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궁리거경의 퇴계 정신이 살아 숨쉬는 도산서원

모산재 2012. 8. 15. 16:21

 

아이들 수학여행 답사차 국학문화회관을 거쳐 들른 안동 도산서원.

 

바쁜 일정 속에 찬찬히 살펴보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사진을 대강 담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부족한 이미지는 좀 더 충실한 정보를 찾아 채우며 아쉬움을 달래보기로 하자.

 

 

서원 경내로 들어서자 강가에 늘씬하게 늘어선 소나무 숲 아래 큰 빗돌 앞에서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 마침 방학하는 날 연수 여행을 온 잠신고 선생님들이다. 

 

 

 

 

 

선생님들이 보고 있는 것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빗돌.

 

 

 

 

 

추로(鄒魯)는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와 맹자의 고향인 추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니 추로지향(鄒魯之鄕)은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정신을 숭상하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곧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고장이니, 우리나라에서는 경북 안동이나 전북 전주 등이 이런 명칭을 사용한다.

 

최고의 성리학자로 숭앙받는 퇴계선생이 터를 잡고 또 그를 배향하는 도산서원이니, '추로지향'이라는 빗돌이 세워진 것은 자연스런 일. 

 

 

추로지향 비석 뒤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 상류 분천강 풍경

 

 

 

 

 

마당에 들어서니 층계를 따라 늘어선 도산서원 전경이 시원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왼쪽에 역락서재, 옥진각, 상고직사가 층계를 따라 차례로 보이고 오른쪽으로 대칭을 이룬 농운정사가 보인다.  

 

 

 

 

 

왼쪽 맨 앞에 있는 역락서재(亦樂書齋)라는 건물은 퇴계 선생이 도산서당을 지을 당시에 건립한 기숙사. <맹자> '학이'편의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구절에서 따온 당호이다. 지헌 정사성의 아버지가 아들을 퇴계 선생께 맡기면서 기부한 건물이라 한다.

 

 

정면으로 대칭형을 이룬 건물은 농운정사(隴雲精舍). 

 

 

 

 

 

역시 유생들의 기숙사로 퇴계 선생이 설계한 공(공)자형 건물인데, 제자들이 공부에 전념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 한다. 

 

'농(隴)'은 원래 한나라 천수군(天水郡)의 고개 이름이지만 일반적으로 '언덕'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언덕 위의 구름'을 뜻하는 '농운(隴雲)'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도학자 도홍경(華陽隱居 陶弘景, 456-536)이 쓴 시로부터 '은자의 처소'라는 뜻으로 쓰였다.  

 

山中何所有    산에는 무엇이 있는가?
隴上多白雲    언덕 위엔 흰 구름만 많지.
只可自怡悅    다만 홀로 흐뭇하고 기쁠 뿐
不敢持贈君    그대에게 보낼 생각은 못하네.

 

 

퇴계선생은 57세부터 66세까지 약 10년 동안 머뮬며 도산서당과 주위의 자연을 노래한 40제 90수의 7언시와 5언시를 <도산잡영(陶山雜詠)>으로 묶어 남기고 있는데, '농운정사'를 노래한 부분은 도홍경의 시를 연상시킨다.

 

常愛陶公隴上雲    도공(도홍경)의 언덕 위의 구름 늘 사랑하여
唯堪自悅未輸君    오직 홀로 기뻐하나 그대에겐 못 보냈구려.
晩來結屋中間臥    느지막에야 집을 얽고 그 가운데 누웠으니
一半閒情野鹿分    한가한 맘 그 반을 들사슴과 나누련다

 

 

 

 

 

농운정사에는 시습재(時習齋)라는 방 이름과 관란헌(觀瀾軒)이라는 마루 이름을 새긴 현판이 있다. 관란헌은 <맹자 > '진심'장에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큰 물결을 보아야 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현상을 넘어 본체를 파악하라는 의미를 담은 현판이다.

 

 

도산서원 경내의 현판은 퇴계 선생의 글씨를 새긴 것이 대부분이다.

