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바이칼 여행

몽골 바이칼 여행 (12) 몽골 최대의 라마사원 간단사, 몽골 민속 공연

모산재 2014. 6. 8. 11:53

 

● 제 8일(8월 5일) 오후 / 울란바타르, 간단사-몽골국립자연사박물관-몽골 민속공연

 

 

 

 

복드 칸의 궁전과 박물관을 돌아본 다음 점심 식사는 한국 식당에서 칼칼하고 시원한 된장찌개를 맛나게 먹었다.

 

 

바쁠 것 없는 일정이라 느긋하게 쉬다가 라마불교 사원 간단사(甘丹寺)로 간다.

 

 

 

 

 

 

간단사는 울란바타르 시내에서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다. 변두리여선지 동네가 회색빛으로 우중충하고 가난의 냄새가 많이 풍긴다.

 

사원 마당으로 들어서니 비둘기들이 어지러이 날고 있는데, 꾀죄죄한 차림의 아이들이 우루루 달려든다. 비둘기 모이를 사라며... 일행도 많은데 하필 내게만 달라 붙는 아이들...

 

몽골의 최대 사원이라고 해서 기대가 컸는데, 다소 실망스럽다. 규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의 사찰처럼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기자기한 맛도 없다.  

 

 

 

 

 

정면에 보이는 바로 이 건물이 주법당인 관음전(미그지드 장라이시그)으로 내부에는 26m 높이의 관음대불이 모셔져 있다. 

 

건물 밑부분 2층은 성벽 같은 모습이고 윗부분 2층은 목조 전각으로 되어 있는데, 바퀴가 달린 모양이 전형적인 티베트 양식이다.

 

 

 

 

 

간단사라는 절 이름은 '완전한 즐거움을 주는 위대한 사원'을 의미한다고 한다. '간단'은 미륵보살이 수행하는 정토인 도솔천(兜率天)을 가리키는 말로, 통속적으로 '희족(喜足)' 또는 '희락(喜樂)을 뜻한다고 한다.

 

 

1838년 시내 중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1843년에 완공했다. 100여 년간 9개의 법당을 갖추고 5천여 명이 수행하는 몽골 라마교의 중심지 역할을 해 왔으나 사회주의 시절 탄압으로 기능을 상실하고 5개 법당이 파괴되었다. 1990년 민주 정부의 등장으로 본래 모습을 되찾기 위한 간단사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4층 높이의 건물에 안치된 26m의 관음대불을 몽골에서는 믹짓 잔라리직(Migjid Janraisig)이라고 부르는데, 1996년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무게 20톤, 높이 26m라는 거대한 청동 관음보살이 서 있었는데, 공간이 너무 협소하여 숨이 턱 막힐 정도다. 고개를 치켜들고 부처님 얼굴을 바라보기도 힘들다. 이 광막한 초원의 나라에서 어째서 부처님을 이렇게 좁은 공간에 감금하고 있는 것일까.

 

1910년 제 8대 젭춘담바 쿠툭투의 눈병 쾌유를 기원하며 건립되었다는 관음대불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몽골 정부가 무기 제조용 고철로 소련에 보냈다고 한다. 당시 간단사의 불상만 아니라 전국의 수많은 불교 유물들이 열차에 실려 소련으로 갔다고 한다.

 

현재의 불상은 전 국민의 성금으로 6년 간의 불사 끝에 1996년에 조성되었다 한다.  

 

 

티벳식 스투파. 사방으로 마니차가 두르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한 바 퀴 돌면서 마니차를 돌린다. 주변 건물들은 학승들이 공부하는 곳.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다 읽은 것과 같은 영험이 있다는 마니차는 낡고 방치된 느낌이다.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야 하는 마니차의 기능을 오랜 세월 다하지 못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대형 향로

 

 

 

 

 

 

울란바타르는 '붉은 영웅'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의 독립 영웅인 수흐바타르를 기념하여 명명된 이름이다.

 

 

