출발한다.

 

 

 

 

※ 쿠처지역 안내도

 

 

 

 

 

쿠처는 천산산맥의 남쪽, 타림분지 북쪽에 있는 인구 7만의 오아시스 도시다. 서유기에 '서량여국(西梁女國)'이라는 여인국으로 등장하는 곳, 무엇보다 혜초와 고선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키질 천불동의 조선족 화가 한낙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2세기 이후 구자국(龜玆國)은 중원의 정치 군사적 간섭에서 벗어나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 동서교역을 통해 번영을 이룩하였다. 당나라 초기에는 서돌궐에 복속하였으나 648년 당군에게 패하여 멸망하였다. 이후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고선지 장군이 서역 정벌 본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쿠처 지역에는 현재 쿠처고성, 수바시고성(蘇巴十古城), 키질가하봉수대를 비롯하여, 키질, 쿠무투라(库木吐拉), 심심(森木塞姆), 키질가하(克孜尔尕哈) 등의 석굴사원이 있다. 바미얀석굴로부터 비롯된 석굴사원 양식은 쿠처에 파급된 뒤 실크로드 북로를 거쳐 중국의 둔황 ·윈강 석굴의 모태를 이루게 된다. 특히 키질석굴사원 내부에 장식되어 있는 벽화에는 서방적 인도적인 요소가 잘 나타나 있어, 미술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중요하다.

 

 

 

 

시내를 벗어나지 않은 큰길가에 초라하게 무너져내린 쿠처고성이 보인다. 

 

수레와 당나귀 곁 전신주에 기대어 수박 세 덩이를 옆에 놓고 필짱을 낀 채 햇살을 피해 고개를 숙인 노인에게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저 수박을 사가려는 사람이 나타날까...

 

 

 

 

 

당나귀가 끄는 빈 수레 너머로 쿠처고성은 계속 이어진다.

 

 

 

 

 

<진서(晉書)>에는 3~4세기 무렵의 쿠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벽은 삼중으로 되어있다. 불사와 불탑이 천여개에 달한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에 종사하며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머리는 모두 목까지만 기른다. 왕이 사는 궁전은 마치 귀신이 쌓아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으리으리하면서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현장이 쓴 <대당서역기>에도 왕궁의 화려함은 신의 거처와 같고 외성은 장안성과 흡사하며 집들은 장려하다"고 했을 정도로 구자국은 번영했던 도시였던 것.

 

 

 

 

 

 

쿠처는 무엇보다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으로 기억된다.

 

다섯 차례의 원정을 통해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실크로드에 대한 당의 지배력을 확보한 고선지 장군의 군사적 근거지가 바로 이곳 쿠차였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4년 뒤 안록산의 난 때 결국 모함으로 참수당하고 만다. 그의 죽음과 함께 실크로드도 함께 빛을 잃게 되었지만, 고선지의 서역 원정은 이슬람을 거쳐 서구 세계에 제지술과 나침반 등을 전하는 계기가 되어 동서 문화 교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시내를 벗어나자 오아시스의 허파, 백양숲이 이어진다.

 

 

 

 

 

오아시스마을은 어디를 가든 백양숲이 우거져 있다. 백양은 빨리 자라고 따가운 태양빛을 반사하여 깊고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며, 무엇보다도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키질 석굴은 쿠처에서 서쪽으로 약 70여 km 떨어진 산악 계곡 속에 있다. 오아시스 지대를 벗어나자 메마른 사막이다.

 

시계가 흐려서인지 천산산맥은 보이지 않고 험한 산과 협곡을 구비구비 물결치듯 차는 달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메마른 험한 흙산을 넘어간다. 투르판 북쪽에 길게 벋어 있는 츠르타그산(雀爾達格山=却勒塔格山: '츠르타그' 또는 '초르타크'는 '황량한 산'이라는 뜻의 위구르 말)을 넘는 모양이다.

 

 

 

 

 

일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릴 것 같지 않은 고개에서 차는 멈추었다.

 

 

흙도 바위도 아닌 땅이 거칠게 솟아 있는 이 음산한 땅을 '마귀성'이라 부른단다. 바람이 불면 음산한 소리가 들리는 험한 지형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기념 사진을 찍는다.

