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4일 토요일, 햇살 맑은 날
동서울에서 밤차를 타고 지리산을 찾는다. 4월말이면 성수기일 텐데 백무동 마을의 숙소들은 텅비어 있어 적막감마저 감돈다. 텅비어 있어도 산장의 숙박비는 5만원을 달랜다.
자고 일어난 아침, 계곡의 서늘한 기운과 맑은 햇살이 전신으로 스며드는 듯해 상쾌하다. 이른 시간 산행을 나선다. 한신계곡을 거쳐 세석을 지나 장터목, 천왕봉을 돌아볼 계획이다.
숙소에서 큰길로 올라서는 곁에 커다란 너럭바위 모서리에는 푼지나무가 덩굴처럼 엉켜 있고, 위쪽에는 이끼들이 양탄자처럼 예쁘게 자라나고 있다.
입구의 야영장 주변에 특이한 꽃술을 늘어뜨린 큰키나무들이 보여 다가서 보니 네군도단풍의 꽃이다. 풍부한 지리산 고유수종을 두고 어째서 생태계 교란을 가져올지도 모를 외래 조경수를 심었을까...
등산로 입구에 종종 보이는 이 제비꽃은 털제비꽃일까, 아니면 왜제비꽃일까...
어쩐지 꽃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실망스러운데, 매화말발도리조차 겨우 하얀 꽃망울이 맺힌 상태이고 아직 꽃잎을 열지 않고 있다. 요렇게 몇 송이만 피어 있을 뿐...
산길 모롱이를 돌아서자 숲의 나뭇가지 사이로 꼭대기의 능선이 환한 햇살에 드러났다. 그런데 능선은 아주 새하얗다. 습기가 눈꽃처럼 얼어붙어 상고대의 절경을 이룬 듯하다.
꽃이 없으니 풀이라도 파릇 자라나 있으면 렌즈를 갖다댄다. 요건 아마도 노루삼이지 싶다.
이건 노루오줌인가...
숲 사이로 보이는 계곡에는 거센 물들이 너럭바위를 타고 용처럼 힘차게 흘러내리다 폭포가 되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지 못한 골짜기의 생명들을 일깨운다.
위에서 내려오던 남자 등산객 셋을 만나는데 길이 막혀 오를 수 없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아마도 산불 방지기간이라 통제가 있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왔던 길이 아까와 갈 수 있는 데까지 계속 가보기로 한다.
첫나들이폭포의 다리를 건너며 위아래로 본 계곡물. 봄비가 많이 내린 탓인지 수량이 풍부해서 더욱 시원스럽다.
계곡 건너편 바위벼랑에 핀 진달래꽃. 이제 개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을 지나면서부터는 꽃이 핀 모습은 보이지 않고 꽃봉오리만 보일 뿐이다.
물박달나무로 보면 될까... 수꽃이삭에 수술을 내밀기 시작했다.
다시 다리를 건너며 본 계곡 풍경
새로 자라난 일엽초는 포자낭이 보이지 않는다. 산일엽초일 듯...
낭떠러지를 이룬 바위에는 온갖 이끼와 지의류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다.옥빛으로 자라는 수상지의류의 모습이 돋보인다.
햇빛을 듬뿍 받고 있는 개울길에 파릇파릇 자라난 왜갓냉이가 어린 꽃망울까지 맺혔다.
내심 걱정하며 올라왔는데 과연, 가마소 바로 앞 계곡을 건너가는 다리가 폐쇄되어 있다. 철문을 달고 봉쇄하여 안내판을 붙여 놓았다. 이걸 보면서야 비로소 세석대피소 예약이 왜 안 되는지, 그리고 백무동 민박집들이 왜 비었는지를 퍼뜩 떠올리게 됐으니...
이렇게 금지시킬 것이라면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반쯤은 바리케이트로 막고 좁힌 통로에서 크게 출입금지임을 써 붙여야 했다. 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게 없잖았는가. 게다가 관리소 직원들이 있었는지조차도 몰랐으니...
그러나 밤차까지 타고 왔는데, 이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일단은 가마소나 보자며 길 아래쪽 계곡으로 건너간다. 계곡물이 바위 사이로 좁게 흘러 아이조차도 건널 수 있다. 건너니 바로 가마소가 나타난다.
계곡의 풍경은 아직 겨울이나 진배없는데 어쩐지 더 오르고 싶은 마음이 점차 사라진다. 꽃을 보기 위해 천리길 멀다 않고 지리산을 찾아 왔건만 풀빛조차 보이지 않는 삭막한 풍경이다.
