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나무 일기

대모산의 고깔제비꽃, 털제비꽃, 현호색, 털괭이눈, 조개나물, 애기풀

모산재 2011. 4. 29. 22:32


날씨가 너무도 화창합니다.

 

아이들과 양재천에서 들꽃 산책을 끝내고 나니 그냥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져서 대모산 산행을 하기로 합니다.

 

내 맘대로 '풀꽃나무들의 천국'이라고 불렀던 대모산, 특히 일원동의 양지바른 무덤 언덕을 찾고 싶어졌습니다. 요 몇 년간 이 언덕의 풀꽃들은 제초제 세례를 받으며 위기를 겪더니, 급기야는 작년 새 잔디를 입히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이면서 풀꽃들의 서식지는 완전 초토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발길조차 뜸해졌던 대모산 언덕, 야생초 특유의 생명력으로 다시 생태계가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찾아보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찾았으니 수서역에서부터 능선을 타고 가는 가장 긴 대모산 산행길을 선택합니다. 생강나무 꽃이 져 버린 자리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산길은 봄기운 가득합니다. 

 


숲길에서 나비가 가끔씩 후두둑 날아가는데 처음으로 보는 이 나비는 멧팔랑나비입니다. 이른봄에 만날 수 있는 이 나비는 봄이 아니면 만나지 못하는 나비입니다.

 

 

 

몇 년 전까지 종종 들렀던 농장으로 들어섭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이런저런 꽃들을 많이 가꾸는 농장, 낯선 이를 맞이하며 개가 짖는 것은 예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주인 아주머니와 꼬마 여자 아이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어 줍니다. 낯선 이의 침입(?)을 경계하지 않고 정답게 맞이해 주니 참 기분 좋습니다.

 

 

피어 있는 꽃은 수선화와 무스카리 정도입니다.  

 

  

 

 

 

화려하게 핀 수선화, 무스카리가 아름다운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 내 눈길은 그늘에서 좁쌀만한 작은 흰 꽃들을 피운 황새냉이로 행합니다. 화려한 큰 꽃보다는 소박한 작은 꽃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왜일까요.

 

 

 

그리고 살구꽃이 환하게 빛납니다.

 

매화와 구별이 쉽지 않은 살구꽃, 꽃받침을 살펴서 뒤로 젖혀졌으면 그게 살구꽃입니다. 꽃받침이 반듯하게 꽃잎을 받치고 있으면 매화이지요.


그런데 이 녀석은 미끈한 줄기나 가지의 모양으로 보건대 양살구이지 싶습니다.

 

 

 

조개나물이 많았던 농장 옆 무덤 언덕으로 올라서보니, 그 많던 조개나물이 다 어디로 갔는지...

 

이제 갓 피어나는 이 녀석을 비롯하여 몇 개체만 눈에 띌 뿐입니다.  

 

 

 

대모산의 언덕은 향모가 잔디처럼 지천으로 자라는 곳인데, 향모도 그 세력이 위축되어 거의 얼마 보이지 않습니다.

 

이즈음이라면 꽃이삭이 숲을 이룰 때이련만 이렇게 듬성 듬성 피어 있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제초제 세례로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까 처음 보았던 멧팔랑나비가 포르르 발 앞에 날아들어 다시 한번 인증샷을 날립니다.

 

 

 

비탈진 등산로 언덕에 고깔제비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습니다.

 

분홍빛 꽃이 곱기로 이름난 고깔제비꽃인데, 이 녀석들은 빨래라도 한 듯 꽃이 허여멀쑥합니다. 제철을 지난 지 오랜 탓인 듯 싶습니다.

 

 

 

그리고 그 위쪽 길섶으로는 몸집이 아주 작은 짙은 자줏빛의 제비꽃이 역시 무리를 지어 피어 있습니다.

 

꽃만 보면 알록제비꽃을 닮았는데, 기다란 잎자루와 가지런한 톱니를 가진 달걀꼴의 잎을 보면 털제비꽃 같기도 하고 왜제비꽃 같기도 합니다. 왜제비꽃이 남부지방에 분포한다 하여 지금까지 서슴없이 털제비꽃이라 불렀는데, 요즘 자꾸 이 녀석이 왜제비꽃이 아닐까 자꾸 의심하게 됩니다.

 

 

 

갑자기 제법 큰 나비 한 마리가 하늘을 선회하다가 흙언덕에 착륙합니다. 