 

'도산서당(陶山書堂)'과 '암서헌(巖栖軒)' '완락재(玩樂齋)', '농운정사(隴雲精舍)'와 '시습재(時習齋)' '관란헌(觀瀾軒)', 그리고 '역락서재(亦樂書齋)' '광명실(光明室)' 등 중심 건물의 현판 여덟이 퇴계의 글씨다.

 

그런데 농운정사의 한 방에는 '시습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지만 짝을 이룬 방에는 현판이 없다. 하지만 <도산잡영>에 '지숙료(止宿寮)'라는 이름의 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현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너른 마당 오른쪽에는 열정(冽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이 물은 서당과 서원의 식수로 사용한 물이다. 그러나 퇴계가 '열정'이라 이름을 붙인 데는 특별한 뜻이 있을 것이다. 

 

 

 

 

 

'차가울 렬(冽)'과 '우물 정(井)'이니 '찬 우물'이란 뜻이다. 열정은 <주역>의 "정렬한천식(井冽寒泉食)", 즉 "우물이 차갑고 시리니 달게 마시네."라는 글에서 이름을 따온 이름이라 한다.

 

선생은 <도산잡영>에서 '열정'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書堂之南     서당의 남쪽
        石井甘冽     돌우물엔 달고 시린 샘물
        千古煙沈     천고의 시간이 내에 잠겼으니
        從今勿冪     이제부터는 덮지 말기를

 

 

샘물은 마르지 않는 천고의 지혜를 찾는 선비정신과 같은 것. 그래서 옛 선비들은 샘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듯하다. 천고의 근원을 가진 새물을 길어 올리기 위해서 우물은 덮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우물은 1970년대 안동댐 건설과 함께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지금의 석재를 사용하여 단장한 것이라 한다.

 

 

 

서원과 서당으로 들어서는 외문.

 

 

 

 

 

 

외문을 들어서면 왼쪽 담장으로 난 문을 들어서면 농운정사 오른쪽 마당에는 도산서당이 있고, 정면 계단 위로는 전교당으로 들어서는 정문인 진도문(進道門)이 보인다. 

 

 

 

 

 

 

진도문 양쪽에는 도서실 역할을 하는 동서 광명실(光明室)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광명실 현판은 우탁 선생을 제향하던 역동서원에 걸려 있던 것을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면서 동광명실에 옮겨 단 것이라 한다. 서광명실 현판은 모각한 것.

 

 

 

퇴계 선생이 후진을 양성하던 도산서당에 퇴계 사후에 문도들에 의해 설립된 도산서원이 위쪽에 들어서면서 하나로 연결된 독특한 공간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도산서당(陶山書堂). 글씨를 세로로 새긴 현판이 기둥에 달려 있다.

 

 

 

 

 

3년의 공사 끝에 퇴계선생이 회갑을 맞은 신유년(1561년) 가을에 완성하였는데, 스님에게 맡겨 지은 집이다.(법련 스님이 짓다가 다 짓지 못하고 죽은 뒤 정일 스님이 이어서 완성하였다.)

 

퇴계선생은 도산서당을 구상하면서 이미 <도산잡영>에서 도산서당 설계도라 할 수 있는 시를 지어 놓았는데, 은퇴한 자신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大舜親陶樂且安    순임금이 친히 질그릇 구우니 즐겁고 마음 편하고
淵明躬稼亦歡顔    도연명이 몸소 농사 지으니 얼굴 역시 기뻤다오.
聖賢心事吾何得    성현의 그 심사를 내 어찌 얻을까마는
白首歸來試考槃    흰 머리가 되어 돌아왔으니 산수간에 거니리.

 

※ 考槃 : 은둔하여 산수 간을 거닐며 자연을 즐기는 일.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편 집주에 "'고(考)'는 '이룬다(成)'는 뜻이고, 반(槃)은 '머뭇거려 멀리 떠나지 않는 모양'이니 '은거할 집을 이룬다.'는 말이다.(考成也 槃盤桓之意 言成其隱處之室也)"라고 하였음.

 

 

순임금이 질그릇을 구웠다는 고사를 인용하는 걸로 보아 '도산(陶山)'이란 명칭도 이와 관련된, 퇴계가 무척 마음에 들어한 이름일 것이다. 

