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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시대 건너 가기

선생님이 황당해? 조선일보가 황당해!

by 모산재 2011. 12. 16.

 

오늘 날짜 조선일보는 <어떤 중학교 황당한 국사 시험… 선생님 맞습니까>하는 제목을 달고 '나꼼수' 발언을 예문으로 시험 문제를 출제한 경기도 구리시의 어느 중학교 교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기사를 쓴 장상진 기자에 따르면, "인터넷 방송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을 싸잡아 조롱하려는 목적으로 인용된 발언들을 3학년 국사 시험문제에 예문으로 출제하고, 이를 트위터에도 공개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 교사가 트위터에 공개한 기말고사 문제는 다음과 같다.

  

 

 

정답은 이승만이지만, 이 문제를 읽을 때 사람들은 머릿속에 이명박을 떠올리게 된다. 참으로 절묘하게 이승만과 이명박의 이미지가 오버랩되게 배치한 이 문제를 대하며 대한민국 우파는 어쩌면 최대의 치부를 노출 당하고 조롱받는 듯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 같다. 

 

이승만이 장로였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되었지만, 하지만 위의 항목들은 이승만에 관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팩트)가 아닌가?

 

이에 대해 어느 보수지는 엉뚱하게도 전교조 교사를 물고 늘어진다. 이 교사가 전교조 교사가 아니라는 보도가 나오자 "일반교사로 위장된 전교조 교사들" 운운하며, 전교조가 "국가가 근원적으로 얼마나 많은 모순을 내포한 집단인지를 잘 모르고 또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얼마나 많은 모순과 선악이 뒤엉킨 직책인지에 대한 포괄적인 판단이 모자라는, 파편적이고 몽환적인 판단을 강요하는 교사 집단"이라며 이승만의 행적을 어거지로 두둔하고 또 이를 전교조 교사들이 획책한 사건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교사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료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같은 반동적 집단이 내놓은 반정부 투쟁" 운운하는 망발까지 민주화 운동 단체에까지 막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홧김에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칼부림하는 격이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이승만의 행적을 지극히 상식적으로 늘어놓은 엄연한 사실(팩트)이다. 이승만은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와 손잡고 통일국가 수립을 외친 백범 김구를 암살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나섰으며, 정적인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키고 부정선거로 민주주의를 짓밟다가 4.19혁명에 의해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이는 지엽적인 행적이 아니라 가장 뼈대가 되는 행적이다. 다만 '장로'라는 지엽적인 행적이 보태어져 '이명박' 현 대통령을 연상시키게 한 것이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인물의 행적을 나열한 것에 모욕감을 느낀다면 바로 한국 현대사에 부정적 그늘을 짙게 드리운 이승만에 감정이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더 큰 문제가 있을 것이다. 민족의 광복절을 없애고 독재 권력의 건국절 기념행사를 벌이고자 하며 이승만 살리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찌 건강하다고 할 것인가.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친일파와 야합하여 민족정기를 훼손시킨 권력자이자 민주주의를 짓밟은 독재자'일 뿐이다. 대한민국과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바로 이승만을 몰아낸 4.19혁명이라는 것은 대한민국헌법에도 명시되어 있거늘... 

 

 

다음 게시판의 이 기사에 현재 댓글만 7,000개 이상 달렸다. 절대 다수의 네티즌들은 선생님이 황당하기는커녕 올바로 가르친 상식적인 교사라고 두둔한다. 오히려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를 뽑아 교사에 대해 마녀사냥하고 있는 조선일보 기자에 대해 황당한 기자라고 비난한다.

 

조선일보의 이 선정적인 기사로 그 교사는 징계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3,000~1,700 명의 추천을 받고 있는 다음 댓글만 봐도 네티즌들의 반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아주 훌륭한 교사구만. 아주 좋아."

" 아무도 안하니깐, 선생님이라도 올바르게 가르치는게 잘못인가? 그리고 제목이 "선생님 맞습니까?"가 뭐냐? 넌 기자 맞냐!!"

"사실을 출제하는데도 징계여부를 심판 받아야 한다니, 어이없네..."

"정답은 이승만이지만 이명박이라고 쓴 학생도 오답처리하기는... 애매합니다잉~"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님을 형님이라 부르는데. 뭐가 잘못인가? 그렇게 못하는 하는 현 정부가 잘못 된 것이 아닌가? "

"아주 훌륭한 문제네요. 저런 교사 밑에서 배운 학생들은 역사의식이 투철한 학생들이 되겠네요. 저런 독재 스타일의 대통령은 반드시 비극적 최후를 맞게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명박을 모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이승만의 행적을 그대로 답습하는 이명박의 그릇된 역사관과 행태에서 비롯된 것일 뿐... 친일파와 그의 정치적 수호자인 독재자 이승만을 미화하며 기대려는 한 대한민국 우파는 정신적 파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아래...

 

평범하고 상식적인 네이버 백과사전에 실린 이승만의 행적을 보자.(독립운동자금 유용, 김구 여운형 등 민족지도자 암살, 6.25때 도망 후 한강교 폭파, 양민 학살 등 적혀 있지 않는 내용은 또 얼마나 많은데...) 독립운동을 분열시키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가  쉬울까...?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 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주도권 싸움으로 국민회를 분열시키고, 따로 좌파세력을 규합 동지회를 결성함으로써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였다.

 

1917년 안창호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임시정부 내부의 무단파()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가 있었다.

 

그 후 워싱턴군비축소회의를 비롯하여 미국정부 및 국제연맹 등과의 외교교섭을 통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나 기대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교포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의 대립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노선이 나타났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출처 : 이승만(李承晩),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