 

푸른 날개와 띠줄무늬로 보아 청띠신선나비가 틀림없는데, 야속하게도 날개를 접은 채로 날개 무늬를 보이기를 거부하고 버티더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에 놀라 훌쩍 날아가 버립니다.  

 

 

 

능선을 따라 걷다보니 그리 볼만한 풀꽃나무들은 없습니다.

 

아마도 한 오 년만에 대모산 정상을 처음으로 오른 듯합니다. 정상 남쪽으로 국정원이 보이지 않게 하려고 심은 잣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시야를 가려 답답합니다. 좀더 낮은 곳으로 물려서 조림해도 충분한 것을... 

 

어치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서 숲속 나뭇가지에 앉아서 사람들 눈치를 살피고 있습니다. 민가나 사람들 주면에 얼쩡거리는 걸 좋아하는 까마귀과의 텃새인데, 갈색 머리와 하늘빛 날개의 색깔의 조화가 아름답지요.

 

 

 

 

불국사를 지나 내려오면서 현호색이 군락을 이룬 계곡으로 들어섭니다. 이 곳은 여러 가지 모양의 잎을 가진 다양한 현호색이 동거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애기현호색이라고 불렀던, 잎이 복수초처럼 가늘게 갈라진 현호색이 가장 흔합니다.  

 

 

 

그리고 애기현호색처럼 결각 없이 세 개의 둥근 작은잎으로 된 현호색도 있고, 잎이 갈라진 현호색, 빗살 모양의 현호색, 그리고 잎이 기다란 댓잎 모양의 현호색이 다 보입니다.

 

  

  

 

 

 

예전에는 애기현호색, 빗살현호색, 댓잎현호색 등으로 구별해서 불렀지만, 잎의 변이가 심한 것일 뿐 꽃이나 열매 형태가 다를 바 없어 지금은 모두 현호색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털괭이눈은 이제 막 보석상자 같은 작은 꽃봉오리를 열고 있습니다. 아직 꽃잎 속에 든 수술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금괭이눈과 달리 꽃이 피어도 주변의 포엽은 금빛으로 물들지 않고 그대로 녹색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까치무릇(산자고)이 대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그늘이어선지 유감스럽게도 꽃봉오리를 연 모습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꽃대도 저리 길게 자라니 꽃봉오리를 제대로 받칠 기력이 없어 누워버리고 맙니다.

 

주변의 잡목들을 제거해서 햇볕이 들게 하면 좋겠다 싶은데...

 

 

 

제철을 맞은 돌단풍이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흔하다고 그냥 지나치기만 하던 산괴불주머니도 한방 찍어 주었습니다. 꽃입술이 저리 넓적하니 커서 괴불주머니 중에서 가장 예쁜 꽃인데 말입니다. 

 

 

 

기대를 하고 찾은 오늘의 최종 목적지, 대모산 무덤 언덕은 그야말로 실망 그 자체입니다.

 

조개나물 꽃과 할미꽃이 융단을 이루었던 언덕은 완전 초토화된 모습입니다. 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잔디밭 언덕...

 

그 넓은 무덤 언덕 귀퉁이에서 할미꽃은 한 송이를 발견했을 뿐이고, 조개나물도 겨우 몇 송이 만납니다. 분홍조개나물도 있었는데, 이젠 영영 사라졌습니다.

 

 

 

 

 

지금쯤이면 지천으로 피어날 솜방망이, 솜나물, 미나리아재비는 구경조차 하지 못합니다. 각시붓꽃, 둥굴레, 비짜루, 산해박, 과남풀 등이 자라던 곳들도 완전히 박피된 채 두꺼운 잔디로 입혀져 있어 이제 이들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햇볕이 사라지는 언덕을 헤매다가 애기풀 한 송이를 찾아내고 기뻐합니다. 예전에는 애기풀도 지천인 곳에서 말입니다.

 

 

 

죽은자를 위한 무덤 언덕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낸 야생풀꽃들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양지를 좋아하는 풀꽃들은 죽은자들을 위해 마련한 무덤 언덕에서 생명의 둥지를 틉니다. 죽은 자의 땅에서 피워 올리는 생명의 향기...

 

그러나 생명들의 합창으로 아름답던 무덤 언덕이 이제는 황량한 죽음의 언덕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