 

 

부엌, 온돌방, 마루로 된 3칸집은 가운데 온돌방에는 완락재(玩樂齋), 오른쪽 마루에는 암서헌(巖栖軒)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완락(玩樂)'은 주자의 <명당실기(名堂室記)>의 "즐겨 완상하여 족히 나의 일생을 마치어도 싫증내지 않으련다.(樂而玩之, 足以終吾身而不厭)" 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며, '암서(巖栖)'는 바위구멍에 은거하며 사는 '암혈지사(巖穴之士)'에서 온 말이다.

 

 

 

마당에는 '열정'에 이은 또 하나의 작은 샘, 몽천(蒙泉)이 있다.

 

 

 

 

 

'어릴 몽(蒙)'자와 처음 솟아나온 깨끗한 물을 뜻하는 '샘 천(泉)'이 결합된 말. 

 

<주역>의 몽괘(蒙卦)에 "산 아래 샘이 솟아나는 것이 몽(蒙)이니 군자가 본받아서 과감하게 행하며 덕을 기르느니라.(山下出泉, 蒙 君子以 果行育德)이라는 구절에 근거한 이름으로 보인다.

 

몽(蒙)'은 돼지가 풀 속에 덮여 있는 모습이니, 한방울 샘물처럼 맑고 순수하지만 어리고 어리석은 제자를 군자의 덕을 기르게 가르치고자 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서당 동쪽 마당 끝에는 정우당(淨友塘)이라는 이름의 작은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퇴계가 자필로 쓴 기문을 판각한 책인 <도산기>에는 "동쪽 구석에 조그만 네모난 연못을 파고 그곳에 연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염계 주돈이의 '애련설'을 본받아 진흙 속에서 은은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고고한 군자의 삶을 지향하고자 한 뜻일 게다.

 

퇴계는 정우당 연못 속 산 그림자를 즐겼다 하며 도산잡영 18수 중의 하나로 노래되고 있다.

 

 

 

또 동쪽 산 언덕에는 '절우사(節友社)'라 새긴 작은 빗돌이 서 있다.

 

 

 

 

 

윤선도가 '오우가'에서 '물, 돌, 솔, 대, 달' 다섯을 '오우(五友)'라고 불렀듯이, 퇴계는 절개와 지조를 나타내는 매(梅)ㆍ죽(竹)ㆍ송(松)ㆍ국(菊)을 벗 삼아 절우사(節友社)라는 정원을 꾸민 것이다. 하지만 이름에서 기대되는 그런 분위기는 느끼기 어렵다. 토사에 쓸려 옛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진도문을 지나면 바로 서원의 중심 공간인 전교당(典敎堂)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전교당 편액은 마루 안쪽에 걸려 있고, 앞쪽으로는 '도산서원'이라는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선조임금이 한석봉의 글씨로 새겨 하사한 것이다.

 

1574년에 지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은 서쪽 한 칸만 온둘방이고 모두 마루로 되어 있다. 보물 210호로 지정되었다.

 

 

 

전교당 앞마당 양쪽에는 서재인 박약재(博約齋)와 동재인 홍의재(弘毅齋)가 있다.

 

 

 

 

 

박약재(博約齋)는 <논어> '옹야'편의 "학문을 넓게 배워 예로 행하라.(博學於文 約之以禮 )" 라는 문장에서 나온 말이고, 홍의재(弘毅齋)는 <논어> '태백'편에서 증자가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그 소임이 무겁고 길은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전교당 마당 동쪽에는 장판각(藏板閣)이 있고 서쪽으로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다. 전교당과 장판각 사이로 높은 언덕 위에는 퇴계 선생을 배향한 상덕사(尙德祠)가 있는데 문이 닫혀 있어 볼 수 없다. 그 서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이렇게 전교당까지 둘러본 다음 다시 서원 잎 너른 마당으로 내려온다.

 

 

서원 앞마당에는 400년 수령이라는 두 그루 왕버들이 독특한 수형으로 자라고 있다. 모두 한 줄기는 땅과 나란히 벋어 사람의 손길과 함께 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 다정스레 느껴진다.

