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중국 산동 (1) 칭다오 가는 뱃길, 칭다오 영빈관(독일 총독 관저)

모산재 2010. 8. 31. 03:30

 

오후 3시 인천항 제2국제선터미널에 모여 들었다. 예전 잉커우 갈 때와 같은 터미널인 줄 알았더니, 동인천역에서 택시를 탔는가 싶은데 금방 내리라고 한다 동인천역에서 지근 거리다.

 

 

서해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마주보고 있는 5박 6일의 산동 여행... 

 

태산과 공자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행이 그리 흥미롭지 않아 망설이다 가기로 마음 먹는다. 여유 없는 일정이 이어져 부담도 느끼던 중이지만, 뜨거운 여름 집을 지키고 있어 봐야 무엇하리... 연수를 다녀온 다음날 고향집으로, 고향집을 다녀오자마자 청산도, 청산도를 다녀오자마자 중국행 배를 타게 되니 하루의 휴식도 없는 여행길이 이어진다.

 

여행 배낭을 꾸리느라고 점심을 놓쳐 터미널에서 콩국수로 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수속을 마치고 5시경에 칭다오행 배를 탄다. 배를 타는 사람은 한국인은 별로 보이지 않고 거의 중국인이다. 셔틀버스를 탈 때마다 시끄럽게 몰려 들고 새치기를 예사로 하는 것이 과거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NGB(뉴 골든 브릿지였던가...)라는 3만 톤급 대형 페리호. 내일 오전에 도착한다고 하니 운항 시간만  최소 15시간 정도 걸리게 되는 모양이다.

 

 

짐을 내려놓고 답답한 선실을 벗어나 갑판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바람 쐬러 나오자 갈매기들이 몰려들어 선회비행을 시작한다.

 

 

 

 

 

 

6시 경에 출항하여 갑문을 통과하는 데 (물이 덜 들었는지) 장시간 대기 상태에 든다. 그 동안 저녁 시간이 되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12명의 일행에 2인실 하나 겨우 배정 받고 나머지는 모두 2층 침대 이코노미석으로 배정받았다. 이코노미석은 문이 개방되어 있어 짐을 모두 2인실로 모아 보관한다. 

 

식사를 마치고 갑판에서 잠시 바람을 쐬다가 모두 2인실로 모여든다.

 

 

 

 

 

어느새 페리호는 갑문을 벗어나 덕적군도 등 서해섬을 지나 남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일몰을 기대하고 갑판으로 나섰지만 짙은 안개로 틀렸다. 캔 맥주를 사서 로비에서 마시다가 선내에 있는 유일한 카페 글로리아 카페로 이동하여 칭다오 생맥주를 마시며 여행의 첫날밤을 맞이한다.

 

10시가 넘어 카페를 닫을 시간이 되자 갑판으로 이동하여 흥을 이어간다. 대형 배이지만 달리는 속도가 만만치 않아 바람이 거세어 부담스러울 정도다.

 

자정이 지날 무렵 보름달에 가까운 열사흩날 달이 구름 속에 숨어서 밤바다에 빛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구러 숙소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가 잠을 깨고 아침을 맞이한다. 갑판으로 나서보니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한데 멀리 산동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산둥은 일개 성에 불과하지만 면적이 15만 ㎢이니 남한(10만 ㎢)보다도 넓다. 인구는 무려 9천만을 넘어 섰으니 남한 인구의 배나 된다. 1인당 GDP 5천 달러 정도로 중국 내에서 광동성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하고있어 경제적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 산동 지도

 

 

 

 

지금 도착하는 청도는 군산과 비슷한 위도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 도시라고 한다. 도농복합 행정구역인 칭다오는 경기도와 비슷한 면적(약 1만 ㎢)에 인구는 710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시내로만 보면 전체 면적의 1/10 정도이고 인구는 약 250만여 명이다.