그래도 왔던 길은 아깝고 마땅히 대신 갈 만한 데는 없고 하니 발길을 옮긴다.
가마소에서 조금만 가면 오층폭포가 나타난다. 아침햇살이 연기처럼 쏟아져 계곡의 물상들이 형체를 잃고 희번득거린다.
이끼 낀 절벽 주변 습기찬 바위에서 자라난 이끼와 고사리들을 살피며 잠시 시간을 보낸다.
<고사리> 아주 작은 고사리류이다. 무엇일까. 주변에는 봉황이끼속으로 보이는 어린 개체들이 자라나고 있다.
<이끼> 이것은 사철 푸른 부채괴불이끼이다.
잎 하나만 달고 있는 이 녀석은 무엇인가.
옆에서 좀더 자란 녀석의 모습을 보면 박쥐나물이지 싶은데...
개바늘사초일까 했는데 꽃이삭이 길어보여 판단이 망설여진다.
삭막한 골짜기를 오르자니 별 흥미가 나지 않고 짙은 구름이 지나가며 해를 가리는 등 날씨마저도 별로다. 능선에 오른대도 그리 즐거울 것 같지 않아 발길을 돌린다.
길바닥에 가지 끝이 잘린 채 떨어져 있는 있는 꽃들이 많아 살펴보니 느릅나무과로 보인다. 나무의 주인을 찾아 둘어보니 수피가 거친 것이 과연 느릅나무인데 구체적인 종이 무엇인지는 판단이 안 된다.
오층폭포를 향해 내려오고 있는데, 한떼의 사람들이 길 위에 앉아서 쉬고 있다. 그런데 나를 발견한 한 사람이 다자고짜 사진을 찍어댄다. 무슨 영문가 했는데, 통제지역에 들어왔대서 현장 증거 사진을 찍는 모양이다. 발길을 돌리고 내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다소 황당하기도 했지만 국립공원 관리자의 입장도 있는 것이니 어쩌겠는가.
선처를 부탁하며 확인서까지 친절히 적어주고 산길을 바쁘게 내려선다. 최고 과태료가 50만원까지 나올 수 있다는데, 작은 침범으로 나 나라를 위해 큰 봉사를 하게 되는 것인가...
파란 물, 마음이 다 맑아진다.
등산로가 폐쇄된 줄도 모르는 또 다른 청년 둘을 첫나들이 폭포 부근에서 만나 발길을 돌리게 한다. 이들도 몰랐다면서 한참 올라온 길을 되돌아가서 산을 올라야 하는 것이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나중에야 확인한 것이지만 등산로 입구 한쪽에 '입산 통제'라고만 써 놓은 작은 안내판 하나 세워 놓았을 뿐이니 갈길이 바쁜 등산객들은 무심코 지나가기 십상인 것이다.
호랑버들인지... 병아리처럼 노란 꽃술이 아름답다.
비목나무 꽃은 언제 피려는지... 봉오리만 맺혔다.
입구를 나오면서야 '입산 통제'라는 간판을 본다. 출입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금지'란 말을 써야 할 것을 어째서 '통제'란 말을 썼을까. 그런 용어조차 구별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제시된 통제 사유는 분명 '산불 예방'인데, 그렇다면 산불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사람, 이를테면 화기를 소지한 사람만 출입시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게 '퉁제'의 의미이다. 화기를 소지하지 않은 사람을 출입 금지시킬 이유는 분명 없다. 손바닥을 비벼서 산에 불낼 모진 놈은 없을 것이다.
'금지'라면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이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게 알려야 할 것이다. 입구의 관리실에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출입하는 등산객들에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과태료가 부과된다면 저항을 해야할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흔하디 흔한 황새냉이와 눈맞춤 한번 해 보았다.
백무동 상가 옆, 아름드리 살구나무에 피어 있는 살구꽃이 참으로 아름답다. 벚꽃이나 매화도 아름답지만 꽃이 너무 다닥다닥 핀 자태가 번잡한데 비하여, 살구꽃은 줄기와 가지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며 널널하게 꽃송이를 매다니 한결 편안하고 정겹게 다가온다.
이렇게 지리산 여행은 간략히 끝내고 십여 년 전에 들렀던 적이 있는 실상사를 가보기로 한다. 가보기는 했지만 입구 다리에 있던 돌장승과 소박한 가람배치가 편안했던 절이라는 기억 외에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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