 

 

 

 

원래 한 그루였던 느티나무는 땅을 돋우면서 네 개의 줄기가 각각 딴 그루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단다.

 

 

 

 

 

마당 앞 동쪽 강변에는 오솔길이 나 있고, 그 건너편에는 오뚝하게 단을 쌓아 올린 언덕에 정자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독서와 사색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퇴계가 만든 오솔길, 이내 도착하는 오솔길 끝에는 천연대(天淵臺)라는 빗돌을 세운 전망 공간이 나타난다.

 

 

 

 

 

도산서원 양쪽 산기슭이 낙동강변에서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 퇴계 선생은 동쪽의 절벽을 천연대(天淵臺), 서쪽 절벽을 운영대(雲影臺)라 불렀다. 서원 앞을 흐르는 강물을 퇴계는 '갓끈을 씻는다'는 듯의 탁영담(濯瓔潭)이라 부르고 그 운치를 즐겼다. 

 

천연대라는 이름은 <중용>에 "鳶飛戾天 漁躍于淵(솔개는 하늘을 날고 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라는 문장의 뒷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고, 운영대도 <중용>의 "天光雲影共徘徊(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노닌다.)" 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강 건너편 높이 쌓은 단을 시사단(試士壇)이라 부른다.

 

 

 

 

 

시사단은 1792년 정조가 퇴계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기 위해 도산별과를 신설하고 안동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명을 내리며 비롯되었다. 문과 2인, 진사 2인, 초시 7인,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하는 과시가 이 곳에서 행하여졌다.

 

주변에는 송백림(松栢林)이 들어서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수위가 상승하고 분천강이 침수되자 원래 위치에서 10m 높이의 석축을 쌓아올려 개건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주변의 송백림은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서원 앞의 강변 솔숲과 탁영담으로 불렸던 분천강 강 풍경. 솔숲 사이로 천광운영대 석축이 살짝 보인다.

 

 

 

  

 

 

도산서원을 거닐다보면 퇴계가 건물, 연못, 자연 등 하나하나를 얼마나 세심하게 설계하고 배치했는지 절로 느낄 수 있다. 궁리거경(窮理居敬)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퇴계는 도산서원의 아름다운 자연에 자신의 뜻을 반영한 건물과 정원을 지었다.

 

 

회갑을 맞은 1561년, 퇴계는 귀거래하여 분천강가에 도산서당을 세우고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짓고 <도산기(陶山記)>를 새기며 은일지사로 궁리거경의 수양에 힘쓴다. '반타석(盤陀石 : 너럭바위)'이라는 시는 그의 심경을 잘 보여 준다.  

 

 

黃濁滔滔便隱形     도도히 흐르는 탁한 물에 형체를 숨기더니
安流帖帖始分明     물결 잔잔히 가라앉으니 비로소 분명해지네.
可憐如許奔衝裏     내달리며 부딪치는 물결을 받아들이는 모습 가련한데
千古盤陀不轉傾     천고의 반타석은 구르고 기울지 않는구나.

 

 

그로부터 9년 뒤 70세 되던 1570년 섣달 한겨울에 퇴계는 눈을 감는다.

 

 

 

 

※ 도산서원 공간 배치도

 

 

 

 

 

☞ 단풍 든 가을 도산서원 => http://blog.daum.net/kheenn/15856134

☞ 영주 소수서원 => http://blog.daum.net/kheenn/15855751

☞ 안동 병산서원 => http://blog.daum.net/kheenn/15855058

 

 

 

 

 

※ 도산서원 개관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건축물들은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학문과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퇴계 이황은 이언적으로부터 시작하는 주리론을 이기호발설과 사단칠정론으로 집대성한 영남학파의 거두. 영남학파는 서경덕의 주기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율곡이 집대성하는 기호학파와 조선 성리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는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기호학파에 비해 인격 수양의 관념적인 철학이 주를 이룬다.

 

도산서원은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하여 세운 건물로 선생이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이 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전교당 부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 조목(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재는 ‘박약재(博約齋)’와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서로 마주보고 있다.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