 

 

 

 

 

 

 

마귀성을 지나자 이내 협곡으로 들어선다.

 

협곡을 흐르는 물은 마치 살얼음이 얼어 있는 듯(어쩌면 자취눈이 내린 듯) 하얗게 빛난다. 소금물이 흐르는 소금내다. 그래서 이 물을 염수구(盐水沟)라 부른다고 한다. 

 

 

 

그랜드캐년 같은 협곡과 굽이굽이 흐르는 소금내를 따라 차는 덜컹거리며 달린다. 현장법사도 이 길을 따라 구도의 길을 갔을 것이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하는 서유기의 모험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원시적이고 환상적인 길...

 

 

 

 

소금내를 끼고 난공불락의 성채를 이룬 듯한 이 절벽을 '포탈라궁'이라 부른다고 한다. 현지의 위구르인들은 '붉은 절벽'이라는 뜻의 '커쯔얼야산(克孜尔亚山)'이라고 부른다고도 하며, 이를 '훠싱산구(火星山谷)라 일컫는 사람도 있다.

 

 

 

 

 

갑자기 앞쪽으로 전복된 트럭이 보인다. 험한 길에서 충돌로 뒤집힌 모양이다.

 

 

 

협곡의 소금내를 벗어나자 갑자기 광막한 초원이 펼쳐진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다.

 

 

 

 

 

 

그리고 큰길에서 꺾어지며 계곡으로 들어선다. 쿠처에서 67km 떨어진 이 계곡을 '수게트(蘇格特) 계곡'이라 한다. 그 계곡으로 무자르트강(木札爾特江, 중국어로는 웨이간허渭干河)가 흐르고 황량한 츠르타그산(却勒塔格山)이 높이 솟아 있는 맞은편으로 밍우타그산(明屋達格山)의 절벽이 늘어서 있다.

 

 

 

바로 그 곳, 밍우타그산 절벽에 키질석굴이 있다. 입구에는 '배성커쯔얼 천불동(拜城克孜尔千佛洞)'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배성'은 천불동이 있는 현의 이름이고, '키질(중국식 발음은 '커쯔얼')'은 위구르어로 '붉은색'이란 뜻. 석굴이 있는 산이 햇살을 받으면 투르판의 화염산처럼 붉게 변한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석굴 앞에는 청동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쿠처 출신의 고승 구마라습(또는 구마라집 鳩摩羅什, 344~409). 1994년, 현장·법현과 함께 중국 3대 역경승(譯經僧)으로 추앙받는 구마라습 탄생 1천 65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구마라습은 인도 귀족 구마라염과 구자국 왕의 누이동생 기바 사이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처음에는 소승불교, 나중에는 대승불교를 공부하였으며, 불경 번역에 힘써 반야심경, 법화경, 금강경 등 35부 294책의 불경을 번역하였다. 구마라습은 열반에 들기 전 "내가 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나를 화장해도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과련 그의 혀는 타지 않은 채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키질 석굴은 둔황석굴, 룽먼석굴, 윈강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의 하나로 꼽힌다. 석굴 수도 많고 구조도 다양하며 벽화도 풍부하여 '실크로드 불교의 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석굴은 236개, 벽화는 75개 석굴에 남아 있는데 벽화 면적만 1만㎡에 이를 만큼 석굴 내부 전체가 벽화로 장식돼 있다. 이 가운데 일반 공개 석굴은 7개에 불과하며,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38개 석굴은 1인당 100위안의 관람료를 추가로 내야 볼 수 있고 불상이 있는 석굴은 500위안을 내야 한다.

 

키질석굴은 수게트 계곡의 위치에 따라 곡서구(谷西區ㆍ1호~80호, 신1호), 곡내구(谷內區ㆍ81호~135호), 곡동구(谷東區ㆍ136호~201호, 232호~235호), 후산구(後山區ㆍ202호~231호) 네 구역으로 나뉜다.