 

기후가 고르고 자연 풍경이 아름다와 '동방의 나폴리'라고도 하고 '동방의 스위스'라고도 하고 '동방의 하와이'라고도 하며 '황해의 밝은 진주'라고도 부른다니 이처럼 찬사가 많은 도시도 드물 듯하다.

 

그러나 멀리 펼쳐지는 도시는 만만찮은 경제성장을 과시하는 듯한 고층빌딩이 숲을 이룬 풍경이 보일 뿐, 이러한 찬사들을 떠올리기엔 역부족이다. 잔뜩 찌푸린 하늘 탓일지 모른다.

 

 

 

 

10시경 하선. 하선 후 이동하는 셔틀버스엔 한국제 밥솥을 손에 손에 들고 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한때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일제 밥솥 때문에 뜨지 못한다는 우스개 말이 있었던 것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마중나와 대기하고 있는 차에 타는 순간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소나기가 내린다. 그리고 금방 비는 그친다. 지나가는 비다. 여름철 평균 기온이 23도 정도이고 혹서가 없는 도시라더니 날씨는 생각보다 덥지 않다. 그러나 습도는 어쩔 수 없다.

 

5박 6일의 산동 여행을 맡아줄 가이드는 '김봉일', 기사는 왕기사. 봉우리에서 해돋이 보고 지은 이름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27살의 청년 가이드는 길림성 출신이라고 한다. 산동은 공자의 고향이라며 "유붕(有朋)이 자원봉래(自遠方來)하니 불역락호(不亦說乎)아?" 라는 논어 '학이(學而)'편의 한 구절로 인사를 한다.

 

가이드는 원래 작은 어촌이었던 칭다오는 100년 역사밖에 안 되었다면서, 급속 성장하면서 경제력도 커지고 환경도 깨끗하여 더 큰 도시이지만 낙후된 성도 지난(濟南)과 대조된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청도 사람들은 외지인을 깔보고 불친절하며 예의가 없다고 한다.

 

 

 

소어산 공원을 먼저 가는 줄 알았더니 버스는 빨간 지붕에 황색 벽체를 한 유럽풍 건물이 있는 정원으로 들어선다. 독일총독관저였던 영빈관이다.

 

 

청도 영빈관은 원래 독일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 한다. 독일의 건축가 라차루우이츠가 설계하여 1905년에 지었는데, 유럽 황실의 풍채를 보여주는 독일의 옛 보루형 건축물로 '제독루'라고도 불린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에는 100여 년의 청도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14년 11월 독일군과 전쟁을 벌여 승전한 일본군은 이 건물을 청도주재 일본수비군 사령관의 거처로 사용하였고, 1922년 12월 조차 기간이 끝나고 주권을 회수한 뒤엔 관아로 썼으며 국민당의 청도시장 관저가 되었다. 1932년부터 이 건물은 영빈관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1938년 일본군이 청도를 점령하면서 1945년까지 이 건물은 '국제클럽(国际俱乐部)'으로 이용되다가 일제가 투항한 후 다시 영빈관으로 회복되었다. 

 

마오쩌둥의 흔적도 이곳에 남아 있다. 1957년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이곳에서 여름을 지내면서 주언라이, 덩샤오핑과 함께 이 곳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였다고 한다. 

 

 

 

 

 

영빈관은 독일 윌리엄시대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인 튜더 양식과 청도풍의 건축 양식이 결합하여 조화를 이룬 건물로, 독일 등 유럽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양식이라고 한다. 외관은 웅장한데 내부는 궁정식 목조골격으로 이루어졌다. 옛 보루 형태의 황색 성벽에는 화강암으로 장식을 하였다. 특히 건물 중앙의 육중한 돌기둥은 웅장한 멋을 느끼게 한다.

 

 

이 건축물을 짓는데 무려 은 250만 냥이 쓰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경비를 지출한 책임을 물어 총독은 바로 파면되었다고 한다.

 

30미터 높이의 4층 건물로 30개의 방이 있으며 내부에는 앤틱 장식품으로 가득하다.