울란바타르는 간단사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1대 젭춘담바 자나바자르가 티베트에서 유학을 마치고 티베트 승려들을 이끌고 몽골에 돌아와 티베트 라싸에 있는 간단사를 모델로 이름도 똑같은 간단사라는 절을 후레(울란바타르)에 지었다고 한다. 자나바자르가 제1대 라마교 법왕으로 앉은 1639년에 '우르거'라 불리던 울란바타르는 1778년 사람들이 현재의 위치에 정착하면서 '이흐 후레(Ikh Khuree)'라 불렸는데, 이는 '큰 울타리'라는 뜻으로 간단사 담장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11년에는 '니쓰렐 후레(Niislel Khuree)'로 바뀌었는데, 이는 '큰 사원'을 뜻하는 말이다. 1920년대 당시 울란바타르의 남자들은 50%가 스님이었다고 하니 울란바타르 자체가 거대한 사원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간단사는 원래 울란바타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제5대 보그드 칸 때인 1838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사원 이전 후 100여 년에 걸쳐 간당사는 아홉 개의 사원과 도서관 그리고 5천여 명의 승려의 숙소를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이발산의 몽골 인민 정부는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시하면서 몽골 라마교의 저항을 받게 된다. 당시 몽골 가축의 17%와 국부(國富)의 6 분의 1을 장악하고 있던 라마승들은 반란을 일으켜 지방 관청을 파괴하고 공공시설을 점거하였다. 인민정부는 1932년 집단화 작업을 잠정 중단하고 정책을 완화하여 반란 세력을 잠재운 후 1930년대 말에 다시 대대적으로 집단화 정책을 강력 추진하였다. 이때 중 1만7천 명이 사형을 당했고, 740여 개의 사원 중에서 700개 이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1944년 잔존 승려 아홉 명의 탄원이 받아들여진 결과 정부는 훨씬 축소된 규모로 간단사를 다시 열 것을 허용했으나 종교 행사는 여전히 금지했다. 1980년대 초반에 간당사는 종교 활동을 허가 받은 최고령 150명의 승려들로 사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으며 일부 승려들은 티벳 불교의 교육과 수행을 위해 인도로 보내졌다.

 

1992년 민주화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부터 국민들의 깊은 관심 속에 부흥되어 2003년 현재 250여 곳의 사원이 복원되고, 스님은 2500여 명에 이른다. 1970년 설립된 간단승가대학 출신 스님들이 현재 몽골 불교를 이끌어가고 있다.

 

 

 

간단사를 돌아본 뒤  수흐바토르 광장 옆 몽골국립자연사박물관을 잠시 들렀다.

 

고비지역에서 발견된 두 개의 공룡화석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데, 하나는 높이 15m 무게 4~5톤 정도의 육식공룡 타르보사우루스이고, 다른 하나는 8m 길이의 오리주둥이를 가진 초식공룡 사우로로퍼스.

 

다음은 육식공룡 타르보사우루스.

 

 

 

 

 

그리고 몽골 민속공연 관람을 기다리며 주어진 시간, 꼬치구이집에서 양고기 돼지 고기 구이에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신다.

 

 

저녁 6시, 1시간 동안 몽골 민속 공연을 관람하였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목소리를 동시에 내는 흐미라는 독특한 창법이 신비롭다. 지속적인 저음과 함께 화음이 이루어지는 선율을 만드는 것이다. 저음은 성대를 매우 팽팽하게 당겨서 내고, 멜로디는 입술을 여닫고 혀를 움직여 입안의 크기와 모양을 조절하여 만든다.

 

후미는 엄숙한 국가 행사에서부터 가정의 잔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생활에서 연행된다. 그리고 목축하는 동안이나 유르트(yurt) 안에서 갓난아이를 재울 때도 이 창법으로 노래를 부른다. 후미는 전통적으로 예능보유자가 전수생에게, 또는 스승이 제자에게 구전한다.

 

 

 

 

 

 

 

 

 

 

 

 

그리고 몽골을 대표하는 악기는 마두금(馬頭琴), '쿨(khul)'이라고 부른다. 대의 끝 부분이 말의 머리 모양인데, 이것으로 연주한 전통음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8시 반, 한국 대사관과 마주 보고 있는 에델바이스 호텔에서 저녁식사. 식사 후 담소를 즐기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울란바타르의 압구정동'이라고 하는 경기장 주변 지역(숙소 팰리스호텔에서 한 블록 동쪽) 신축 건물들 많은 곳에 '남양주 거리'와 '남양주 문화센터'를 지난다. 1998년에 남양주시와 울란바타시가 우호 협력을 체결하면서 거리를 지정하고 문화센터를 지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남양주 수동에 몽골 문화촌 건설도 이에서 비롯된 모양이다.

 

 

석양에 비친 호텔 앞 아파트 벽화가 눈길을 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이라고나 할까. 건설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가 넘친다.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저녁 10시쯤 호텔 앞 노천 바에서 포도주, 맥주를 마신다.

 

 

가이드 바이라 씨와 대화하면서 한국 사람에 대한 몽골인들의 인식을 읽는다. 솔롱고스의 나라 한국을 동경하고 한국인이 외모도 비슷해 호감을 가졌는데, 몽골에 진출한 한국인들이 생산적인 투자보다는 술집 등 불건전한 매춘 사업을 확산하고 있는 현실에 실망이 크다고 한다. 몽골인 부자들은 사업가로, 10년 전인 1994년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대출 받아 도망간 경제 사기범들이 잘 살고 있는 몽골의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바이라, 대단히 진지하고 여행자들에 대해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가 감명적이다. “혹시 잘못한 게 없느냐?”고 묻는다. 왜 그런 걸 묻느냐니까 “다음 여행 오는 사람들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런 분위기에 우택 형이 맥주 한 잔씩 더 돌리고. 12시 좀 넘어 숙소로 돌아와 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