 

 

 

 

 

 

하지만 석굴은 역사의 격랑 속에서 크게 훼손 당한 상태다. 이란 사산왕조의 망명, 이슬람 압바스 왕조의 침공, 르콕과 스타인 등 서구열강의 탐험대, 일본 승려 오타니 일행, 홍위병 등에 의해 차례로 파괴되거나 도둑질 당했다. 르콕이 훔쳐간 유물은 2차대전 때 폭격으로 사라졌고, 일본 승려 오타니가 뜯어온 벽화 중 일부는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키질 석굴은 3세기부터 9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600년 동안 여러 왕조에 걸쳐 완성됐다. 모두 339개가 있는데, 벽화는 서역 기법을 많이 받아들였다. 여기에 중원 기법을 가미해 특유의 쿠처풍 벽화를 그려냈다. 7~8세기에 접어들어 소승에서 대승으로 옮겨가자 벽화 미술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키질 석굴 벽화는 초창기(3세기 말~4세기 중엽)와 발전기(4세기 중엽~5세기 말), 전성기(6~7세기), 쇠퇴기(8~9세기)의 4단계로 나뉜다.

 

둔황의 벽화가 세밀한 선묘가 뚜렷한 중화 양식이라면, 키질 벽화는 이란·인도 미술의 역동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서역 양식이다. 키질 벽화는 인도 간다라와 아프간 바미얀을 거쳐 들어온 그리스·로마, 인도, 이란풍 묘사법과 색채 감각이 쿠처의 지역성과 만나 새로운 벽화 양식을 만든 것이다. 중국 본토나 둔황에서 보기 힘든 관능적인 여인상, 푸른빛 화불 따위 도상들은 인도·이란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키질 벽화들은 전생도, 본생도, 인연도 등 석가의 생전, 전생 설화를 담은 것들이 많다. 특히 전생도, 본생도의 주요 장면 등을 석실 천정의 마름모꼴 윤곽 안에 넣고 표현한 것은 키질에만 주로 나타나는 표현법이다. 그리고 라피스라줄리(청금석)라는 몽환적인 푸른색 안료를 즐겨 쓰고, 중국과는 다른 붉은선의 명암 표현을 쓰면서 빛과의 조화를 의식한 것은 불, 빛을 중시한 이란 문화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석굴을 돌아볼 차례... 먼저 10호굴에 들른다. 촬영을 할 수 없으므로 다음의 자료 사진은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것들이다.

 

 

 

● 10호굴 - 조선족 화가 한낙연을 기리는 승방

 

벽화가 없는 승방굴로 난로 화덕과 함께 검게 그을린 천정이 눈에 들어온다. 문을 ㄱ자로 비틀어 사막바람 막고 있다.

 

이곳에는 한락연(1898~1947)이라는 조선족 화가의 초상화가 놓여 있다. 한락연은 독일인 르콕이 쓴 <신장문화 보고기>와 영국인 스타인이 쓴〈서역 고고기>를 보고 1946년 단신으로 키질 석굴에 와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 다음해 제자들을 데리고 와 굴에 번호를 매기고 모사·연구·기록·촬영·발굴 등을 진행했다. 그러나 1947년 비행기를 타고 란저우로 가다가 가욕관 상공에서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한락연은 항일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독립운동가 포상을 받기도 한 항일운동가이기도 하다.

 

 

 

● 8호굴 - 다이어몬드형 연속 무늬속의 불상, 비교적 잘 보존된 석굴

 

6~7세기 조성된 굴로 정면 불상은 대부분 퇴락하고 전실은 파괴되어 통로로 바뀌었다. 천정 불상부분 몸통 부분 훼손 도금 부분 도난 당한 흔적. 천장 가운데에는 안에서부터 태양신, 달신(月神), 화신(까마귀), 바람신(바람주머니), 달 주변의 흰 점들-별, 전설의 새인 공명조(共命鳥)가 한 줄로 길게 나란히 늘어서있다.

 

다이어몬드형 연속 무늬에 각각 파란색, 검정색, 녹색, 흰색을 차례로 채색하고 그 안에 각기 다른 수인과 표정으로 설법하는 부처님, 법을 구하고 듣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 놓았다. 금박을 입혔던 가사 부분은 훼손되어 있다. 왼쪽 천장은 아래쪽으로 이어지며 성불전 석가의 모습을 그렸고 아랫부분은 이슬람에 의해 거의 파괴되었다. 정면벽 상단 비천상은 아래는 훼손되었다. 후실 벽화는 독일인 르콕에 의해 도난 당하고, 사라수를 새긴 좌대만 덩그러니 남았다. 천정의 비천상도 도난 당하고 흔적만 남았다.