 

 

 

 

영빈관 입구

 

 

 

 

모두 4층 건물인데 공개된 것은 2층까지이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과 회랑, 하얀 벽체와 천장 붉은갈색의 목제 구조물이 정갈한 대비를 이루며 아름답다. 영빈관은 겉 모습만이 아니라 내부의 인테리어도 매우 호화롭다. 천정의 인테리어와 땅에 깔린 바닥재, 동제 등갓과 벽난로, 수정 벽거울, 동제 가구 등 고풍스런 다양한 인테리어들...

 

 

 

 

나무 침대

 

 

 

1957년 마오쩌둥 주석이 한 달 동안(7.11~8.12) 머물렀던 방과 사용했던 책상

 

 

 

 

1876년에 독일에서 생산된 피아노가 놓여 있는 방

 

 

 

1층 별실에 전시하고 있는 가구들

 

 

 

대형 청동제 샹들리에. 무게가 1톤이라고 한다.

 

 

 

 

 

1층 바깥 녹색 타일에 새겨진 엉겅퀴 문양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본 2층 복도

 

 

 

 

벽난로가 아름답다. 벽난로 주변은 녹색타일에 엉겅퀴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첫 여행지 칭다오에서 영빈관(구독일총독관저)를 돌아보고 난 뒤 다시 합승버스를 타고 소어산(소어산) 공원으로 향한다. 정오를 지나 배도 살짝 고파온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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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다오의 역사

 

칭다오는 본래 즉묵현(卽墨縣)에 속한 보잘것 없는 어촌이었으나, 청대(1644~1911)에 칭다오커우(靑島口)라는 세관이 세워지면서 대규모 정크 무역이 발전했다. 1880년대 북양함대를 창설하면서 중국 정부는 칭다오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곳에 소규모 해군 보급기지와 요새를 설치했다.

이 지역에 눈독을 들여오던 독일 정부는 1897년 자국 선교사 피살사건을 구실로 군대를 급파해 칭다오를 점령했다. 1898년에는 중국 정부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요구했고, 산둥의 철도경영권과 광산채굴권을 포함해 자오저우 만과 그 주변지역을 99년 동안 조차해주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에 따라 칭다오는 1899년 자유항으로 선포되었고, 근대식 항구시설도 들어섰다. 또한 지난(濟南)까지 이어지는 철도도 놓였다. 칭다오는 유럽풍의 근대적 도시로 설계되었으며, 여러 공장들도 들어섰다.

1914년 일본이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도 무엇보다 칭다오를 확보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1914년 11월 일본은 이 항구를 봉쇄한 뒤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1922년 워싱턴 회의의 결과에 따라 중국에 반환할 때까지 이곳은 일본에 점령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기간 동안 칭다오뿐만 아니라 산둥성 내지에도 강력한 거점을 구축해두었다.

1929년 칭다오는 난징(南京) 국민정부의 효과적인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이어 특별시가 되었다. 항구로서 계속 발전한 칭다오는 1930년 무렵에는 교역량에서 경쟁 항구인 톈진(天津)을 압도했다. 그후에도 톈진을 누르고 계속 성장했다.

1938년 일본이 다시 칭다오를 점령하여 1945년까지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근대식 면방직 공장과 기관차·열차 제작소 및 수리공장 및 기계수선소가 세워졌으며, 고무·성냥·화학약품·염료 등을 제조하는 공장도 들어섰다. 양조공장에서는 매우 유명한 맥주가 생산된다.

1949년 이래 칭다오는 주요 중공업기지로 발전했다.  1950년대 말 중국에서 으뜸 가는 철강공장이 이 지역에 세워졌다. 1970년대까지는 과거에 많이 제조되었던 직물이 기계공업과 함께 경쟁적으로 발달했다. 칭다오는 동서를 잇는 철도 노선의 종착역으로, 옌타이항(煙臺港)과 철도로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