 

 

8호굴 주실 천장 벽화. 금박 입혔던 곳이 훼손되었다.

 

 

 

● 17호굴

 

보호용 처마가 있고 주불 벽화는 훼손되었다. 주불 화 위 패어진 돔형 천정이 있다. 위구르어 낙서가 있다. 

 

입구 벽 상단 미륵불, 벽화는 검은색으로 그리고 녹색 채색이다. 천정에는 말을 탄 부처, 태양신, 바람신이 그려져 있는데 안쪽으로는 훼손되었다. 대부분 부처의 전생과 윤회에 대한 내용으로 자신의 몸을 호랑이 먹이로 내 놓는 그림이다. 오른쪽 천정 아래쪽에는 선정에 든 앙상한 부처 모습. 왼쪽 하단 벽의 부처(보살)의 몸 부분은 대부분 훼손된 모습이다. 오른쪽 하단 벽은 대부분 훼손되고 시멘트 벽으로 처리했다. 후실로 이어지는 벽은 왼쪽은 훼손되고 오른쪽 입상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후실은 와불.

 

 

선정에 든 싯다르타

 

 

 

●27호굴 - 다감굴(多龕窟)

 

중심 동굴로 거의 다 뜯겨나갔다. 천정 화려한 연꽃 장식도 다 뜯겨진 모습이다. 입구 윗벽의 오른쪽 선명한 4위의 부처상이 아름답다. 검은색 선으로 그리고 얼굴과 몸은 흰색 채색, 얼굴 윤곽은 붉은색, 공간은 녹색. 중앙 미륵보살상은 사라졌다. 수미산 위에 앉은 부처상. 수행하는 석가를 4촌인 데바닷타가 돌로 내리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뒷벽의 윗부분에 89개의 작은 감(龕)이 열을 지어 있다. 설법을 듣고 있는 천인(天人)의 얼굴을 흰색과 검은색을 교차해서 입체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 32호굴

 

천정 안쪽 일부만 남고 거의 훼손. 인도풍의 부처(코 입술 귀), 혀가 길어 머리를 감을 정도. 손가락이 네 마디로 표현되어 있다.

 

 

 

● 34호굴

 

천정 안쪽 벽화만 남았다. 푸른색과 녹색 바탕의 부처상, 남북조 시대. 광물질 도료로 파란색은 청옥, 흰색은 석고, 붉은색은 산화되어 검정색으로 변하였다. 후실 비천상은 까맣게 그을려 있는데 유목민들이 취사하며 산 흔적이다.

 

 

 

● 38호굴

 

4세기에 조성되었다. 전실 양 벽에는 나팔이나 비파 등의 악기를 든 천인이 춤을 추고 있다. 전실 천장에는 바람신이 나체 여성으로 등장한다. 후실은 통로를 거쳐 열반도(涅槃圖)가 있다.

 

바다 속과 악기를 연주하는 천신, 바람을 다루는 풍신의 모습, 석가모니 열반도, 미륵보살 설법도, 본생담 등이 빼곡히 남아 있다. 특히 라피스라줄리(lapis-lazuli)라고 하는 안료는 청금석이라는 광물로 부터 얻은 것으로 세월이 흘러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입구 위쪽에 조성돼 있는 미륵보살 설법도에는 좌우에 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보살은 모두 남성으로 표현돼 있지만 우측 맨 끝의 보살상은 여성의 모습인데, '동양의 비너스'로 불리는 이 보살의 자태와 미소가 아름답다. 석굴 입구 양쪽에 있는 두 보살상은 구마라습 청동좌상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구마라습 스님이 살았던 시기에 이 석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미륵보살설법도 벽화 중 청법천인상(38호굴)

 

 

동자도인과 호랑이(38호굴)

 

 

천상도(커쯔얼석굴제38호벽화모사도)

 

 

능격본생과 인연고사(제38호 벽화 모사도)

 

 

 

 

2시경 석굴 앞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식사 전후 석굴 주변을 돌아보며 식물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메꽃 종류

 

 

 

 

홍류

 

 

 

 

박주가리과의 꽃, 은조롱을 닮았다.

 

 

 

 

 

키질천불동 앞에는 아름다운 연못을 조성해 놓았다. 기까운 곳에 흐르고 있는 웨이간허(渭干河)의 물을 담아 놓은 것.

 

 

 

 

 

 

 

 

 

가이드 허광 씨 '시간이 긴장해서' 쿠차 민속공연 관람은 내일로 미루겠다 한다.

 

 

 

 

석굴 앞 오른쪽으로 가면 천 년 고목이라는 뽕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또 조금 더 가면 골짜기 쪽으로 천루천千泪泉)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천 방울의 눈물 샘'이라니... 궁금하지만 미처 가보지 못했다.

 

나중에 확인하니 여기에는 천불동에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구자국의 아름다운 공주가 사냥을 나갔다 만난 목동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려 하였다.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한 부왕은 목동이 3년 안에 천 개의 동굴을 파면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한다. 3년이 되는 마지막날 999개의 동굴을 파고 하나만 남겨 놓은 채 목동은 쓰러져 죽는다. 목동의 시신을 안고 공주가 눈물을 흘린 자리에서 샘이 솟아 났다.

 

 

 

 

2시 50분 천산신비대협곡을 향해 출발한다.

 

 

 

 

 

 

더보기

※ 조선족 화가 한락연(1898~1947)이 그린 키질석굴 벽화의 모사도

 

 

한락연의 자취는 그가 발견한 10굴에 있는 그의 초상과 남긴 글들을 통해 더듬어 볼 수 있다.

 

“1946년 6월 5일에 도착하여 벽화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거기에는 고상한 예술가치가 있고 각지의 어느 동굴에서도 없는 것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 벽화는 외국의 고고학자들이 떼어갔다. 이것은 문화상의 커다란 손실이다…고대 문화를 발견하고 빛내기 위해 참관자 여러분은 특히 사랑하고 보호해주기 바란다.”

 

 

3·1운동 후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23년 공산당에 입당한 뒤 상하이, 우한 등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하던 한락연은 1929년 프랑스로 유학 가서 그곳의 신인상파와 다다 화풍에 영향받으며 유럽의 미술 유산을 섭렵했다. 귀국 뒤 국공합작을 도우며 선전화 등을 그리다 3년간 국민당 정부에 의해 투옥됐으며 43년 출옥한 뒤 실크로드 유산의 연구와 모사 작업에 나섰다. 수차례 키질과 둔황 벽화를 찾아 모사 및 발굴 연구에 매달리는데, 키질 벽화를 처음 모사했을 뿐 아니라 다른 실크로드 유적과의 차이점, 유산적 가치에 대한 논문도 먼저 발표한다. 헬레니즘풍의 감각적 회화로 인정받는 키질 석굴의 미술사적 가치를 처음 발견해내고 석굴 개수를 정리하고 번호표를 매기는 작업을 한 것은 바로 그의 업적이다. 47년 7월 란저우로 가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다

 

 

 

한낙연 자화상

 

 

설법하는 보살상과 기악비천(커쯔얼석굴 벽화모사도)

 

 

부처와 기락인(커쯔얼석굴 제118호 능형격자문 벽화모사도)

 

 

비구(커쯔얼석굴 벽화모사도)

 

 

백의신도(커쯔얼석굴 벽화모사도)

 

 

현악비천(커쯔얼석굴원15호 벽화모사도

 

 

천불(커쯔얼석굴 벽화모사도)

 

 

보살상(커쯔얼석굴 제80호 벽화모사도)

 

 

보살상(커쯔얼석굴 제67호 벽화모사도)

 

 

능격본생과 인연고사(커쯔얼석굴 제63호 벽화모사도)

 

 

수하관경(커쯔얼석굴 제227호 벽화모사도)

 

 

태양신-키질석굴 벽화모사도

 

 

태양신-키질석굴 벽화모사도

 

 

설법-키질석굴 벽화모사도

 

 

수하불상-석굴 벽화모사도

 

 

불상-키질석굴 벽화모사도

 

 

 

 

※ 쿠무투라석굴 21호실의 화려하고 섬세한 천정화

 

 

 

출처: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